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의 장편소설. 주인공 로캉탱은 평범한 인간 존재로, 역사 연구를 하며 생을 관찰하고 분석하던 중, 일상 속 사물과 존재들에 대한 이질감과 혐오, 즉 ‘구토’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가 겪는 내면의 혼란과 존재론적 각성은 독자에게 ‘존재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로캉탱이 마로니에 나무의 뿌리를 바라보다가 돌연 구토를 느끼는 장면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뿌리보다 먼저 ‘이름’을 생각했다. 그가 그날 처음으로 나무뿌리를 본 것도 아니고, 멀쩡하던 뿌리가 갑자기 흉측한 모습으로 변한 것도 아니다. 달라진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었다. 그전까지 로캉탱에게 그것은 그저 ‘뿌리’였다. 한 단어 안에 얌전히 들어가 있는 사물,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이해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이름이 사물에서 미끄러져 떨어진다. ‘뿌리’라는 말이 벗겨지고 나자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설명도 목적도 없이 검고 축축하게 존재하는 어떤 것이었다.
나는 그 장면이 무서웠다. 어쩌면 우리가 세계를 견디는 가장 오래된 방법 역시 이름을 붙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무를 나무라 부르고, 사랑을 사랑이라 부르고, 슬픔을 슬픔이라 부른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믿는다. 말은 사물의 가장자리마다 선을 긋고, 넘쳐흐르는 세계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로 잘라낸다. 그래서 이름은 설명이라기보다 일종의 안도에 가깝다. 세계가 무한정 낯설어지지 않도록 덮어놓는 얇은 천 같은 것.
그러나 로캉탱의 눈앞에서 그 천이 찢어진다. 이름이라는 껍질 아래에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벌거벗은 세계가 놓여 있다. 그것은 무엇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있다. 이유 없이,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사르트르의 세계에서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 우연에 가깝다. 우리는 흔히 모든 것에 이유를 붙이며 살아간다. 씨앗은 나무가 되기 위해 자라고, 나무는 열매를 맺으며, 사람은 어떤 목적을 향해 살아간다고 믿는다. 원인과 결과를 이어 붙이면 세계가 하나의 정돈된 문장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캉탱이 마주한 존재는 그 문장의 문법을 거부한다. 세계는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다른 모습이어도 되었고, 아무것도 없었어도 되었는데, 우연히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로캉탱의 ‘구토’가 단순한 메스꺼움이라기보다 존재의 과잉을 몸으로 감지한 순간에 가깝다고 느꼈다. 머리로 “삶에는 본래 정해진 의미가 없다”고 이해하는 것과, 눈앞의 사물이 아무런 이유 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는 일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하나의 문장이지만 후자는 감각이다. 세계가 갑자기 너무 가까워지고, 너무 적나라해져서, 더는 개념이라는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없게 되는 순간. 로캉탱은 세계의 무의미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무의미에 직접 닿아버렸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머리가 아니라 위장에서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로캉탱이 재즈를 들으며 잠깐의 위안을 얻는 장면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마로니에 뿌리가 우연성의 극단이라면, 음악은 그와 정반대의 자리에 놓여 있다. 나무뿌리는 아무 이유 없이 그 자리에 있지만, 한 곡의 음악 안에서 음들은 아무렇게나 놓여 있지 않다. 앞의 음은 다음 음을 불러오고, 하나의 리듬은 다음 리듬을 예고한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각 음은 자신의 자리를 갖는다.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필연이 음악 속에서는 잠시 형태를 얻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예술이 인간에게 왜 필요한지를 생각했다. 어쩌면 인간은 아름다움을 위해서만 이야기를 만들고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 이유 없이 흩어져 있는 세계를 잠시라도 하나의 질서 안에 넣어보기 위해, 우리는 노래를 만들고 문장을 쓰는 것은 아닐까. 현실에서는 어제의 일이 오늘로 이어져야 할 이유가 없고,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만나야 할 필연도 없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는 첫 문장이 마지막 문장을 향해 나아가고, 음악 속에서는 하나의 음이 다음 음을 기다린다. 예술은 우연으로 가득한 세계 한가운데 인간이 세워놓은 작은 필연의 섬이다.
그래서 로캉탱이 마지막에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결말은 내게 단순한 희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세계에서 의미를 발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미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이야기를 쓰려 한다. 이미 존재하는 의미를 발견하는 대신, 존재하지 않는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보기 위해서다.
나는 이 선택이 이상하리만큼 아름답다고 느꼈다. 세계가 스스로 아무런 의미도 내어주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남는 일은 그 위에 자신의 문장을 쓰는 것뿐이다. 그것은 세계를 속이는 행위가 아니라 세계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고도 거기에 머물겠다는 선택에 가깝다. 삶에 본래부터 정해진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삶을 한 편의 이야기처럼 살아보려는 것. 아무것도 필연적이지 않은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기다리고, 계획하고, 기억하는 것. 어쩌면 인간의 존엄은 의미를 발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없다는 사실 앞에서도 의미를 만들어내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구토>를 덮고 나자 내가 매일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것들이 잠시 낯설어졌다. 책상, 창밖의 나무,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 나는 그것들을 너무 쉽게 이름으로 부르고, 이름을 아는 순간 그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상’이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나무’라는 이름이 벗겨진다면 그 자리에 무엇이 남을까. 아마 로캉탱이 본 것처럼 아무런 설명 없이 거기에 놓여 있는 존재 그 자체가 남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매 순간 그렇게 세계를 바라보며 살 수는 없다. 모든 이름을 벗겨내고 존재의 맨살만을 바라본다면 삶은 너무 무거워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름을 붙이고, 관계를 만들고, 내일의 계획을 세운다. 어쩌면 그것들은 모두 세계가 우리에게 준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 위에 조심스럽게 얹어놓은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구토>를 읽고 나니 그것이 오히려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만들어진 의미라고 해서 거짓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연이 아니라는 사실이 사랑을 덜 사랑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만났다는 사실이 관계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은 세계에서 스스로 어떤 것을 선택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들은 더욱 인간적인 것이 된다.
나는 이제 로캉탱의 구토가 절망의 끝에서 멈추는 장면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가 아무런 대답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정직하게 바라본 순간에 가깝다. 그리고 그 침묵 앞에서 로캉탱은 결국 자신의 문장을 쓰기로 한다.
세계가 우리를 위해 아무런 이야기도 준비해두지 않았다면,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쓰면 된다.
무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의미를 믿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를 알고도 의미를 만드는 것. 내게 <구토>가 남긴 것은 바로 그 이상하고도 쓸쓸한 반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