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 시인선 508권. 유희경 시집.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 이후 쓰고 고친 66편의 시가 오롯이 담겼다. 이전 시집에서 탄생과 죽음의 시간을 넘나들며 형용 불가능한 감정을 정제해 보였던 유희경은 이번 시집에서 그 불가능성을 고스란히 수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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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유희경 시집) 내용 요약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은 유희경이 2018년 4월 6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시집으로, ISBN 9788932030920을 가진다. 📖 약 134쪽으로 구성된 문학과지성 시인선 508번 이 시집은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의 세 번째 시집으로, 『오늘 아침 단어』(2011),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2017)에 이은 66편의 시를 담았다(). 유희경은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의 운영자이자 시 동인 ‘작란’의 일원으로, 섬세한 감각과 위
계단참의 남자와 여자는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울고 있고 남자는 神父인지도 모른다 계단에는 간밤의 비가 반짝이고 있다 잠시, 손차양을 하지 않고서는 볼 수 없게 환하다
종탑의 그림자가 무너지기 직전, 정오의 종이 울린다 아무 일 없이
남자가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 여자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여자가 보는 것은 그저 눈부심인지도 모르지 걸음을 멈추고 나는, 짝 없는 다짐을 생각해보기도 했었다
- ‘사월 -대화’, 유희경
나는 엔진 소리를 듣다가 커다란 회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데 상념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누군가 벨을 눌렀고 나는 창문을 열었다 노을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엔진의 소리를 듣기 시작하였으나 회전은 아주 느리거나 멈춰버린 듯했고 중심은 보이지도 짐작되지도 않았다 나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세종로에서 사직로 쪽으로 꺾여 들어가는 그쯤의 일이다 곧 밤이 시작될 것이었고 누군가는 늦었고 누군가는 즐거웠고 누군가는 잊혀갈 그런 밤에 대해서라면 나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나는 창문을 닫았다 여름이 아니었다 나는 소년도 아니었다 나는 나를 생각했고 여름의 시작을 떠올렸고 그리운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따뜻한 쪽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런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깊은 자국을 남기고 나는 중심으로부터 아주 약간 더 멀어져서
- ‘조금 더 따뜻한 쪽으로’, 유희경
오늘 밤을 생각하면 나는, 흔들리는 나뭇가지 아래 흔들리는 빛 그늘 속에 흔들리는 요람 속 흔들리는 아기처럼 울음을 입에 물고 걸음을 떼지 못한다 이제 더 갈 곳이 없으므로 당신이 닮은 삶을 토닥이다 잠에 드는 동안 나는 침대의 한끝을 매만지며 뒤척여도 볼 것이다
- ‘섬’, 유희경
MILK는 쏟아져도 밀크의 밖을 넘지 않는다
포개져 서로를 밀어내는 연인처럼
무늬가 남겨놓은 냄새의 자국처럼
왕관을 그리는 한 방울
작고 부드런 소리처럼 나는
당신이 좋다 당신이
문을 두드리는 순간이 좋다
당신이 나타나는 것이 좋다
당신 형태의 맛을 상상해보는 것이 좋다
엎질러진 밀크는 MILK의 방향으로 천천히 간다
그때, 나와 당신의 대화는 아마 방금 딱딱한 바닥에 쓰러져 죽어버린 남자, 죽은 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구름, 그것이야말로 장엄한 풍경 그러니까 너무나 사랑스러운 것 나와 당신의 대화는 아마 돌아오지
못할 거야 죽어서 죽은 채 흘러갈 거야
바닥의 밀크에서 새로운 MILK가 태어난다
당신을 당신 곁에서
자국을 둥글게 남기며
천천히 움직이는 당신 곁에서
당신을 내버려두길 바랍니다
좋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당신뿐 아니라
혀를 대고 미끄러지는
발음 근처에서 당신이
당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무엇이 우리들의 왕인지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말라붙은 MILK는 milky의 길을 가고, 밀크는 우뚝 멈춰 선다
그래서 어땠나요
오늘 밤은, 오늘 밤의 하늘은
촘촘한가요
MILK는 밀크의 무수한 상상
MILK는 그치지 않는 정체
자꾸자꾸 드러나는 MILK의
당신이 당신의 MILK를 찾아 떠나갑니다
굴러가다가
멈춰버리는
MILK
찰랑거리는 밀크
조금 쏟아지는 밀크
사랑스러운 MILK
MILK의 밤
밀크의 혼돈
밀크의 범람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요
가득한 one cup of 밀크
MILK 한 잔만큼의 상상 그리고
종이팩에 담긴 당신과 나와 우리들의 밀크는 단 하나의 날짜를 향해서
- ‘MILK’, 유희경
어떤 날들이 찾아왔나요 낯선 구름이 드리워진 푸른 초원에는 양 떼 같은 빛 자국 말도 못하는 울음 그건 대체 무슨 색인가요
답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마음이 소낙비처럼, 닿지는 않고 젖어갑니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울음이 어디까지 갔는지 자취는 보이지 않고 멀리 가는데
밤이 찾아오고 몰래 초원의 들판이 아득하게 덮여 구름과 구별되지 아니할 때 자박자박 발자국을 내는 것은 달빛이 아닐 거예요
그 밤엔 낡고 흐린 담요를 덮어줄게요 당신은 당신을 키워요 당신을 삼켜요 당신을 비밀로 삼아요 나는 당신을 업고 밤을 다 걷겠어요 그러니 아무도 몰래
아무도 몰래 어떤 날들이 찾아왔나요 당신과 내가 서 있는 이 초원 위엔 목마른 안타까움이 떠돌고 밤은 아직도 한창인데,
- ‘어떤 날들이 찾아왔나요’, 유희경
그 며칠 동안 나는 아무 일도 못 했다
책상이 점점 두꺼워져가고
의자는 두 개쯤 있고 어울리는 사람
한둘 떠올리는 동안
네가 없어지는 동안
그를 기억해보려는 동안 그러니까
그가 너를 대신하려고 의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소리
빈 곳이었다 아무도 없다
지금은 안부와 증오가 같다
손을 씻고 뚝뚝
화장실 바닥에 흘리는 자리 같아
거기에도 있는 게 여긴 없다
우리는 다 착하다 씨를 뱉듯
우리가 나를 버린다 그러니까,
버려진 씨처럼
그 며칠 내가 수족을 다 참느라
아무런 일도 못 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동안엔
의자가 두 개쯤 있고
비어서 있느라 오전과 오후를
보내고 그런 일과 상관없이
표정을 지워버린 어떤 사람
세상에 표정을 다 비우다니!
그런 사람이 있느라 또 없어서
나는 또 아무 일도 못 했던 것이다
그동안 아무런 일도
- ‘아무 일도’, 유희경
ㅤ나와 의사는 오래 알고 지냈다 십오 년쯤 되었을 것이다 나는 사소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주 이 병원을 찾는다 진료실 문을 두드리는 건 내가 아니라 하나뿐인 간호사다 그녀에게선 옥상의 담배 냄새가 난다 나는 거리에서, 몇 번인가 그녀와 마주친 적이 있다 의사는 아직도 종이로 만든 차트를 사용한다 그 종이에는 지난한 나의 지난 병력이 적혀 있을 것이다 몇 단어 되지 않을 나의 통증을 그는 심각하게 더듬고, 그럴 때마다 나는 간호사의 허연 낯빛을 떠올리며 기침을 참는다 어디가 아프냐고요? 모르겠습니다 나는 모르고 있어요 의사는 차트에 적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묻지 않는다 문을 열고 나오면 커다란 창문 너머로 그날그날의 날씨가 펼쳐지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생활’, 유희경
비가 날리고 있다 가루처럼
밤의 사방에 달라붙고 있었다
더는 커다래질 수 없는 수레의 곁에서
나는 우산을 거두고 어깨를 털어내듯
생각한다 어둡다 어제보다 더
가지들은 보이지 않고
잎사귀에선 오래전 떨어진
꽃잎 말라가는 소리
서가에 가득 들어찬
책등의 나열처럼 나는
이 순서가 참으로 무섭다
열리지 않으려는 세계와 마침내
열어젖히는 세계의 반목이
당연한 태도로 도착하고 있구나
산산이 젖어가고 있다 더는
두려워하지 않으려 하지만
여기서부터 어디까지일까
밤을 잊은 회계사의 멀어가는 눈처럼
알 수 없는 것을 붙들고 지우며
이 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 ‘공포’, 유희경
겨울이었다 언 것들 흰 제 몸 그만두지 못해 보채듯 뒤척이던 바다 앞이었다 의자를 놓고 앉아 얼어가는 손가락으로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그리 熱을 세니 봄이었다 메말랐던 자리마다 소식들 닿아, 푸릇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제야 당신에게서 꽃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 오는 것만은 아니고, 오다 오다가 주춤대기도 하는 것이어서 나는 그것이 이상토록 좋았다 가만할 수 없이 좋아서 의자가 삐걱대었다 하나 둘 셋, 하고 다시 열을 세면 꽃 지고 더운 바람이 불 것 같아, 수를 세는 것도 잠시 잊고 나는 그저 좋았다
- ‘봄’, 유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