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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책
출간일
2025.8.28
페이지
144쪽
상세 정보
이태수 시인이 스물세 번째 시집 『마음의 길』(문학세계사)을 냈다. 「이 풍진세상에서」, 「내가 나를 찾아」, 「목어木魚 울음」, 「강가의 저물녘」, 「은피리 판타지아」, 「달항아리」, 「겨울 입새에서」, 「한밤의 눈」, 「거울 앞에서」, 「먼 여정旅程」 등 올해 연초에 낸 시집 『은파』 이후의 시 78편을 실었다. 반세기에 걸쳐 ‘현실 초월’을 기본명제로 삶의 근원과 그 의미를 지성적 사유와 감성적 상상으로 모색하고 추구해온 그는 이 시집을 통해 현실적 자아를 비우고 내려놓으면서 내면의 본질적 자아에 도달하는 경지를 보여준다.
상세정보
이태수 시인이 스물세 번째 시집 『마음의 길』(문학세계사)을 냈다. 「이 풍진세상에서」, 「내가 나를 찾아」, 「목어木魚 울음」, 「강가의 저물녘」, 「은피리 판타지아」, 「달항아리」, 「겨울 입새에서」, 「한밤의 눈」, 「거울 앞에서」, 「먼 여정旅程」 등 올해 연초에 낸 시집 『은파』 이후의 시 78편을 실었다. 반세기에 걸쳐 ‘현실 초월’을 기본명제로 삶의 근원과 그 의미를 지성적 사유와 감성적 상상으로 모색하고 추구해온 그는 이 시집을 통해 현실적 자아를 비우고 내려놓으면서 내면의 본질적 자아에 도달하는 경지를 보여준다.
출판사 책 소개
삶을 지성적 사유와 감성적 상상으로 추구
비움으로 본질적 자아에 도달한 경지 보여
이태수는 등단 이래 50여 년에 걸쳐 23권의 시집을 간행하며 누구보다 활발한 시작 활동을 꾸준하게 펼친 원로 시인이다. 그동안 자신과 세계의 삶의 근원과 의미를 지성적 사유와 감성적 상상으로 추구해온 그의 시편들이 이번 시집 『마음의 길』에 이르면 “마음”을 화두로 삼아 집중적으로 탐색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그에게 “잃어버린 나”는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적 자아의 “비우고 내려놓는” “마음”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마음”은 물론 “몸”까지 비움의 철학을 생활 속에 내면화할 때 본질적 자아와의 만남은 성사된다. 본질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는 둘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였다. 그래서 현실적 자아와 본질적 자아는 서로가 합일될 수 있는 관건은 현실적 자아의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내면의 본질적 자아를 찾고 만나는 방법론이다.
해설을 통해 문학평론가 홍용희는 “이태수의 이번 시집은 ‘내가 나를 찾아’가는 비움의 여정이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며, 그의 반세기를 훌쩍 넘어서는 시적 삶의 꾸준한 정진이 도달한 한 경지이다.”라고 평가했다.
그에게 “마음의 길”은 “내가 나를 찾아”(「내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며 “하늘”의 “순리”(「한여름 풍경」)를 터득하는 방법론이다. 물론 이처럼 “나를 찾아”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를 잃어버렸다는 상실 의식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을 잃어버렸으며 “잃어버린 나”(「내가 나를 찾아」)를 찾을 수 있는 “마음의” “길”이란 어떻게 열어갈 수 있는 것일까?
나를 들여다보면 먼지투성이
눈을 돌려봐도 티끌투성이다
어쩌려고 세상이 이리 돌고 있는지
아수라장을 헛도는 것 같아
먼 하늘을 우러르고 있어도
마냥 그런 도가니일 뿐이다
세상이 하늘을 따르는 날이 언젠가
먼 길 돌고 돌아서 올 건지
이 염원도 허당 짚기일는지
새들이 날아가는 하늘을 우러러본다
마음 눈이라도 높이 올라가서
이 풍진세상이 바뀌는 걸 보고 싶다
—「이 풍진세상에서」 일부
시적 화자는 “먼지투성이”와 “티끌투성이” 속에 묻혀 살고 있다. “먼지”와 “티끌”이 “나”와 “세상”의 본모습을 뒤덮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아득한 “먼 하늘을 우러”러본다. 그러나 세상은 “아수라장”이며 “도가니일 뿐이다”. 그야말로 “이 풍진세상”이다. 이때 그는 어느새 “날아가는 새”를 선망하게 된다. “새”는 지상의 중력권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새”처럼 현실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다. 이때 그는 “마음눈이라도 높이 올라가”기를 바란다.
“마음”은 중력의 지배를 받는 육체가 없기 때문에 존재 초월이 가능하다. “마음눈”, 즉 마음의 감각으로 지상으로부터 “높이 올라가서” “풍진세상”을 조망하고 “세상이 하늘을 따르는 날”로 “바뀌”기를 염원한다. “세상이 하늘을 따르는 날”로 바뀔 때, “먼지투성이/티끌투성이/아수라장/도가니”로 표상되는 현실이 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먼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나와 내가 평행선으로만 간다는
느낌이 새삼 든다
지금 여기의 나와
몽매에도 애타게 되고 싶은 내가
만날 때가 오기나 할지
먼 수평선 저 너머까지
만나러 마음은 달려가지만 나는
되돌아오고 말 뿐
—「한여름 풍경」 전문
“먼 수평선”이 마치 “나와 내가” 서로 만나지 못하는 긴장 관계로 이어지는 “평행선”처럼 느껴진다. 앞의 “나”는 “지금 여기의 나”이고 뒤의 “내”는 “몽매에도 애타게 되고 싶은” 자아이다. 이를테면, 일상성 속에 갇힌 현실적 자아와 삶의 원상에 해당하는 본질적 자아의 불연속적 긴장 관계이다. “마음”은 본질적 자아를 향해 “달려가지만” 그러나 “지금 여기의 나”는 다시 현실의 지배 논리 속에 복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와 내가” 서로 연속성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 앞에 다음 시편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잠이 달아난 늦가을 밤입니다
어두운 마음에 순백 달항아리 하나
데려와 앉혔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영상으로 본 적이 있는
둥글고 커다란 그 항아리를
마음의 한가운데 앉혀놓고 싶습니다
마침 창 너머 보름달 둥그렇게 뜨고
귀뚜라미 합창이 한창이며
별들은 내려올 듯이 반짝입니다
그런데 왜 가슴엔 낙엽 지고
마음은 정처 잃은 채 어두워질까요
요즘 세상 탓이기만 할는지요
언제부턴가 순백 달항아리를
마음속에 끌어당기면서 동경했습니다
—「달항아리」 일부
시적 화자는 “순백 달항아리”를 “마음의 한가운데 앉혀놓고 싶”어 한다. “둥글고 커다란” “달항아리”를 “동경”하면서, 어느새 “창 너머 보름달 둥그렇게 뜨고/귀뚜라미 합창”과 “별들”이 “내려올 듯이 반짝”이는 것을 생생하게 느낀다. “달항아리”가 “보름달”과 “별들”을 “끌어당”겨 담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이러한 정황이 가능한 것은 “달항아리”의 내부가 텅 비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달항아리”를 “마음의 한가운데 앉혀놓고”자 하는 것은 마음의 비움을 통해 대자연의 무한을 채우고자 하는 바람으로 해석된다.
이 대목은 바로 장자가 설파한 “허실생백虛室生白”의 감각적 표상으로 해명된다. 마음을 깨끗이 닦아 텅 비우는 심재心齋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감각과 생각을 지우고 비우는 것이 삶의 이치를 터득하고 삼라만상과 하나가 되는 길이며 “하늘을 따르는 날”(「이 풍진세상에서」)에 도달하는 길임을 일러주고 있다.
내가 보고 있는 꽃이
내 것이 아니듯
내가 가진 것이
나를 스쳐 떠나갈 뿐
세상 모든 것도 마찬가지다
한동안 나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또 새기면서도
왜 가지고 싶은 마음까지는
말끔히 비우지 못하고 있는 걸까
—「미련」 일부
등 굽은 소나무는 그늘 드리우며
한결같이 제자리에서만 적선하는지
누가 오든 말든 그저 묵묵히
하늘을 이고 땅을 지킨다
길섶의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마음 낮추듯이 등을 구부리고 있다
새기면서 본받아야 할 자세 같다
—「솔숲길을 걸으며」 일부
깊은 산 속에 들면
나는 밀림 속의 한 포기의 풀
울창한 나무 그늘에 조그맣게
흔들리는 한 포기의 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듯이
나무 그늘에 끼어들어
있는 듯 없는 듯한 한 포기의 풀
—「밀림에서」 일부
마음을 “달항아리”처럼 텅 비우고자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미련”이다. “꽃”은 “바라”만 봐야 할 대상임에 틀림없지만, 어느새 “가지고 싶”은 소유욕을 갖게 된다. 세상사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갈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집착의 “미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솔숲길을 걸으며” 문득 소나무의 모습에서도 깨달음을 얻게 된다. “소나무들은 하나같이/마음 낮추듯이 등을 구부리고 있”지 않은가. “나” 역시 한 그루의 “소나무”처럼 “낮추”어 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깊은 산 속”의 “밀림”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깊은 산 속에 들면”, “나는 밀림 속의 한 포기 풀”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알게 된다. “밀림”의 중심이 “한 포기의 풀”에 있지 않듯이 “나” 역시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세상 전체로 볼 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낮고 작은 존재일 따름이다. 이처럼 자연의 존재성은 있는 그대로 “세상 이치의 거울”(「겨울 입새에서」)이다.
나무들은 잎새를 벗는다
나무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데
나무들은 땅을 내려다본다
나도 한동안 땅을 내려다보다가
나무들의 슬기를 새겨본다
비우고 내려서 겨울나기를 하는
나목의 형식을 따라야만
찬 바람 부는 세상에서 살아남고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아야
그윽하게 차오를 수 있을 터이다
한결같이 땅에 힘을 주면서
하늘 우러르는 나무들의 슬기는
세상 이치의 거울과 같다
비우고 지우고 내려놓는 지혜를
새겨보게 하는 겨울 입새다
—「겨울 입새에서」 일부
“나무들”이 가을이 되면서 “잎새를 벗는다”. 스스로 자신을 “비우고 내”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겨울나기를 하는 나목의 형식”이다. 이와 같이 나 역시 “비우고 내려놓아야” “찬 바람 부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봄이면 다시 “그윽하게 차오르”는 나무처럼 나 역시 다시 풍요로워질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비우고 내려놓”는 것은 나무를 나무답게 하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존재 원리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비우고 내려놓”았을 때 나는 본래의 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쓸모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비어있는 공空이기 때문이다.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 바로 모든 존재자의 본성을 찾고 지키는 과정이라는 가르침이다. 바퀴통이 비어있어야 바큇살이 수레바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릇이나 방 또한 가득 차 있으면 그릇이나 방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사람도 이 점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도 “마음이 가난해야 복 받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음이 가난”하게 비어있어야 자신을 창조한 하느님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집착과 욕망이 채워지면 하느님의 뜻을 담을 공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가 부여한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이렇게 보면, “비우고 내려놓는” 과정이 곧 본래의 나를 찾고 만나는 여정이 된다. 여기에 이르면, 시적 화자에게는 “마음”은 물론 “몸”까지도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 절실한 바람과 다짐이 된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문득
그래도 지금 여기가 좋다는 생각이 든다
몸살을 심하게 앓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한다
마음이 가난해야 복 받는다는 사실을
진즉부터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마음 따로, 몸 따로인 채였다가
뒤늦게 몸도 좇아가려고 하기 때문일까
창가에 앉아 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보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에 귀 기울인다
가는 길이 온 길과 달라져야 할 텐데
채우려고 하기보다 비우고 내려놓으면서
물이 흘러가듯이 구름이 가듯이
주어진 길, 거스르지 않고 갔으면 한다
마음과 몸이 하나 되어서
—「그래도 지금 여기가」 전문
시적 화자의 “지금, 여기”에 대한 긍정과 순응의 세계관이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마음 따로, 몸 따로인 채였다가/뒤늦게 몸도 쫓아가려고 하”면서 배가된다. 그것은 “창가에 앉아” 바라보는 “나뭇잎들”이나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처럼 자연의 순리에 충실해진 삶이다.
물론 이러한 자연의 순리에 따른 삶은 “채우려고 하기보다 비우고 내려놓”는 자세가 생활철학으로 내면화되면서 가능해진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바람이 흔들고 세월이 흔들고/가까운 사람들도 흔들”고 “이따금 내가 나를 흔들기도” 하지만 “흔들리며 중심을 잡”(「중심 잡기」)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경주하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나를 찾”(「내가 나를 찾아」)는 길이기 때문이다.
한편, 다음 시편은 “내가 나”를 만나는 “어느 한나절”의 찰나를 그리고 있어 주목된다. “마음과 몸이 하나 되”는 지점에서의 순간적 체험이다.
정신 줄을 놓듯이 한나절
서재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본다
지나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하늘에는 몇 점 구름이 떠간다
옛꿈들이 창유리에 어른거리고
지저귀는 새들도 들락날락한다
책상 위의 책들은 단잠에 들고
기억의 창이 닫히다가 열리곤 한다
한나절을 정신 줄 놓듯이 있으면
나도 보이다 말다가 한다
—「어느 한나절」 전문
“정신 줄을 놓”고 “창밖을 바라본다”. “나뭇잎”이 “흔들리고” “몇 점 구름이 떠간다”. “책상 위의 책들”도 “단잠에” 들고 “기억의 창이 닫히다가 열리곤 한다”. 현실적 자아의 방어기제가 희미해지는 지점이다.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와해되면서 자아와 세계의 합일이 용이해진다. 장자 철학에서 전언하는 자기를 잊고 만물과 하나 되는 좌망坐忘의 단계에 가깝다. 이때 시적 화자는 문득 “잃어버린 나”를 만난다. “나도 보이다 말다가 한다”는 것은 내가 찾던 “잃어버린 나” 역시 “보이다 말다가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다음 시편은 “잃어버린 나를”(「내가 나를 찾아」) 만나는 찰나가 환영처럼 펼쳐지고 있다.
저물녘 누가 휘파람 불며 걸어간다
강가엔 은사시나무 긴 그림자
그 그림자를 디디며 점점 멀어진다
허공에 흩어지는 휘파람 소리
무표정한 산이 강물에 물구나무서고
처량한 그 소리도 희미해진다
그의 뒷모습이 가물가물 멀어져가고
은사시나무 가지 끝에 걸렸던
희멀건 낮달도 이젠 보이지 않는다
나는 쓸쓸해서 휘파람을 분다
은사시나무도 그림자를 거둬들인다
—「강의 저물녘」 전문
시적 배경이 “저물녘”의 강가이다. “누가 휘파람 불며 걸어간다”. 그 누군가가 부는 “휘파람” 소리가 “은사시나무 그림자”를 따라 멀어지면서 “허공에 흩어지”고 있다. “그의 뒷모습이 가물가물 멀어져”가면서 “희멀건 낮달도 이젠 보이지 않는다”. 이때 “나는 쓸쓸해서 휘파람을 분다”. 앞에서 “휘파람 불며 걸어”가던 그 누군가와 지금 “쓸쓸해서 휘파람을” 부는 “나”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
이 둘은 모두 하나의 나이다. 그러나 전자가 “잃어버린” 본래의 “나”라면 후자는 지금 여기의 현실적인 나이다. “먼 수평선”처럼 “평행선으로만” 가던 “나”와 “내”(「한여름 풍경」)가 아련히 스치듯 교차한다.
이와 같이 “마음”과 함께 “몸”도 “비우고 내려놓”는 경지에 근접해지면서 “잃어버린 나”(「내가 나를 찾아」)와의 조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편 역시 환정적 분위기 속에서 전개되는 본질적 자아와의 만남을 암유적으로 보여준다.
꿈 깨어 창밖을 내다보니
꿈속에서 내리던 그 눈이 내린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렸기에
꿈속의 그 눈이 내리는 것일까
밖으로 나가서 눈 마중을 하고 싶다
침묵을 딛고 오듯이
오래 꿈꾸고 기다리던 적멸과 같이
한밤에 내리는 눈은
꿈과 그 바깥을 아우르고 있는 걸까
꿈과의 경계를 허물어 놓듯이
한밤에 내리는 희디흰 눈은
몽매에도 그리워하던 그 눈이다
꿈을 깨서도 꿈결만 같다
—「한밤의 눈」 전문
“꿈속에서 내리던 그 눈이” 꿈 밖에서 내리고 있다. “꿈”의 안팎의 경계가 무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꿈을 깨서도 꿈결만 같다”. 이것은 또한 “꿈결” 역시 “꿈”에서 깬 이후와 연속성을 이룬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꿈”의 안팎의 경계가 와해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꿈속에서 내리던 그 눈”을 “몽매에도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몽매에도 그리워”하던 꿈속의 “눈”이란 문맥적 의미로 보아 “먼지투성이”, “티끌투성이”의 “풍진세상에서” 간절히 그리워하던 “몽매에도 애타게 되고 싶은 내”(「나를 기다리다)와 상응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여기에 이르면, 이태수에게 “잃어버린 나”는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적 자아의 “비우고 내려놓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물론 “몸”까지 비움의 철학을 생활 속에 내면화할 때 본질적 자아와의 만남은 성사된다.
본질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는 둘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였던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추스르며 밤하늘 우러러/영롱한 별빛을 끌어당겨 품”을 수 있듯이, 현실적 자아와 본질적 자아는 서로가 합일될 수 있다. 관건은 현실적 자아의 마음을 “달항아리”처럼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내면의 본질적 자아를 찾고 만나는 방법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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