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의 기술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펴냄

평온의 기술 (남을 위한 삶보다 나를 위한 삶에 몰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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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8.5.30

페이지

308쪽

상세 정보

‘남을 위한 삶’보다 ‘나를 위한 삶’에 몰두하기. 평온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삶 혹은 나를 위한 삶을 이루기 위한 조건이다. 많은 사람이 지금 ‘나를 위한 삶’을 살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남들의 눈치를 보고, 남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몸부림치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많이 갖거나 누리지 못하면 괴로워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남들을 의식하는 삶을 진정 ‘나를 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남을 위한 삶’이다.

물론 사람들은 내심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 데 뭘”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자기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남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해 침묵하게 만든다. 그것이 ‘나를 위한 삶’보다 ‘남을 위한 삶’에 몰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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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상

@luqy3iafoyox

역시 명쾌 통쾌^^

평온의 기술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2018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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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남을 위한 삶’보다 ‘나를 위한 삶’에 몰두하기. 평온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삶 혹은 나를 위한 삶을 이루기 위한 조건이다. 많은 사람이 지금 ‘나를 위한 삶’을 살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남들의 눈치를 보고, 남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몸부림치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많이 갖거나 누리지 못하면 괴로워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남들을 의식하는 삶을 진정 ‘나를 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남을 위한 삶’이다.

물론 사람들은 내심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 데 뭘”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자기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남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해 침묵하게 만든다. 그것이 ‘나를 위한 삶’보다 ‘남을 위한 삶’에 몰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출판사 책 소개

나다운 삶을 살기 위한 인문 에세이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연습”


최근 등장한 소확행, 욜로, 휘게 등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면서 희망이 없는 상태에 처한 사람들이 최소한 할 수 있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다. 소확행이 커피나 디저트 시장 등 외식업계 트렌트로만 그쳐 마케팅 전략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과 비판이 적지 않지만, 확실히 ‘나 자신을 위한 삶’을 향한 사람들의 욕구는 점점 커지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물질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기존의 행복에 대한 정의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워라밸(work and life)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고. 한때 ‘저녁이 있는 삶’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창한 삶의 목표를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삶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하거나 소박한 행복에 만족하자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 사회에서 계층 혹은 계급 상승을 위한 욕망을 키우기보다는 작은 일상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자는 것이다.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들을 충족시켜줄 방정식을 찾는 것이다.
평온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삶 혹은 나를 위한 삶을 이루기 위한 조건이다. 많은 사람이 지금 ‘나를 위한 삶’을 살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남들의 눈치를 보고, 남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몸부림치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많이 갖거나 누리지 못하면 괴로워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남들을 의식하는 삶을 진정 ‘나를 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남을 위한 삶’이다.
물론 사람들은 내심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 데 뭘”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자기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남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해 침묵하게 만든다. 그것이 ‘나를 위한 삶’보다 ‘남을 위한 삶’에 몰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로 살기 위한 연습


지식인들이나 자기계발 전문가들은 앞다퉈 ‘고통이 주는 놀라운 선물’을 강조하면서 “고통을 즐겨라”라고 말한다. 고통 없는 삶은 가능하지 않겠지만, 고통을 그렇게 미화해도 괜찮은 걸까? 고통은 끔찍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불안과 콤플렉스를 떨쳐버릴 수 있다면 해볼 만한 게 아니냐고 말하는 게 적당한 수준이 아닐까? 성공에 대한 욕망은 우리 내면의 불안을 극복하려는 데서 기인한다. 욕망이 크고 경쟁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내면에 더 강한 불안이 잠재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증명하고 과시해 보임으로써 내면의 콤플렉스를 상쇄하려고 든다. 그러나 성공을 위한 행위와 성공으로 얻는 평판은 편안한 상태의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어쩌면 성공의 다른 이름은 고통인지도 모르겠다.
워런 버핏은 “능력의 범위를 알고, 그 안에 머물러라. 범위의 크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범위의 경계를 아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신의 능력 범위를 넓혀나가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로 자신의 단점이나 약점을 보완하는 일에 매달린다. 물론 세상이 워낙 급변하는 탓에 한 가지 강점이나 장점만으로는 불안해서 다른 능력도 키워두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능력의 범위를 무시하는 이면에는 자신의 전공으로 삼은 능력이 탁월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목표는 낮고 작을수록 좋다. “명확한 목표만 있다면 삶의 가속 페달을 밝고 빠르게 앞으로 달려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다”고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가? 어쩌면 “도달하기 힘든 목표는 불만족스러운 삶을 만드는 비결”일 수 있다. 반대로 낮고 작은 목표를 세워야 성공의 경험을 만끽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목표가 크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목표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자는 것이다. 큰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작은 성공의 경험을 쌓아야 자기 효능감도 높아진다. 또 완벽주의도 사람을 힘들게 한다.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선택’, 즉 ‘그만하면 괜찮은’ 선택을 하는 것도 좋다. 사실 완벽주의는 자만이나 오만에서 비롯된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높은 기준을 자신은 충족시킬 수 있으며 충족시켜야 한다고 자신을 못살게 구는 건 그 바탕에 남들을 낮춰 보거나 무시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너드 코헨은 “뭐든 틈이 있어요. 그래야 빛이 들어오죠”라고 노래하지 않았는가?

상처받지 않을 자유


우리는 일상에서 “너는 매사에 어쩜 그렇게 예민하고 유난스럽게 구니?”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것은 아예 욕이나 다를 바 없다. 전체 인구의 20퍼센트가량이 민감한 성향을 갖고 있는데, 이들은 극소수자나 되는 것처럼 유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으며 살아간다. 급기야 이들은 ‘루저’로 취급받기까지 한다. 미투(#MeToo) 열풍도 그런 풍토가 조성해온 ‘둔감한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민감해서 상처를 받는 사람들과 둔감해서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우리는 전자를 향해서만 둔감해지라고 권하는 걸까? 후자에게 민감해지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전두환의 5공 정권 치하에서 필화 사건으로 극심한 고문을 받았던 소설가 한수산은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도저히 이런 나라에서 살기도 힘들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며 일본으로 떠났다. 후일 한수산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용서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위해 그들을 용서했다”고 고백했다. 한수산의 용서는 자신이 생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용서다.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겠지만, 어쩌면 진정한 용서는 판타지일 수 있다. 우리에게 가능한 용서는 ‘남을 위한 이타적 용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이기적 용서’다.
우리는 누구나 약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약점은 감추려고 애쓴다고 해서 감춰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서도 모르는 척해주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약점을 공개하는 데 겁을 먹을 정도로 애쓰지 않는 게 좋다. 자신의 약점을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대표적 인물이 미국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다. 그는 “흑인이었다. 사생아였다. 가난했다. 뚱뚱했다. 미혼모였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라고 자신의 약점을 만천하에 공개하면서 약점에 신경 쓰는 세상을 비웃었다. 물론 자신이 감추고 싶은 약점이 공개된다면 평온이 깨지겠지만, 그것이 알려질까봐 전전긍긍하는 것보다는 낫다.

‘나를 위한 삶’에 몰두하기


‘나 아닌 나’로 사는 것은 쉽지도 않거니와 좋지도 않다. 스스로 변화를 택한 사람은 강요당한 변화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항변하고 싶겠지만,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빨리, 많이 변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게 현실이다. 나를 위한 삶이 없는 것이다. 변화란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할 때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할 때 찾아온다. 자기 내면의 힘을 자유롭게 풀어줄 때 변화를 위한 에너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또한 그 변화의 폭과 정도가 궁극적으로 나 자신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는 게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다 포기를 하면서 살아간다. 대통령도 포기하고, 재벌 총수도 포기한다.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이 성공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좀 많은가? 그런데 우리는 포기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갖는다. 그러나 이제는 포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맹목적인 도전 예찬론은 무책임한 사기극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포기가 큰 도덕적 흠결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사회에서 한 개인이 포기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판단하긴 어렵지만, 포기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암묵적 음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깨달을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포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다수를 들러리로 세워 자신들의 특권을 정당화하는 기존 시스템은 무너지게 되어 있지만, 우선 나 자신의 평온을 위해 포기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얼마든지 ‘포기하라 한 번뿐인 인생이다’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이자 시인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을 감당하며, 구할 수 없는 것은 품위 있게 포기할 줄 아는 법을 배운 사람에게 축복 있으라”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아니 나는 평온한가?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뜯어봄으로써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도 자신에게는 과분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평온의 축복을 누리자. 마광수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은 지극히 가벼운 것에서부터 온다. 무더운 여름날 소나기가 쏟아져내릴 때 우리는 행복하고, 향기로운 커피의 냄새를 음미할 때 우리는 행복하고, 땀으로 뒤범벅이 된 몸뚱아리를 샤워의 물줄기로 시원하게 씻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 ‘나를 위한 삶’에 몰두하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다. 자신의 처지에서 행복을 느끼고 만족하고 자유를 느끼는 삶이면 족하다. 그것이 ‘나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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