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시>의 젊은 동인 곽재구의 처녀시집. 80년대의 가장 첨예하고 진지한 시적 성취로 기록될 「조경님」 「영자」 「대인동」 연작 등 모두 63편을 수록. 그의 시에는 역사의 현장에 몸 붙이고 사는 젊은 가슴의 함성이 배어 있고, 이 시대의 진정한 화해와 사랑을 위한 기도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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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사평역에서 (창비시선 40) 내용 요약 🚂
곽재구 시인의 첫 시집인 '사평역에서'는 1980년대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소외되고 지친 민중들의 삶을 따뜻하고 서정적인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집입니다. 이 시집은 제목이기도 한 표제작 '사평역에서'를 포함하여, 도시의 변두리나 고향의 언저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과 그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미를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집의 표제작인 '사평역에서'는 눈 내리는 밤, 낡은 사평역 대합실에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고단한 삶의 풍경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합니다
너를 보면 마음이 슬퍼진다
돌 지나 만 두살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고
엄마 아빠 또박또박 모국어도 배운다
네 눈에 보이는 세계는 그저 그대로 낙원
너의 사랑스런 세계의 꿈을 위해
회사원인 아버지는 하루품을 버린다
앞마당을 누빌 세발자전거를 사고
정의를 위해 쌍권총을 사고
네가 가지고 싶은 그 모든 낙원을 위해
너의 어머니는 적금을 붓고 밤이면
옛날 이야기와 성경도 들려준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너의 천국을 보면
독한 나의 마음이 슬퍼진다
네 다섯살 적엔 어머니와 아버지를 갖고
네 열살 적엔 선생님과 친구들을 갖겠지
그런데 네 스무살 적엔 무엇을 가질 수 있을까
네 서른살에 무엇 하나 갖고 싶다 말할 수 있을까
네 마흔살에 집 한 칸과 마누라와
들콩 같은 새끼 몇 알을 가졌다고 해서
너는 네가 가질 것의 단 한 가지라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네 눈에 고인 맑은 세계를 보면
마음 외엔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삼촌의 오늘이 또 한번 슬퍼진다.
- ‘조카’, 곽재구
바람은 자도 마음은 자지 않는다
철들어 사랑이며 추억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싸움은 동산 위의 뜨거운 해처럼 우리들의 속살을 태우고
마음의 배고픔이 출렁이는 강기슭에 앉아
종이배를 띄우며 우리들은 절망의 노래를 불렀다
정이 들어 이제는 한 발짝도 떠날 수 없는 이 땅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짓밟고 간
많고 많은 이방의 발짝 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이웃에게 눈인사를 하지 않았고
누구도 이웃을 위하여 마음을 불태우지 않았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서 두려움에 떠는
눈짓으로 술집을 떠나는 사내들과
두부 몇 모를 사고 몇 번씩 뒤돌아보며
골목을 들어서는 계집들의 모습이
이제는 우리들의 낯선 슬픔이 되지 않았다
사랑은 가고 누구도 거슬러 오르지 않는
절망의 강기슭에 배를 띄우며
우리들은 이 땅의 어둠 위에 닻을 내린
많고 많은 풀포기와 별빛이고자 했다
- ‘절망을 위하여’, 곽재구
그 고독한 탄일에
양떼들은 당신의 옛 주인이
이 땅 위에 태어났음을 잊고 있었다
그 고독한 탄일에 흰 눈은 내리고
눈사람을 만들며 아이들은
세상의 큰 함지박에 쌓이는 새하얀 쌀과
식구들의 바가지에 채워진 보리쌀을 생각했다
그 고독한 탄일에 사람들은
두 마리의 생선과 다섯 개의 보리떡을 꿈꾸었고
배고픈 양들을 위해 하루 한끼를
굶어본 일이 없는 예배소의 주인이
배고픈 양들은 내게로 오라 얘기했으며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탄일 트리에 달린
조그만 꼬마전구들이 셀 수 없이 깜박거렸다
유향과 황금과 몰약을 들고
박사들은 동방에서 찾아오지 않았고
예배소의 양떼들은 예배 후에 황금과 지갑을 바쳤다
아무도 양떼들이 바친 황금의 누런 때를 탓하지 않았고
지갑을 바치고 돌아오는 양떼들의
귀갓길에 내민 거지의 큰 손에는
온 밤내 하염없이 송이눈만 쌓였다
그 고독한 탄일에
배부른 예배소의 주인은
세 번이 아닌 서른 번도 넘게
제 옛 주인을 모른다 말하였음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 고독한 탄일에
양떼들은 내내 춥고 쓸쓸하였으며
헐벗은 나무와도 같이 눈발 속에 파묻혀갔다.
- ‘탄일’, 곽재구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어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장이 목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토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로
우리 눈 뜨고 보는 하늘에 피어날 수 있을까.
-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곽재구
생일 아침상에 소고깃국이 오른다
물커진 누군가의 살점 새로
남해 어느 갯벌을 떠나온 굴 몇 점
수평 위에 둥 떠 있고
미역가닥 새 드리워진
삶의 비린내도 둥둥 떠 있다
한술, 가슴 적시는
단죄의 오늘의 서정을 위해
조금씩 어깨를 수그리며 복통을 앓는다
저만치 물기 잃은 우리들의 생일상에
쭈크러진 고사리와 콩나물이 얼룩지고
드리워진 미역가닥 윽박지르며
고깃점들이 국물 위에 떠오른다
생일 아침
우직하게 끌려간 자의 울음 하나
살아 있는 자의 부끄러운
꽃잎 하나를 데불고
심연 깊숙이 떠돌고 있다.
- ‘소고깃국’, 곽재구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팔을 놓지 않으리
너를 향하는 뜨거운 마음이
두터운 네 등 위에 내려앉는
겨울날의 송이눈처럼 너를 포근하게
감싸 껴안을 수 있다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네 곁에 누울 수 없는 내 마음조차 더욱
편안하여 어머니의 무릎잠처럼
고요하게 나를 누일 수 있다면
그러나 결코 잠들지 않으리
두 눈을 뜨고 어둠 속을 질러오는
한세상의 슬픔을 보리
네게로 가는 마음의 길이 굽어져
오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는 불빛 잃은 발걸음들이
어두워진 들판을 이리의 목소리로 울부짖을지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으리
- ‘희망을 위하여’, 곽재구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들이 모래 씻긴 벼포기를 세우며
희망을 잃은 우리들의 마음 몇 가닥도
함께 일으켜세울 때
우리들의 빈집에 남아
뜰을 적셔주던 것은
그날 마당귀에 서울서 온
편지 한 통 구겨져 떨어지고
그날 학교에 간 아이들은
점심시간에 마른 콩과 옥수수를 먹고
그날 아버지는 비료를 타러
농협창고 앞 깨꽃과 함께 줄을 서고
그리고 그리고 우물가
녹슨 펌프 손잡이에 내려앉는
고추잠자리 한 마리
둘러보면 아무 흔적도 우리들의
빈집에 남은 것은 없는데
영등포 소인이 찍힌 편지 한 통만
두엄단지 박꽃 속에 묻혔는데
영국산 고속버스 휭 지나치는
산마루를 돌아보면
가슴은 왜 이리 흔들려
수숫모감 우는 소리로 뛸까
세워놓은 벼들이 모조리 쓰러져서
함께 세운 희망마저 모조리 쓰러져서
이제는 다시 쓰러질 엄두조차 못 낼
키 작은 벼들만 자라는 가을 한낮.
- ‘다시 가을에’,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沙平驛에서’, 곽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