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죽음은 카뮈가 죽고 나서 11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나온 소설이다. 원래 이방인을 쓰기 전인 1936년에서 38년 사이에 써놓고 서랍에 묻어뒀던 원고인데, 실제로 이 안에서 이방인의 원형을 그대로 볼 수 있어서 카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안 읽을 수 없는 책이었다. 주인공 이름부터가 파트리스 메르소인데, 바다를 뜻하는 메르와 태양을 뜻하는 솔레이를 합성해서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이름이 훗날 이방인의 뫼르소로 이어진다는 걸 알고 나니,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치 카뮈라는 작가가 태어나기 직전의 어떤 원석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소설은 정말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메르소는 화창하지만 서늘한 4월의 어느 오전, 자그뢰스라는 남자의 별장을 찾아가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그를 총으로 쏴 죽인다. 그리고 자그뢰스가 미리 써둔 유서 형식의 편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기 지문이 묻은 총을 닦아 시신의 손에 쥐여준 뒤 돈다발을 가방에 쑤셔 넣고 유유히 그 집을 빠져나온다.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자그뢰스는 사실 메르소가 알고 지내던 여자 마르트의 첫사랑이었고, 메르소는 그를 통해 소개받은 사이였다. 이 살인 장면을 읽으면서 이방인의 그 유명한 총격 장면이 자연스럽게 겹쳐 보였다. 근데 이방인의 살인이 태양 아래서 벌어진 우발적이고 거의 무의미한 사건이었다면, 여기 메르소의 살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계획된 것이었다. 그 차이가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뫼르소가 부조리 앞에서 그냥 떠밀리듯 살인자가 된 인물이라면, 메르소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스스로 살인을 선택한 인물이었다.
소설은 크게 자연적인 죽음과 의식적인 죽음, 두 부로 나뉘어 있다. 살인을 저지른 뒤에야 메르소의 삶에 대한 의식이 서서히 깨어난다는 구조가 이 소설의 핵심이었다. 그는 그 돈으로 자유를 사고, 세상 앞의 집이라는 곳에서 지내면서 비로소 삶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문장이 있는데, 메르소가 눈물과 태양의 얼굴을 한 삶, 소금과 뜨거운 돌 속에 담긴 그 삶을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은 힘이 솟구쳐 오르는 걸 느끼는 대목이었다. 사랑과 절망이 서로 뒤섞여서 하나가 되는 것 같았다는 그 묘사가, 나중에 결혼·여름에서 만나게 될 카뮈 특유의 태양과 바다에 대한 예찬이 이미 여기서 싹트고 있었다는 걸 보여줬다.
이 소설이 던졌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행복이라는 게 정말 살인이라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거였다. 카뮈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메르소는 행복을 찾아 떠나지만 결국 죽음이라는 운명과 마주하게 되고, 그 죽음 앞에서도 그는 후회보다는 어떤 충만함을 느낀다. 처음 이 결말을 읽었을 때는 좀 불편했다. 살인으로 얻은 자유와 행복을 그렇게 긍정해도 되는 걸까 싶어서. 시지프 신화가 부조리에 대한 답으로 반항과 자유와 열정을 논리적으로 제시했다면, 행복한 죽음은 그 답에 도달하기 전 카뮈가 훨씬 더 날것으로 던져본 실험 같았다. 만약 행복이 자유를 필요로 하고, 그 자유가 결국 시간과 돈이라는 물리적 조건에 묶여 있다면, 그 조건을 강제로 빼앗아서라도 자유를 손에 넣는 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메르소는 그 질문에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대답한 인물이었다. 물론 카뮈는 이후 반항하는 인간에서 어떤 대의로도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분명히 선을 긋는다. 그러니 이 초기작의 메르소는 카뮈가 옹호한 인물이라기보다, 그가 나중에 도달하게 될 윤리 이전에 스스로에게 던져본 가장 위험한 가설에 더 가까웠던 셈이다.
그런데 그 가설의 핵심, 그러니까 행복해지려면 결국 시간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그 전제만큼은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메르소가 자유를 얻기 위해 택한 방법은 끔찍했지만, 그가 자유를 갈망했던 이유 자체는 아주 소박했다. 그냥 시간에 쫓기지 않고 삶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던 것뿐이다. 나도 평소에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흘려보내다가, 어쩌다 하루 여유가 생기면 그제야 계절이 바뀐 걸 알아차리거나 오랜만에 하늘을 제대로 올려다보는 경험을 한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행복이라는 게 별게 아니라 결국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를 수 있는 여유, 그 시간 자체가 행복의 재료였구나 싶을 때가 있다. 메르소는 그 시간을 얻기 위해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지만, 그가 그토록 원했던 게 결국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무심하게 흘려보내지 않는 하루였다는 게 오히려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부조리라는 게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어긋남에서 온다면, 메르소는 그 침묵에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균열을 낸 셈이다. 자기 손으로 타인의 생을 끊어버리는 순간,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의 생이 처음으로 선명해진다. 나는 물론 그렇게 극단적인 방식을 택할 생각도, 그럴 이유도 없지만, 이 지점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됐다. 나는 지금 얼마나 자각하며 살고 있는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시지프가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며 느끼는 벅참도, 결혼과 여름 속 카뮈가 태양과 바다 앞에서 느낀 충만함도, 결국 다 이 초기작에서 메르소가 폭력적으로 얻어낸 그 자각의 감각을 훨씬 윤리적이고 정제된 방식으로 다시 찾아낸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나도 굳이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고도, 지금 내가 가진 시간 안에서 조금 더 자주 멈춰 서서 그 순간을 자각하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보면 행복한 죽음은 카뮈가 평생 붙잡았던 질문인, 어떻게 살아야 부조리 앞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가 의 가장 위태로운 첫 번째 답안지였던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