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들이 조심조심 외나무다리를 건너 귀가하고 있습니다
곧, 저녁입니다
- ‘곧’, 이시영
나무들이 잎새들을 남김없이 벗고
다가올 겨울 하늘과 늠름히 맞서다
- ‘나목’, 이시영
시집가 늙은 딸이 더 늙은 어머니를 찾아와 하룻밤 묵는 사이
달빛이 가만가만 내려와 저들 곁에 잠들곤 했습니다
- ‘이런 밤’, 이시영
소나무 한그루가 전신을 다해 어제의 빗방울들을 안고 있다
곧 바람이 불어와 저들의 수고를 덜어줄 것이다
그리고 지상은 잠시 영롱한 눈빛으로 반짝일 것이다
- ‘잠시’, 이시영
이렇게 비 내리는 밤이면 호롱불 켜진 호야네 말집이 생각난다. 다가가 반지르르한 등을 쓰다듬으면 그 선량한 눈을 내리깔고 이따금씩 고개를 주억거리던 검은 말과 "얘들아, 우리 호야네 말 좀 그만 만져라!" 하며 흙벽으로 난 방문을 열고 막써래기 담뱃대를 댓돌 위에 탁탁 털던 턱수염이 좋던 호야네 아버지도 생각난다. 날이 밝으면 호야네 말은 그 아버지와 함께 장작짐을 가득 싣고 시내로 가야 한다. 아스팔트 위에 바지런한 발굽 소리를 따각따각 찍으며.
- ‘호야네 말’, 이시영
우면산에서부터 따라온 나비 한마리가
창턱에 날개를 접고 앉아
그 까만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맑은 눈동자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나비를 보다’, 이시영
이 세상이 그렇게 빨리 망하진 않을 것 같다
언 땅속에서 개나리 한 뿌리가 저렇게 찬란한 봄을 머금고 있었다니
- ‘조춘(早春)’, 이시영
어제 내린 눈 위에 오늘 내린 눈이 가만히 닿았습니다. "춥지 않니?" "아니." "어떻게 왔어?" "그냥 바람에 떠돌다가 날려서." "그래,그럼 내 위에 누워보렴." 둘은 서로의 시린 가슴을 안고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 ‘대지의 잠’, 이시영
빨랫줄엔 빨래가 없고 빨래집게 두개가
외로운 참새처럼 허공을 한뼘씩 물고 잠들어 있다
- ‘방배동 두레마을’, 이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