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4권. 19세기 천재 작가 메리 셸리가 열아홉의 나이에 놀라운 상상력으로 탄생시킨 과학소설의 고전.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물리학자 프랑켄슈타인이 시체로 만든 괴물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인간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괴물은 추악한 자신을 만든 창조주에 대한 증오심에서 복수를 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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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내용 요약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의 오만과 인간의 고독을 탐구하는 고전 소설로, 19세기 초 낭만주의와 공포 문학의 걸작이다. 📖 이야기는 북극해를 항해 중인 탐험가 로버트 월튼의 편지로 시작된다. 그는 얼음 속에서 지쳐 쓰러진 남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구출하고, 그의 기묘한 이야기를 듣는다. 빅터는 스위스 제네바 출신의 젊은 과학자로, 생명의 비밀을 풀고자 집착적으로 연구에 몰두한다. 그는 해부학, 화학, 전기를 결합해 죽은 시체 조각으로 거대한 생명체를 만들어낸다. ⚡ 그러나 창조물이 눈을
자기가 심혈을 기울여 창조하고나서는 피조물이 생명을 얻어 움직이기 시작하자 생김새가 끔찍하다며 도망가버린 프랑켄슈타인을 보면서, 책임져야 할 누군가를 방임하고 유기하는 나쁜 어른들이 떠올랐다.
특히나 그 중에서도 어떤 부모들이 떠오른다. 마땅히 받아야 할 따뜻한 보살핌과 교육없이 긴 시간을 보낸 그 피조물은 괴물이 된다. 선하고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누군가가 어른의 무책임함으로 버려졌다는 이야기. 우리 주변의 많은 괴물들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렇다고 해서 프랑켄슈타인의 주변인물을 몽땅 살해하는 이 괴물의 행동은 이해받을 수 있는가?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들고 그에게서 도망다니면서 과학의 힘은 함부로 탐구할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한다.
프랑켄슈타인의 주변 사람들을 연쇄적으로 살해하는 이 괴물 역시 매우 괴롭다. 죄책감으로 인한 괴로움을 느끼면서도프랑켄슈타인에게 한 협박의 약속을 지키려고 계속해서 살인해 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제부탄가 이 악을 자신의 것으로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2025년 발표한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소설에 비해 모성을 매우 부각시킨다. 소설과 달리 괴물의 옆에 엘리자베스라는 여인이 정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엘리자베스와 살던 때의 이 피조물은 선하다. 반면 이 가련한 피조물의 창조자는 피조물에게 자기 이름만 알려주고 피조물을 죄수 다루듯 수갑을 채우고 폭압적으로 대한다.
생각할 점들이 매우 많은 소설이다
직접 서술되는 심리묘사도 탁월하다.
“나는 당신의 아담이 되었어야 했는데, 오히려 타락한 천사가 되어버렸습니다.”
괴물이 빅터에게 이 말을 건네는 대목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는 자신을 처음부터 악마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은 원래 아담이어야 했다고, 창조자의 손에서 막 태어나 아무것도 미워할 줄 몰랐던 최초의 인간이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담에게는 자신을 바라봐주는 신이 있었고, 그에게는 눈을 뜨는 순간 등을 돌린 창조자만 있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자신의 악을 변명하는 말이라기보다, 자신이 어떻게 악에 도달했는지를 되묻는 문장처럼 읽혔다. <프랑켄슈타인>이 끝내 묻는 것도 괴물은 왜 악한가가 아니라, 한 존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에 더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빅터의 가장 큰 죄는 생명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생명이 눈을 뜬 이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지성과 열정을 쏟지만, 정작 자신이 만든 존재가 첫 숨을 내쉬자 공포에 질려 달아난다. 그 장면을 읽으며 나는 창조에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책임이 따라붙는다는 생각을 했다. 무언가를 세상에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시작의 원인이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이 자신의 손을 떠난 뒤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지까지 어느 정도 감당하겠다는 약속에 가깝다. 그러나 빅터는 창조의 황홀만 원했을 뿐, 그 뒤에 따라오는 시간은 원하지 않았다. 씨앗을 땅에 묻고 싹이 트는 순간 땅을 버린 셈이다. 그리고 그 버려진 자리에서 자란 것이 결국 괴물의 분노였다.
그래서 숲속 오두막에서 인간 가족을 몰래 바라보며 말과 감정을 배우는 괴물의 모습은 더욱 처연하다. 그는 처음부터 증오를 배운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추위에 떨면 장작을 가져다놓고, 가족이 서로를 위로하면 그 모습을 보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익힌다. 그는 인간에게서 인간다움을 배웠고, 자신도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가 오랜 시간 익혀온 언어와 선의와 다정함은 얼굴 하나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의 내면에 쌓인 모든 것은 외모라는 한 장의 문 앞에서 멈춰 선다.
나는 이 장면에서 괴물이 태어나는 두 번째 순간을 본 것 같았다. 첫 번째 탄생이 빅터의 실험실에서 육체를 얻은 순간이었다면, 두 번째 탄생은 인간들의 눈 속에서 자신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배운 순간이었다. 사람은 혼자서만 자신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배운다. 아무리 사랑받고 싶어 하는 존재라 해도 세상이 계속해서 너는 사랑받을 수 없는 모습이라고 대답한다면, 어느 순간 그는 그 대답을 자기 안으로 들여놓을지도 모른다. 괴물의 흉측한 얼굴보다 더 끔찍한 것은 어쩌면 그 얼굴을 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되돌려준 공포였을 것이다. 거울은 얼굴을 비출 뿐이지만, 타인의 시선은 때때로 한 존재의 운명까지 비춘다.
그렇다고 그의 살인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소설은 악을 이해하는 일과 악을 용서하는 일이 서로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괴물의 폭력은 분명 그의 것이지만, 그 폭력이 자라날 수 있었던 토양까지 온전히 그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버려짐과 모욕, 외로움과 거절이 켜켜이 쌓이면서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은 조금씩 사랑할 수 없다면 두려움이라도 주겠다는 욕망으로 뒤집힌다. 처음에는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기를 바라던 존재가, 끝내 그 손으로 누군가의 목을 조르게 되는 것이다. 그 변화를 지켜보고 있으면 악이란 처음부터 심장 속에 박혀 있는 검은 돌이라기보다, 오래 방치된 상처 위에 서서히 자라나는 딱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빅터와 괴물이 서로를 쫓아 얼어붙은 극지까지 가는 후반부는 두 사람이 점점 서로를 닮아가는 과정처럼 보였다. 창조자는 자신이 만든 생명을 없애기 위해 삶 전체를 걸고, 피조물은 자신을 버린 창조자를 파괴하는 데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건다. 한 사람은 괴물을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괴물이 되었지만, 마지막에는 누가 누구의 삶을 만들어낸 것인지조차 흐릿해진다. 그들은 서로를 가장 증오하면서도 서로 없이는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마치 서로 등을 돌린 채 같은 사슬의 양 끝을 잡고 있는 것처럼, 멀어지기 위해 달릴수록 오히려 더 단단하게 묶인다.
이 관계를 보고 있으면 나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말까지 떠올리게 된다. 물론 빅터와 괴물의 관계를 단순히 부모와 자식으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처음 요구한 것이 거창한 구원이나 권력이 아니라 자신을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는 점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자신도 이 세계에 있어도 되는 존재라고 단 한 번만 말해달라는 요구. 그러나 빅터는 끝내 그 말을 해주지 못한다.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처럼, 괴물을 가장 깊게 망가뜨린 것은 빅터의 증오보다도 처음부터 그를 자신의 책임 밖으로 밀어내려 했던 태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빅터가 죽은 뒤, 괴물이 그의 시신 앞에서 울며 자신 역시 사라지겠다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 비극은 이상할 만큼 조용해진다. 복수는 끝났지만 아무것도 회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복수의 대상이 사라지고 나서야 괴물은 자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존재가 자기 삶을 붙들고 있던 마지막 끈이었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미움조차 관계의 한 형태였다. 빅터는 괴물을 통해 자신의 죄를 보았고, 괴물은 빅터를 통해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확인했다. 서로를 없애려 했던 두 존재가 실은 서로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소설에서 가장 잔인한 역설처럼 느껴졌다.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 남은 것은 결국 책임이라는 단어였다.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순간에는 쉽게 사랑을 말한다. 아이를 낳고, 작품을 만들고, 관계를 시작하고, 어떤 생각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러나 창조보다 훨씬 긴 것은 그 이후의 시간이다. 시작은 한순간이지만 책임은 그 시작이 만들어낸 시간이 끝날 때까지 따라온다. 어쩌면 빅터가 감당하지 못한 것도 바로 그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문득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생각한다. 오늘날 그 이름은 흔히 괴물을 가리키는 말처럼 쓰이지만, 정작 소설 속에서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그를 만들어낸 사람의 이름이다. 나는 이 오래된 착각이 이상할 만큼 이 작품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눈앞에 나타난 흉측한 결과에는 쉽게 이름을 붙이면서, 그 결과를 낳은 원인은 자주 잊는다. 괴물이 나타나면 괴물을 손가락질하지만, 그를 만들고 버린 손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좀처럼 묻지 않는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을 다 읽고 나면 괴물의 얼굴보다 빅터의 등을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 자신이 만들어낸 생명이 처음 눈을 뜨던 순간, 그 생명을 향하지 않고 반대편으로 달아나던 한 인간의 등을. 어쩌면 괴물은 그 순간 이미 완성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실험대 위에서가 아니라, 창조자가 뒤돌아선 바로 그 자리에서.
큐레이터 김중혁님 말처럼
내가 봤었던 프랑켄슈타인이 이런 내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다시 읽어 보니 이 책 진짜 좋다.
‘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오. 나도 당신들과 같은 보통의 인간이고 싶소’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 낸 괴물이라는 존재가
독학으로 완성한 수 많은 언어로 저런 말을 하는데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과 끝내 사랑받지 못한다는 현실의 간극이,
그의 울부짖음이 마음에 깊이 닿았다. 이렇게 마음을 울리다니ㅠ
예전에는 괴물에 대한 두려움만 남았다면
이제는 연민만 남게 된 프랑켄슈타인이었다.
제1권 •2장
그리고 신성모독일지 모르지만, 입가에 서린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날이 온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우리에겐
전히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남은 사람들과 함께 일상을 살아 면서, 약탈자의 손길에 잡히지 않은 사람이 남아 있으니 그나마 우리는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법을 터득했다
억해달라. 내가 기록하는 건 광인의 망상이 아니다. 저 하늘에 태 양이 빛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확실히 단언하는 사건 역시 실제로 일어났다. 무슨 기적이었는지 모르지만 발견의 단계는 명확하고 개연성이 있었다
제 3권 •1장
시련이란 사람들의 조잡하기 짝이 없는 감수성마저 그토록 무기게 만드는 법이다.
그때 느닷없이 남쪽으로 고원이 일자로 펼쳐져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극도의 피로와 몇 시간 동안 견뎌야 했던 극심한 긴장감에 초주검 이 된 내게 갑자기 찾아온 삶에 대한 확신 덕분에 심장 가득 뜨거운 환희가 넘쳤고, 눈에서는 눈물이 솟구쳤다.
제3권 •3장
우리 감정이란 얼마나 변덕스러우며, 이 참담한 불행의 극한에서도 끝내 놓지 못하는 목숨에 대한 애착이란 얼마나 기이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