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감각적인 이미지와 다채로운 비유가 돋보이는 독창적인 시 세계를 펼쳐온 김중일 시인의 네번째 시집. <내가 살아갈 사람>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부조리한 세계의 사각지대와 비극적인 삶의 풍경들을 섬세하면서도 진지한 언어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우리의 얼굴을 이야기하려면
등을 이야기 안할 수 없겠습니다.
뒤돌아서서 멀어져가는 상대의 등을
응시할 때,
우리의 얼굴은 비로소 완전히
정직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얼굴이 이 계절 한장의 잎이라면
그 뿌리는 두 다리도 배꼽도 가슴도 아니라
등에 묻혀 있습니다.
등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언제나 나는
돌아가는 내 등을 바라보는 너의 솔직한 얼굴이
궁금했습니다. 너의 첫 눈빛은
내 등 위로 홀씨처럼 날아와
내 등 속에 뿌리내리고
내 목을 곧게 뻗어올려
내 얼굴을 피우고 표정을 뿜어냈습니다.
내 얼굴 위에 벌과 나비와
마땅한 이름 없는 날벌레처럼
눈 코 입 귀가 날아와 앉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사람의 시간으로는 평생을
앉았다가 날아갑니다.
눈 코 입 귀가 날아가는 곳은
길섶 철쭉 같은 불길 속입니다.
내 얕은 얼굴로는 다 못 받은 너의 슬픔이
번번이 넘칠 때마다
우리는 등을 맞대고 울었습니다.
울컥 흘러넘친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대신 등을 얼굴처럼 맞대고 비비며 울었습니다.
사월이 지나면
너의 눈빛이 피운 내 얼굴도 어둡게 저물 것입니다.
- ‘우리의 얼굴’, 김중일
꼭 한번만 당신의 얼굴 만져볼 수 있다면
얼굴 위에 쌓인 먼지에 내 손자국을 낼 수 있다면
오늘은 미세먼지주의보, 창틀에 먼지가
수평선 위에 내려앉은 새떼처럼 새까맣게 앉아 있는 날.
꼭 한번만 스치듯 당신의 손을 잡아볼 수 있다면
그 흰 손은 내가 가져갈 텐데.
잡은 손 놓지 않고 가져가 마스크로 쓰고 다닐 텐데.
끔찍한 일을 보았을 때
끔찍이 보고 싶었던 이를 드디어 만났을 때
우리는 마스크 쓰듯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벌어진 입이 보이지 않게
놀란 입술을 가릴 수 있게
순간 비어져나온 내 생의 한쪽 손을 감출 수 있게
뒤통수라는 검은 마스크도 잊지 않고 써서
내 안의 기억이 쏟아져나오지 않게
내 안의 기적이 쏟아져나오지 않게
한번은 마스크를 쓴 사람이 나를 알은체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아보았어야 했다.
흰 먼지처럼 진눈깨비가 날린다.
그러나 무엇보다 미세하고 흰 먼지는 햇빛이다.
미세한 햇빛이 폐부에 가득 차 숨이 턱 막힌다.
이런 날씨엔 마스크를 쓰는 것이 불가피하다.
내 얼굴에 쌓이는 먼지는
누구도 털어주지 못한다.
밤의 얼굴에 묻은 저 하얀 달처럼 영원히 묻어 있다.
- ‘마스크’, 김중일
네가 떠다 준 물이
내 입술을 적시고 온몸 구석구석에 스미는 건
키스를 하는 것.
너와 내가 공원에서 서로 입김을 불어넣으며
언 손을 비비는 건, 뜨거운 혀처럼 빨간
손과 손을 맞대고 엎치락뒤치락 서로 쓰다듬는 건
키스를 하는 것.
그러다가 서로를 아무 말 없이 끌어안는 건
너와 나의 몸이 윗입술 아랫입술처럼
하나의 커다란 입술이 되는 것.
침묵의 입술이 되어 달리는 시간을 잠시 돌려세워놓고
키스를 하는 것.
마음에 없는 말을 내뱉었던 내가
없는 너와 빈 길을 걷는 건
키스를 하는 것.
- ‘키스를 하는 것’, 김중일
네가 태어나기 전 옛날 옛적엔 시라는 것이 있었어.놀랍게도 시들을 한권에 모아놓은 시집이라는 것이 있었어. 시집을 읽다가 보면 반드시 불타는 페이지 한장을 만나지. 딱 한 장을 만나지. 언제 만날지는 아무도 몰라. 몇 페이지가 불타고 있을지도 몰라. 같은 시집을 들었지만 각자가 다 다르지. 나중에 저마다 불타는 페이지가 무엇이었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맞추어보지. 포옹과 입맞춤과 달콤한 말과 알쏭달쏭한 말들로 퍼즐처럼 맞대어보지. 불타는 페이지는 펼쳐지자마자 빛의 속도로 새카맣게 타버려, 한자도 읽을 수 없어. 내겐 진짜 시가 쓰여진 페이지. 내가 죽어도 읽지 못한 페이지를 지금 이 순간 하품을 틀어막으며 읽는 사람. 내가 무념무상 넘긴 페이지를 눈에 불을 켜도 읽지 못한 사람. 우리가 못 읽은 페이지가 같았다면 우린 멸종했겠지. 못 읽은 페이지가 달라서 늘 저마다 자기가 가장 고독하고 외롭지. 각자 슬픔이 깊어 불안하고 오해하고 질투하지. 내가 못 읽은 페이지를 읽은 너에게, 나도 모르는 내 비밀을 들킨 것처럼 부끄럽고 두렵지. 그렇다고 돌아서지도 못하고 참지도 못하고 우리는 자신이 읽은 모든 페이지를 그냥 다 찢어버리듯, 아무 것도 모르는 체 사랑에 빠져버리지. 그렇게 네가 간절히 찿던 불타는 페이지는 내가 찢고, 너는 나를 찢지.
- ‘옛날에는 시라는 것이’, 김중일
실명(失命)하고 서로 오래도록 등지고 살다가
정말 슬펐을 때 우리는 등을 맞대고 울었다.
등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타전했다.
등이 슬픔의 표지라도 되는 것처럼.
교실을 나가다 뒤돌아보니
흑판처럼 어두운 등에 낙서가 되어 있다.
우리 아이들을 이루던 것들을
네 속에 차곡차곡 넣고 닫은 뚜껑 같은 등.
등을 여는 것은 무심한 낙서 속에 담긴
비밀을 캐는 것.
등은 떠밀기가 좋다.
가슴을 떠미는 것과 달리 등을 떠미는 건
내 곁이 아닌 더 좋은 곳으로 가라는 것.
밀면서 끌어안는 것이 등을 떠미는 일.
등을 자꾸 떠밀다 보면 시간이 서꾸로 간다.
등을 밀면 너의 가슴이 봉긋하게 밀려나오고
아이 밴 둥근 배가 밀려나오고
온몸에 주름들이 파도처럼 밀려나오고
불시에 등을 끌어안는 습관은 버려야 한다.
등은 밖으로 드러난 마음이기 때문이다.
어느 결에 드러난 마음은 끌어안기보다는
지켜봐야 하는 것.
겨울나무 가지처럼 가는 뼈들이
종잇장같이 얇은 알을 뚫고 막 튀어나오려는
새의 날갯죽지 같았던, 너의 등은
날아가도록 떠밀어야 하는 것.
- ‘등을 떠미는 일’, 김중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