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권의 시집과 단 한 권의 산문집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시인 박준의 두번째 시집. 2012년 첫 시집 이후 6년 만의 신작이다. 지난 6년을 흘러 이곳에 닿은 박준의 시들을 독자들보다 '조금 먼저' 읽은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작정作情'어린 발문이 더해져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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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시집) 내용 요약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는 박준 시인이 2018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두 번째 시집으로,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번째 작품이다(ISBN: 9788932034942).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박준은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와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2016)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시집은 2012년 첫 시집 이후 6년 만의 신작으로, 60여 편의 시를 통
당신은 어렸고 나는 서러워 우리가 자주 격랑을 보던 때의 일입니다
자주 그리고 지속적으로 말하지만 우수한 책은 독자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알듯말듯한 그거있잖아그거!를 해결해주는 문장을 만나면 꼭 그렇게 안달이난다.
가끔 시집을 중간부터 펼쳐 읽는다. 중간이 시작이되고 시작은 중간이되어 중간이 다시 끝이 되게끔 읽는다. 장마라는 단어에 너무 치우쳐져있었던지 나는 이 시집을 여름에 읽어야 걸맞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다는 말은 여름이 아닌 광부들이 굴을 팔 때 죽는 이유가 아사나 질식사가 아닌 수맥이라면서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다는 말로 이어지며 나를 또 어디론가 이끈다.
우리는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을거야. 나는 너란 사람을 파고 파고 파다가 결국 터져서 우리는 같이 장마를 볼 수 있을거야
나는 뭐든 자꾸 사랑으로 그것도 이성적인 사랑으로 해석하는 것 같아 좀 불편하긴 하다. 좀 더 다른부분으로 느끼면 좋을텐데.
그대로 두어야 할 것은 분명하지만 새로 들여야 할 것을 잘 알지 못하는 탓에 반쯤 낡았고 반쯤 비어 있는 채로 새해를 맞습니다.
달라질 것은 이제 많지 않습니다.
시집은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감정들을 대신 표현해준다는 고마운 마음으로 읽고 있다.
지금은 와인을 한병 길게 마시는 중. 집을 가다가 서점에 들려 이런 고마운 시집을 몇 개 집어야겠다.
춥고 배고픈 이에게 따듯한 밥 한 끼 지어먹이는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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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잠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디르던 밭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는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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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과 밤의 끝에서는
까닭 없이 손끝이
상하는 날이 이어졌다
책장을 넘기다
손을 베인 미인은
아픈데 가렵다고 말했고
나는 가렵고 아프겠다고 말했다
여름빛에 소홀했으므로
우리들의 얼굴이 검어지고 있었다
어렵게 새벽이 오면
내어주지 않던 서로의 곁을 비집고 들어가
쪽잠에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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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곡 빌라
몇 해 전 엄마를 잃은 일층 문방구집 사내아이들이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잠을 잔다 벌써 굵어진 종아리를 서로 포개놓고 깊은 잠을 잔다 한낮이면 뜨거운 빛이 내리다가도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들면 덜컥 겁부터 먼저 나는, 떠나는 일보다 머무는 일이 어렵던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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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말
그렇게 들면 허리 다 나가 짐은 하체로 드는 거야 등갓 잘보고 모서리 먼저 바닥에 놓아 아니 왼쪽으로 조금 더 왼쪽으로
가는 말들 지나
외롭지? 그런데 그건 외롭운 게 아니야 가만 보면 너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도 외로운 거야 혼자가 둘이지 그러면 외로운게 아니다,
하는 말들 지나
왜 자면서 주먹을 쥐고 자 피 안 통해 손 펴고 자 신기하네 자면서도 다 알아,
듣는 말 지나
큰비 지나, 물길과 흙길 지나, 자라난 풀과 떨어진 돌 우산과 오토바이 지나, 오늘은 노인 셋에 아이 둘 어젯밤에는 웬 젊은 사람 하나 지나, 여름보다 이르게 가는 것들 지나, 저녁보다 늦게 오는 마음 지나, 노래 몇 자락 지나, 과원 지나, 넘어짐과 일어섬 그마저도 지나서 한 이틀 후에 오는 반가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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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민박
민박에서는 며칠째
탕과 조림과 찜으로
민물고기를 내어놓았습니다
주인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제 점심부터는 밥상을 물렸고요
밥을 먹는 대신
호숫가로 나갔습니다
물에서든 뭍에서든
마음을 웅크리고 있어야 좋습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면
동네의 개들이 어제처럼 긴 울음을 내고
안개 걷힌 하늘에
별들이 비늘 같은 빛을 남기고
역으로 가는 첫차를 잡아타면
돼지볶음 같은 것을
맵게 내오는 식당도 있을 것입니다
이승이라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이곳은
공간보다는 시간 같은 것이었고
무엇을 기다리는 일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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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암동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느 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
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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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일기
비가 더 쏟기 전에 약국에 다녀왔습니다 큰길에는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제 시내는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처연凄然이 가까워졌다면 기억은 멀어졌다”라는 메모를 해두었습니다 비를 맞듯, 달갑거나 반가울 것 하나 없이 새달을 맞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