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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보통인 책
출간일
2018.10.15
페이지
264쪽
상세 정보
우리는 타인의 아픔에 얼마나 민감한가? 아픔이란 단어는 질병, 질환, 혹은 고통이란 명칭과 사뭇 다르다. 그건 “아프지 말고! 알았지?”라는 흔한 당부 속 ‘아픔’이다. 누군가에게 아프지 않기를 바랐던 바로 그 소중한 이들의 아픔이다. 그 속에는 화자의 애정 어린 감정이 오롯이 충전되어 있다.
한편, 이 아픔은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을 법한 ‘말 못할 아픔’이다. 타인에게 이해를 구하기 어려운, 구할 수 없는, 혹은 구해서는 안 되는 그런 감춰둔 아픔이다. ‘아픔’을 보여주는 이 책을 통해, 너무 친숙해 아픔인지 모르고 있던 것들과 너무 낯설어 아픔인지 모르고 있던 것들을 마주하고, 그리하여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순간 나를 짓누르던 아픔 또한 ‘공감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세정보
우리는 타인의 아픔에 얼마나 민감한가? 아픔이란 단어는 질병, 질환, 혹은 고통이란 명칭과 사뭇 다르다. 그건 “아프지 말고! 알았지?”라는 흔한 당부 속 ‘아픔’이다. 누군가에게 아프지 않기를 바랐던 바로 그 소중한 이들의 아픔이다. 그 속에는 화자의 애정 어린 감정이 오롯이 충전되어 있다.
한편, 이 아픔은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을 법한 ‘말 못할 아픔’이다. 타인에게 이해를 구하기 어려운, 구할 수 없는, 혹은 구해서는 안 되는 그런 감춰둔 아픔이다. ‘아픔’을 보여주는 이 책을 통해, 너무 친숙해 아픔인지 모르고 있던 것들과 너무 낯설어 아픔인지 모르고 있던 것들을 마주하고, 그리하여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순간 나를 짓누르던 아픔 또한 ‘공감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책 소개
우리 모두 힘없는 존재임을 공감하는 순간,
똑같이 아픈 존재임을 느끼는 순간,
너와 나를 나누는 경계는 해체된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 질병을 앓는 환자다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은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던 고(故) 황유미가 2007년 3월 6일 백혈병으로 사망하면서 그녀의 아버지인 황상기가 삼성반도체에 본격적으로 산업재해 소송을 하면서 결성되었다.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과 홀로 싸운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보다 딸이 23세 어린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우리는 소수의 지배자 계층을 제외하면 모두 노동자이거나 노동자의 가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산업재해의 피해자 혹은 그들의 가족이 될 가능성이 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과 산업재해 사망률 1위라는 현실 속에서 우리 모두 긴장하고, 상처받고, 때론 위로 받으며 살고 있지 않은가? 대한민국 사회와 문화가 병원체가 되어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데, 나는 아프지 않고 행복하다고 자신할 수 없지 않을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면, 그래서 나 또한 사회적 질병의 환자임을 자각한다면, 우리 역시 타인과 전인적 인격체로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반올림 농성장은 모두를 동등한 인격체로 마주할 수 있도록 서로의 어깨를 짓누르는 사회적 중력을 흡수하는 블랙홀이었다.
시선과 통증,
아픔은 개인의 문제인가
콜센터 상담사에게 ‘의무’처럼 받아들여지는 어깨 통증을 가지고 한 여성 상담사가 항상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그녀는 콜센터 안에서 팀장이나 주변 동료들에게 신임을 얻을 수 있을까? 또 다른 예로 네팔의 이주 노동자가 조선소에서 파워공으로 일하면서 어깨 통증을 한국인 관리자와 동료에게 지속적으로 호소했더라면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긍정적인 상황이 전개되었으리라고 말하기 머뭇거려진다. 그 머뭇거림만큼 한국의 도덕적 가치관은 통증을 인내하고 개인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선’으로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의료인류학자 아서 클라인먼은 통증은 내 몸에 있지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고, 그 의미란 나와 타인과 공유하는 당대의 도덕적 가치에 기반한다고 했다. 통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겪는 일상에서의 당혹감과 모욕감은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에 대한 불신 혹은 의구심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호소하는 통증 자체에 대한 불신과 의구심도 한몫한다고 보아야 한다. ‘엄살 아닐까?’, ‘무언가 얻어내려는 수작이 아닐까?’ 같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수 있다.
키보드는 차갑고
사람의 손은 따뜻하다
사회 곳곳에는 게임 중독, 소셜미디어 중독, 쇼핑 중독 등 인터넷 중독으로 아픈 사람들도 있다. 특히 게임 중독은 그 피해 사례가 넘쳐난다. 게임에 중독된 부부가 하루에 6~12시간씩 게임을 하느라 3개월 된 딸아이를 돌보지 않아 굶어 죽게 한 사건, 게임에 빠진 중학생이 꾸중하는 어머니를 살해하고 자살한 사건이 있었고, 한 30대 남성은 5일 동안 PC방에서 인터넷 게임에 빠져 있다가 돌연사 했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인터넷 중독은 이렇게 가족과 사회를 파괴한다. 인터넷 중독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이것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방식에 있다.
인터넷 중독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각종 사회적 낙인과 고립으로 인해 집단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비록 일시적이고 또 다른 고통의 원인이 될지언정 ‘치유’의 방법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즉, 인터넷에 ‘중독’되어서 사회적으로 고립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고립’이 중독을 강화시킨 것은 아닐까? 지적으로 충만한 과학의 시대, 객관의 시대지만, 사회는 가장 기초적이고 명백한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몸에는 보고 듣는 것 외에도 다른 감각들이 있다는 점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물적인 공간에서 촘촘한 ‘넷(net)’을 구축해야 이 사회에 진정한 연결망이 생기지 않을까?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도 결국 맞잡은 사람의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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