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수의 장편소설 <설계자들> 개정판이 미국 출간에 맞춰 국내에 동시 출간되었다. <설계자들>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전 세계 20여 개국에 판권이 팔렸고 특히 미국에서는 치열한 접전 끝에 1억 원이 넘는 선인세로 계약되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래생은 내내 울었다. 자신이 읽어야 할 혹은 읽을지도 모를 도서관의 이 광대한 책의 페이지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페이지들 속에서 영웅들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소녀들이, 역경과 좌절을 뚫고 삶의 목표를 이룬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의 유일하고 작은 약점을 가리지 못해 얼간이의 화살에 맞아 죽어가고 있다. 래생은 이 신뢰할 수 없는 삶이 놀라웠다. 그가 어떤 자리에 오르건, 불사의 몸을 가지건, 위대한 무엇을 움켜쥐건 그것은 한순간의 작은 실수로 사라질 수 있었다.
사창가로 돌아가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걸 여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알면서도 돌아갔다. 우리는 더럽고 역겹지만 자신이 발 디딘 땅을 결국 떠나지 못한다. 돈도 없고 먹고 살길도 없는 것이 그 원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우리가 이 역겨운 땅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그 역겨움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역겨움을 견디는 것이 저 황량한 세계에 홀로 던져지는 두려움을 견디는 것보다, 두려움의 크기만큼 넓고 깊게 번지는 외로움을 견디는 것보다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건 어린애 장난이 아니야. 당신 죽을지도 몰라." 래생이 다시 말했다.
사팔뜨기 여자 사서가 붕대를 세게 당겨서 묶었다. 상처 부위가 터질 것처럼 아파왔다. 래생이 신음 소리를 냈다.
"누구나 당신만한 사연 정도는 있어. 혼자서 비장한 척, 뭘 다 아는 척 까불지 마." 사팔뜨기 여자 사서가 헌 붕대와 가위를 챙기며 말했다.
맞는 말이다. 누구나 사연이 있다. 너구리 영감도, 추도, 털보도, 미토도, 이발사도 그리고 심지어 한자도 각자의 사연이 있다. 그 사연으로 분노를 키우고, 서로를 증오하고, 또 서로를 죽인다. 모두들 자기 사연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모두들 자신의 상처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당할까?
'쳇, 별생각을 다하네. 빌어먹을 놈인 건 너도 마찬가지면서.' 래생이 자신을 비웃었다.
소설 읽는 즐거움이란 역시,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겪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소설이란,
그 삶이 내 살에 가까이 느껴지거나,
오롯이 내 마음 같이 느껴지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볼 때 김언수 작가는,
흥미로운, 좋은 소설을 쓰는 작가이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면 어떻게 그런 삶을 알기나 했을까…
이번 책은 지난 번 읽은 <뜨거운 피>와 많은 부분 겹친다.
특히 인물의 정형성이..
(래생이 희수를 닮았다 싶었는데,
푸주에 같은 이름이 나와서 특히 애정하는 이름이려니 싶었다. 나 역시도 그 이름이 참 마음에 든다.)
한숨에 후루룩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손가락 사이로 힘이 빠진다…
내내,
너무 긴장하며 읽었나보다…
설계자들/김언수
설계자들은 흔히 우리가 소설이 아닌 스크린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암살자들 뒤에 감춰진 살인 설계자에 관한 범죄 스릴러의 소설입니다.
암살자의 피를 가진 사나이들의 숙명과도 같은 피의 삶은 냉혹하면서도 애처롭기 그지없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속의 역사를 뒤흔든 암살 사건 뒤에는 항상 설계자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일제시대 이래, ‘개들의 도서관’은 가장 강력한 암살 청부 집단이었습니다.
고아인 주인공 래생은 도서관장인 너구리 영감의 양자로, 암살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번 생은 글렀으니 다음 생에라도 잘 해보라는 의미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래생"입니다.
도서관 옆 수녀원의 쓰레기통에서 너구리 영감은 래생을 주워서 암살자로 만들고 암살자들을 조종하고 있는 설계자들을 찾아내 복수해나가는 전형적인 스토리 내용입니다.
'늙은이들은 꽤 비싼 돈을 내고 여자를 품었겠지만 그 화대의 대부분은 브로커에게 갔을 것이다. 여자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하지만 나쁜 운도 삶의 일부다'
'어서오세요 고객님. 어떻게 죽여드릴까요?'
이 작품은 김언수 작가의 또 다른 소설 '뜨거운 피'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뜨거운 피가 조직폭력의 비정한 세계를 그렸다면 설계자들은 암살자의 냉혹한 운명적 삶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주윤발과 장국영이 생각나게 하는 1980년대 홍콩 르와르와 닮아 있어 이 책을 읽는 내내 잔인함과 비정함 그러나 그 속에서 인간의 고독한 연약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조금은 저질스럽고 불쾌하고 쾌쾌한 곰팡이 냄새 가득한 음침함이 내 피부에 와닿은 듯한 느낌이었지만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함은 비열하고 삶을 거부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결국 인간의 본성은 '악은 결코 선을 이길 수 없고 죽음 앞에선 모두 약자뿐'이란 걸 말하고자 한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따뜻한 남쪽나라 통영에서...
정재계에서 벌어졌던 벌어지는 벌어질 대한민국의 뒷 면. 다만 픽션이라 하기엔 현실은 이상하리만치 돌고 돌고 있다는게 더 재미를 배가시킨다. 또 상상해봤던건 영화 ‘내부자들’ 처럼 어울리는 배우들의 책 속 인물에 자가 캐스팅을 하며 읽었다는 점.
오랜만에 몰입하며 금세 읽은 흥미진진한 책.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