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 시인선 512권. 동시대의 문학과 풍경, 사람과 사건을 견고하고 명징한 언어로 묘사해온 이영광의 다섯번째 시집. 몸의 시학에 관한 한국문학사의 가장 전위적인 실천으로 평가받았으며 미당문학상 수상작이 수록된 <나무는 간다> 이후 5년 만의 신작이다.
도서 DB 제공: 알라딘
이 책 어때요?
Q&A
게시물
—
오늘 독서, 어떻게 시작해 볼까요?
요약
끝없는 사람 내용 요약
이영광 시인의 시집 『끝없는 사람』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과 그 속에 서린 서늘한 진실을 담아낸 작품집입니다. 시인은 우리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좌절과 열등감, 그리고 삶을 지탱하는 미세한 희망의 조각들을 예리한 언어로 포착합니다. 시집의 제목인 '끝없는 사람'은 완성되지 않았기에 끊임없이 흔들리고, 아파하며, 다시 나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
작가는 인간이 겪는 상심과 고난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우리가 왜 이토록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동
인간들이 입에 칼을 물고 다니는 것 같아
말도 안 되게, 찌르고 베고 보는 거야
안 아프지도 못하면서
저 아프면 우는 것들이
예전에, 수술받고 거덜 나 무통 주살 맞고 누웠을 적인데
몸이 멍해지고 나자, 아 마음이 아픈 상태란 게 이런 거구나 싶은
순간이 오더라고, 약이 못 따라오는 곳으로 글썽이며
한참을 더 기어가야 하더라고
마음이 대체 어디 있다고 그래? 물으면,
몸이 고깃덩이가 된 뒤에 육즙처럼 비어져 나오는
그 왜, 푸줏간 집 바닥에 미끈대던 핏자국 같은 거,
그 눈물을 마음의 통증이라고 말하고 싶어
살아보면, 원수가 왜 식구 중에 있을까 싶은 날도 있지만
피가 섞였다는 건 말이지, 보조 침대에 구겨져 새우잠 자는
식구란 말이지, 같은 피 주머니를 나눠 찬 환자란 걸
마음이 우니까 알 것 같더라고
그게 혈육이더라고
세월호 삼보일배가 살려고, 기어서 남녘에서 올라오는데
잃은 아이 언니인가 누나인가 하는
그 여린 아가씨,
옷이 함빡 젖고 운동화가 다 해졌데
죄 많고 말 없는 이곳을 뭐라 부를까
내 나라라는 적진敵陳을 부러질 듯 오체투지로 뚫으며
몸이 더 젖고 더 해지는 동안,
거기 세 든 마음이란 건 벌써 길 위에 길처럼
녹아버렸겠다 싶더라고
마음이란 거 그거, 찌르지마, 자꾸 피가 샌다고
중환자실 천장에 달려 뚝뚝 떨어지는 피 주머니 같은 그것에게
칼질 좀 하지마
그 붉은 것, 진통제도 무통 주사도 안 듣는 거라고
- ‘마음 1’, 이영광
그립고 무섭던 어제는 사라져버리는 법이 없었다
그립고 캄캄한 내일이 엄습하지 않는 날도 없었다
핫이불 한 채에 온 식구가 몸을 묻은 오늘의 밤에
결코 죽지 않는 어제와 내일이 비집고 들어와
미어터지던,
오늘을 다 눌러 죽이고 나서야
지쳐 잠들던
- ‘단칸’, 이영광
비 오는 날 찻집에 혼자 앉아 있어봐도
별로 쓸쓸하지도 않다는 것
쓸쓸한 척을 들킬 진짜 쓸쓸이 없다는 것
책을 읽고 있지만 사실은
열중하지도 않는다는 것
술집으로 옮겨 낮술을 마셔보지만
환자가 오만상 쓰며 약을 먹듯
술을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
글을 쓴다지만 사실은 꼭 할 말이 있지도
않다는 것, 사실은 꼭 할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
오지도 않는다는 것, 하루 종일
섹스 생각 돈 생각만 나기도 한다는 것
글쟁이도 선생도 아니라는 것
무언지 몰라 잠시 이것들이라는 것
가장 확실한 살아 있다는 느낌이 사실은,
살아 있지 않다는 느낌이라는 것
거의 살아 있다는 것
물속에서 오줌을 누듯
빗속에서 눈물을 훔치듯
희망이란 좀 체 입 밖에 내질 않는데도
아픈 시간들은 그걸 온통 썩게 하고
썩은 시간들은 다시 그걸 낱낱이 아프게 한다
- ‘사실은’, 이영광
이제 나는 더 배우려 하지 않는다
알아버린 것이다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닌데
혼란이 없다
다 커서 더,
자라지 않는다
도심엔 절경이 없다
밤은 번쩍거리고
낮은 흐림,
세븐에서 일레븐까지
살 만큼 살아보고 죽을 만큼 죽어본
젊은 얼굴들이 늘어간다
체계 말단의
알바들
형광등처럼 하얗게 웃는
그늘들
마시면 죽는 사람과
안 마시면 죽는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 있다
부들부들 떨며 말리고
부들부들 떨며 권한다
한사람이다
나다
내가 아니다
사랑하는,
내 시체다
전생이다
중얼거리며 밤은 오지만
어떻게 살아나지?
일레븐에서 세븐까지
팔팔하고 팔팔한 죽음 속에서
포기를 모르는
포기 속에서
이제 수염이 비치고
이제 가슴에 젖이 자리 잡는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살 만큼 살아보고 죽을 만큼 죽어본
어린 어둠들이 늘어간다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광경은
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없는 신이 아군처럼
점령한 거리
보인다, 도심엔 절경이
없다 취하지 않는
밤, 파라솔, 일레븐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삐거덕삐거덕, 체계의
아가리를 본다
이미 그것이 다 벌리고
오고 있다
세븐에서 일레븐까지,
나는 으르렁거리며 강제로
결투 자세에
몰린다
나의 시체에 꺼진
불이 들어온다
- ‘세븐일레븐’, 이영광
한 권을 다 읽어도 주인공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러시아 소설처럼
흐릿했지만,
쉰이다
남의 살에 더 들어가려고 약을 먹는 늙은 정욕처럼
어지러웠지만,
지천명이다
인간이 되지 못해 괴로웠던 때도 있었고
동물이 되지 못해 괴로웠던 때도 있었다
인간도 동물도 되지 못하는 것일 때 가장 괴로웠다
마실 만큼 마신 것 같은데
아직 잔이 남았나?
쉰 집으로 말라도 여섯 집 반을 더 얹어주는
백번 바둑처럼?
하늘이 인간의 수명을 늘여주는 건
한꺼번에 멸하기 위해선지도 모른다
- ‘쉰’, 이영광
앉아 있다
나무 아래에
보고 있다
무엇을?
죽은 말을 타고
썩은 나팔을 불며
불행이 오고 있다
살점을 길에 흘리며
왁자지껄 오고 있다
물렀거라••••••
나는 나를 그늘에
길게 엎드린다
물렀거라••••••
한 번도 패배해본 적 없는
슬픔의 군대가 나가신다••••••
세상을 독차지한
불행의 행차가 온다
허깨비 춤에 혀 빠진
고성방가가 온다
나는 땅에 이마를 대며,
물러나고
물러나고
물러난다
조그만 행복의 괴로움
들키지 않으려고
조그만 불행의 웃음으로는
숨 쉬지 않으려고
- ‘불행’, 이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