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돼보려 열심히 뛰어온 곳엔 나와 똑같은 이들이 무수히 서 있었다. 세상에 ‘얼마든지’ 있는 사람이 돼버린 삶. 그곳엔 인간이란 특수성은 상실되고 보편성만 남았다. 아무것도 되지 못한 보통의 존재들. 그들은 허공을 헤매는 비닐봉지를 꼬옥 닮았다. 종착지도 없이 넘실거리며 삭지 못한 채 묵묵히 生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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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과가 끝나고 침대에 누운 새벽. 이런 새벽엔 상념이 찾아와 우울을 낳는다. 친구의 카톡은 위로가 되지 못한 채 차가운 활자로 남았고 구원받지 못한 나의 우울은 바다로 침전한다. 누구의 이야기도 위로되지 못한 지독한 어둠 속 벽은 자신의 등을 내어준다. 벽과 등이 맞닿은 부분엔 서늘한 기운이 사라지고 섬섬한 온기가 남는다. 그 온기는 체온보다 어찌 더 따뜻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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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에게 난도질당한 자아. 자아는 폭력에서 배제되기 위해 벽을 쌓고 문을 잠근다. 하지만 손잡이에 남겨진 온기가, 누군가의 지문이 과거의 추억을 상기시키고 굳게 닫힌 문을 열게 한다. 사람이 싫어 떠나왔지만, 사람이 그리워 다시 돌아가는 역설. 또다시 아프게 될 걸 알면서도 우리는 다시 그들 곁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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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時)는 책이란 형태로 세상에 나왔는데 저자의 문은 세상을 등지고 닫혀있다. 세상을 등지고 닫힌 문과 세상에 나온 시집 한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