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시인선 90권. 1975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2010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 허은실의 첫 시집. 허은실 시인 특유의 유연한 목소리와 자유자재로 뻗는 상상력의 자발성, 그럼에도 다소곳한 성품의 차분함이 읽는 내내 어떤 울컥함으로 내 안에 차고 고임을 느끼게 한다.
바람이 불면
시퍼런 잎들
칼 가는 소리를 냈다
저 많은 칼들을 달고
옥수수는 어떻게 여물어가나
칠흑 하늘에
방금 숫돌에 간
낫
내려다본다
죽여버릴 거야
내 어두운 광 속에서
번쩍이곤 하던
한 자루의
그믐달
저기,
누가,
서걱서걱 걸어나와
나는 자꾸만
여위어갔다
- ‘칠월 그믐’, 허은실
누군가 나를 뒤집어쓰고 있어
병을 불러 아픈 날
곁에 누워 얼굴을 쓰다듬는 계집아이
돌아보면 할머니가 꽃을 안고 웃고 있다
어느 저녁엔
내 몸에 살림 차린 이들
밥물 끓는 소리
등본은 발급되지 않고
번지수가 없어
오늘도 짐 풀지 못한 채
마루 끝에 앉아 있다
누가 불러 나갔는데
나무들 무얼 숨기고 있는지
이파리 하나 흔들거리지 않고
누가 깨워 눈떴는데
벽지 꽃무늬 사이로
사라진 옷자락만
오래 집 비우고 돌아온 날
후다닥 숨는 기척
커튼 뒤의 수군거림
어둔 창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닮은 이 있네
문득 나 또한 누군가의 몸에
세 든 것을 알았네
- ‘야릇’, 허은실
꽃은 시들고
불로 구운 그릇은 깨진다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
완전히 절망하지도
온전히 희망하지도
미안하지만 나의 모자여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허상
녹슬고 부서지는 동상(銅像)보다는
방구석 먼지와 머리카락의 연대를 믿겠다
어금니 뒤쪽을 착색하는 니코틴과
죽은 뒤에도 자라는 손톱의 습관을
희망하겠다
약속의 말보다는 복숭아의 욕창을
애무보다는 허벅지를 무는 벼룩을
상스러운 빛보다는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희미한 어둠을
캄캄한 길에선
먼빛을 디뎌야 하므로
날 수 없어 춤을 추는 나날
흔들리는 찌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별자리를 그린다
- ‘목 없는 나날’, 허은실
헐은 몸 무릎에 누이고
귓밥을 파주고 싶네
수화처럼 적막하게
눈 내리는 저녁
늙어가는 사내의
꺼진 뺨을
천천히
쓸어보면
살얼음처럼 살얼음처럼
누가 아프고
흐드득 깨어
없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본 적 있었네
한 번은 높게
나중은 나직이였네
씻어놓은 양은 냄비 속으로
마지막 물방울이 스며들고
창밖으로 흰 밤은 쌓이네
미음을 떠넣어주듯이
무명실로 기워주듯이
귀 먼 사내에게 들려주던 먼 이야기들이
- ‘소설’, 허은실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너의 양쪽 손으로 이어진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을
나는 눈을 감고 걸어가보았다
이마의 크기가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난한 나의 이마가 부끄러워
뺨 대신 이마를 가리고 웃곤 했는데
세밑의 흰 밤이었다
어둡게 앓다가 문득 일어나
벙어리처럼 울었다
내가 오른팔을 이마에 얹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 자세 때문이었다
- ‘이마’, 허은실
아이엠에프 때 갈라서고 안 해본 일이 없어유. (손을 거두어 뒷짐을 진다. 손가락 끝이 뭉툭하다.) 입원했을 때 보호자가 있어야 된대유. 지가 보호자 한다고. 옷도 다 입혀주구 밥도 먹여주구. (붉은 목울대가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간다.) 아 근디 이렇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갔으니 미치겠어유. (시든 귤을 쥐여준다.) 나기는 김제서 났지유. 죽을라고 소주 대여섯 병씩 먹고 실려가기도 많이 했어유. (발음이 성글다. 앞니 하나가 빠져 있다.) 그래도 억울한 거는 풀어줘야 딸 보러 갈 면목이 서지 않겠어유? (목에 걸린 학생증을 내려다본다.) 명색이 아빤데. (웃는다. 돌배 같은 얼굴. 웃는다.) 사무실 가서 커피도 한잔하고 가시지유. (노란 잠바 속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딸 생각이 나서 그래유. 꼭 저만할 때부터 혼자 키웠시유. (다섯 살 딸애에게 만 원을 쥐여준다. 등뒤로 바다는 눈시울이 붉다.)
- ‘보호자’, 허은실
사타구니께가 간지럽다
죽은 형제 옆에서
풀피리처럼 울던 아기 고양이
잠결에 밑을 파고든다
그토록 곁을 주지 않더니
콧망울 바싹 붙이고
허벅지 안쪽을 깨문다
나는 아픈 것을 참아본다
익숙한 것이 아닌 줄을 알았는지
두리번거리다
어둠 쪽을 바라본다
잠이 들어서도
입술을 달싹인다
자면서 입맛을 다시는 것들의 꿈은 쓴가
더듬는 것들의 갈증 때문에
벽을 흐르는 물소리
그림자 밖에서 꼬르륵거리고
우리는 타인이라는 빈 곳을 더듬다가
지문이 다 닳는다
- ‘더듬다’, 허은실
너는 너의 방에서 수음을 하고
나는 나의 방에서 울 때
그는 그의 골방에서 얼어죽고
방문을 닫고
각자의 식탁을 차릴 때
쪽방에서는 살이 썩는 냄새
아무도 듣지 않는 비명
당신은 이웃의 창문을 엿보고 당신이 보는 것을 나는 본다 당신을 오해하기 위해 I see you 내가 보는 것은 내가 보던 것 아이들은 시소를 타며 영원한 비대칭의 게임을 배운다 봤니? 봤지! See? Saw! 이렇게 마주앉아도 당신은 당신의 풍경을 나는 나의 풍경을 I see, I see
우리의 동침은 돌아누운 등으로 이루는 데칼코마니
팔짱의 형식은 제 두 팔을 마주 끼는 일
삼투는 불가능하다
고장난 시계는 고장난 시간을 간다 그러나 부지런히
당신은 지금 위독하고
배제된 자들은 위험하다
조금 덜 배제된 자가 조금 더 배제된 자를 배제하고
문서에 포함되지 않는 신발들
아무도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 ‘너는 너의 방에서’, 허은실
술집 밖에는 진눈이 내려
없는 것들 발부터 젖는다
움츠려 올린 어깨들
피사체가 흐리다
가장 아름다운 점자는
좁은 골목에 내리는 눈
골목을 흔들며 떠나는 뒷모습을
오래 보아주는 것뿐
우리의 통점엔 차도가 없구나
닳아버린 밑창으로 물이 들어
발가락을 구부려 보지만
제 문수(文數)를 벗을 수 없다
택시는 아무래도 잡히지 않고
새해엔 구두를 사야겠어
낙원떡집 앞에서 우리는
어색하게 복을 빌며 돌아선다
바람은 발을 걸어 자빠뜨리고
미끄러지지 않으려 기우뚱거리는
모습이 우습다
우습다
타인의 발자국 위에
발자국을 포개어
얼음을 다진다
눈은 응달 쪽으로 단단해진다
화분에는 몇 개의 잎이
새로 지고
문 앞에서 너는
젖은 발을 돌려야 한다
- ‘제야(除夜), 우리들의 그믐’, 허은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