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에 처음 읽었다. 그 때는 공간의 묘사가 너무 어려웠다. 이번이 두 번째이다. 지금은 버틸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고차원적인 비유는 아름답다.
감정 표현이 깊고 날카롭다. 등장인물들의 속마음을 끝까지 파헤쳐 보여줘서 마치 갈등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초반에는 교토와 도쿄에서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되는데, 교토에서는 풍경 묘사에 짓눌려 문장 해독에 어려움을 겪다가 암투의 장인 도쿄로 돌아오면 책장이 다시 술술 넘어갔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때 레빈 나오는 농장 얘기에서 막히다가 안나와 브론스키로 돌아오면 흥미진진해졌던 경험이 생각났다.
산시로가 고고하고 쓸쓸한 느낌을 유지하며 잔잔한 감정 흐름을 유지했다면, 우미인초는 처음부터 끝까지 폭풍이 몰아치는 듯했다.
다른 작들에 비해 작가가 스스로를 나타낸 서술이 유달리 많은 소설이기도 하다. 이 작자는 정취 없는 대화를 싫어한다. 이야기 속 때때로 얼굴을 내미는 작가의 마디마디는 정취가 있다.
사람은 일생에 한 번은 진지해지는 순간이 필요하다, 는 대사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후기작에 종종 나오는 독백식 수습 마무리와 달리 기승전결이 시원시원해서 마음에 들었다.
작가의 개입과 별개로 철학자인 고노를 중심으로 해서 작가의 생각과 사상이 배어나온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것들이 마지막에 작품의 주제와 연결되는 것이 흥미롭다.
스포)
우미인초는 구조만 보면 우화와 같은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나약한 인물(오노)을 곤경에 빠뜨리려던 악인이 영웅(무네치카)의 활약으로 끝내 패배하는. 근데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후지오와 오노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잘못한 쪽은 어리버리하던 오노다. 후지오는 배신당한 쪽이다. 후지오의 잘못은 어머니가 꾸미는 고노를 쫓아내고 집을 차지하려는 계획에 동조한 것 정도다.
후지오와 비교하면 어머니는 확실하게 악인의 편이다. 간교하게 말하여 무네치카 집안과의 약속을 흐린 행동은 오노와 닮아 보이기도 한다. 후지오의 죽음은 그 자신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어머니의 눈앞에 떨어진 벼락과 같이 보여진 것 아닐까. 실제로 어머니는 마지막에 개심하려는 여지를 보여준다. 솔직히 후지오는 아무리 봐도 좀 불쌍해 보이긴 한다.
오노와 사요코가 이어지는 문제에 정작 둘 사이의 감정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과 후지오가 마지막에 장기말마냥 떨궈지는 건 백 년 전 소설의 한계인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우미인초”을 맛봤다.
오늘 저녁은 고등어 구이가 먹고 싶었다. 맛있게 하는 가게에 사러 갔는데 쉬는 날이었다. 툴툴대며 돌아와 이 책을 맛보면서 고등어 구이는 잊었다.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진 세명의 남자들과 여자들 이야기. 시종 봄의 나른함 속에 고민하는 청춘들.
“죽음에 직면하지 않으면 인간의 변덕은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네.”
“죽음은 만사의 끝이다. 또 만사의 시작이다. 시간을 쌓아 날을 이루는 것도, 날을 쌓아 달을 이루는 것도, 달을 쌓아 해를 이루는 것도, 결국 모든 것을 쌓아 무덤을 이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덤 이쪽의 모든 다툼은 살 한 겹의 담을 사이에 둔 업보로, 말라비틀어진 해골에 불필요한 인정이라는 기름을 부어 쓸데없는 시체에게 밤새 춤을 추게 하는 골계다. 아득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자는 아득한 나라를 그리워하라.”
“색을 보는 자는 형태를 보지 않고, 형태를 보는 자는 질을 보지 않는다.”
“모든 구토는 움직이기 때문에 하는 거라네. 속세의 모든 구토는 동 이라는 한 글자에서 일어나는 법이지.”
나는 무네치카와 제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거 같지만 오노도 고노도 내 속에 다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소설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만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갈수록 각팍해지고 고독한 사람이 늘어나는 현세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고노로 하고 조승우가 맡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오늘부터 새로운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진지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이 문장 잊지말자.
너무 너무 너무 맛있는 소설을 먹은 내가 좀더 성숙한 사람이 되길 희망한 7월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