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안톤 체호프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된 체호프 희곡 전집. '희곡은 어렵다'는 기존의 편견을 깨고 더 나아가 일반 독자들에게 희곡의 참 재미를 알려주고자 기획된 책이다. 번역을 맡은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김규종 교수는 체호프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과 죽음, 고통과 기쁨에 스며들어 있는 인간 보편적인 것들을 포착하여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번역으로 완성했다.
올해 러시아 소설을 두번째 읽었다.
죄와벌을 보고 나서 당분간 그 쪽 책을 읽고 싶지 않았지만,
뭐든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는 법은 없으니...
갈매기 연극을 보기 위해 체호프 희곡을 읽게되었는데,
연극을 태어나서 두 번 본 나로서는 희곡체가 생소하며, 잘 읽혀지지 않는데다, 이름은 또 왜그리 긴지~ 그러면서도 러시아 특유의 음울함과 과장됨, 타르처럼 달라붙는 이상한 뭔가를 느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 체호프 희곡전집을 통해 러시아 문학에는 뭔가 비슷한 정서가 일관적으로 흐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읽은게 이것 밖에 되지 않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될 수도 있지만 암튼 비슷하게 느껴진다.
음울함,천재?적인 광기, 구원, 등등 색깔로 치자면 짙은 고동색에 붉은끼가 언뜻언뜻 비치는 그런..
기념식, 이바노프, 숲의 수호신, 갈매기가 좋았다.
갈매기, 바냐 외삼촌, 세자매, 벗나무 동산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역시 난 주류에 잘 속하지 못한다.
이바노프는 4막 드라마 이며
책의 들어가는 글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자면
러시아 문학이 창조해낸 '쓸모없는 인간'의 19세기 말 전형이 바로 이바노프다. 젊은 날의 열정과 강력한 의지, 현실과 맞닥뜨리면서 보여준 불굴의 투지가 모두 소진되어 우수에 빠져버린 인간. 그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이바노프를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사샤의 청순하고 눈물겨운 사랑도 결단코 출구는 아니다. 이바노프가 최종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누가 그에게 '쓸모없다'고 돌팔매질을 할 수 있겠는가!
이바노프는 살면서 열정이 사라져버렸고, 그가 열정이 있을때 만났던 그의 아내 안나 페트로브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순수하다. 그의 외삼촌인 샤벨스키 백작은 냉소적이고 지나치게 솔직한데, 난 이 캐릭터도 좋았다. 사샤 역시 이바노프를 사랑하게 되며, 순수하지만, 비극적인 결말(결혼식 당일 날 신랑인 이바노프의 자살로 인해)을 당한다.
여기 나온 인물들은 잘못한 게 없다. 그냥 살다보니 열정이나 사랑이 식어버렸고, 그럼에도 자신의 위치에서 그나마 성실히 책임을 다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모두 불행해져버린다.
192 안나페트로브나/ 그리고 나는 사람들의 부당함에 대해 놀라기 시작했어요. 왜 사람들은 사랑을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고, 진실을 거짓으로 되갚는 것일까요? 언제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날 미워하실까요? 그분들은 여기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사세요. 낮이나 밤이나,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그분들의 증오를 느낀답니다. 그런데 니콜라이의 우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우수가 그이를 괴롭히는 밤이면 그이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더군요. 나도 그걸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완전히 그이가 나를 싫어하게 됐다면! 물론 그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갑자기? 아니, 아니에요. 그건 생각할 필요조차 없어요.
리보프/ 현명하고, 순수하며 거의 성녀 같은 분이 어떻게 그리 천연덕스럽게 자신을 속이고 이런 부엉이 둥지에 들어온 겁니까? 어째서 여기 계십니까? 냉담하고 비정한 둥지와 당신이 공유하는 게 뭔가요...... 하지만 당신 남편은 건드리지 맙시다! 이런 공허하고 속된 환경과 당신이 공유하는 게 뭡니까? 오, 하느님 맙소사! 끝없이 불평하고, 녹슬어 버린 미치광이 백작, 추악한 낯짝을 가진 교활한 인간이자 사기꾼 중의 사기꾼 미샤....... 제발 발씀해 주세요. 왜 여기 계신 겁니까? 어쩌다 여기 걸려든 겁니까?
안나 페트로브나/ (웃는다) 언젠가 그이도 똑같은 말을 했는데..... 똑같은 말을...... 하지만 그이의 눈이 더 커요. 그이가 뭔가를 열정적으로 말하기 시작할 때면 두 눈이 마치 석탄처럼....... 말해요. 말해봐요!
리보프/ (일어나서 손을 흔든다) 뭘 말하라는 겁니까? 어서 방으로 가세요.
안나 페트로브나/ 당신은 니콜라이에 대해서 이것저것 되는대로 이야기하는 군요. 어떻게 그이를 아는 거죠? 반년 정도면 한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나요? 선생님, 그이는 비범한 사람이에요. 당신이 그이를 이삼년 전에 알지 못한 게 안타까워요. 그이는 지금 우울해하고, 침묵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하지만 전에는....... 얼마나 매력 있던지! 그는 '갑시다' 하고 말했죠....... 난 모든 걸 잘라냈어요. 가위로 썩은 나뭇잎을 잘라내듯 말이죠. 그리고 떠나왔습니다......
243
리보프/ 그만두세요. 누굴 바보로 생각하십니까? 가면을 벗어던지세요.
이바노프/ 똑똑한 양반아, 생각해보시오, 당신 보기엔 나를 이해하는 일보다 쉬운 건 없겠지! 내가 안나와 결혼한 건 많은 지참금을 받아낼 심산이었고...... 오판한 나머지 지참금을 받아내지 못하자 그 여자를 괴롭혀서 죽이려는 거죠.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지참금을 받아낼 목적으로....... 그렇죠? 참으로 간단하고 명료하군....... 인간이 그토록 단순하고 편리한 기계인가요.......
아닙니다, 선생. 우리들 각자에게는 너무도 많은 바퀴와 나사, 그리고 밸브가 있어서 첫 인상이나 두세 가지 외적인 특징만으로는 서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신은 날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도 스스로를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뛰어난 의사일지는 모르나, 동시에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자기 확신에 빠지지 말고 내 말에 동의하시오.
리보프/ 당신이 그토록 순수하지 않고, 속물성과 순수함을 구별하지 못할 만큼 내가 모자란 인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바노프/ 분명히 우리는 손발이 잘 맞이 않는 모양이요.......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묻노니, 제발 거두절미하고 대답해주시오. 정말로 당신이 나에게 원하는 게 뭐요? 뭘 얻으려고 하는 거요?(분노하면서) 나는 누구와 이야기 하는 영광을 가진 겁니까? 검사요, 아니면 아내의 의사요?
244 이바노프/ 아, 맙소사! 정말로 당신은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는 거요? 날 내버려두시오, 천 번 내 잘못이고, 하느님 앞에서 보증하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날마다 나를 괴롭힐 권리를 당신에게 주지 않았소.......
리보프/ 그렇다면 누가 당신에게 나의 진실을 모욕할 권리를 주었습니까? 당신은 내 영혼을 괴롭히고 독살했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나는 어리석고 미친 사람들과 넋 빠진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리하게 의식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악의 편으로 끌고 가는 범죄적인 인간들이 있다는 것을 결코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했지만, 당신을 보고 나서는......
246 사샤/ 당신과 이야기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에요.(그림을 본다? 개를 아주 멋지게 그렸네요.. 실물을 보고 그린 건가요?
이바노프/ 맞아, 그리고 이 모든 우리의 로맨스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빤한 거야. 남자가 낙담한 끝에 토대를 잃어버렸다. 선량한 영혼을 가진 강한 여성이 등장하여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장편소설에서 이건 멋지고 그럴 듯해 보이지만, 삶에서는.......
사샤/ 삶에서도 똑같아요.
이바노프/ 당신이 인생을 명민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 나의 불평이 당신에게 경건한 공포를 일으켜 당신은 나의 내부에서 제2의 햄릿을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건 온갖 액세서리를 동반한 정신병이며, 웃음을을 위한 멋진 자료일 뿐, 그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고! 내 찌푸린 얼굴을 보고 포복절도할 만큼 웃어야 할 텐데, 당신은 '사람 살려!' 하는 거야.
사람을 구원하여 공적을 완수하고 싶은 게지, 아아, 오늘은 정말 나한테 화가 나. 오늘의 긴장이 어떻게든 결말이 날 거란 느낌이야...... 내가 뭔가를 부수거나, 혹은.......
사샤/ 맞아요, 맞아. 바로 그게 필요해요. 무엇이든 부수고, 깨뜨리든지 소리 질러보세요. 당신은 나한테 화가 났잖아요. 여기 오는 어리석은 짓을 했기 때문이죠. 자, 그렇게 화를 내세요. 날 보고 고함치고, 발을 굴러 보세요. 네? 화를 내보시라니까요.......(잠시 기다렸다가)네?
이바노프/ 우스꽝스럽군
사샤/ 좋아요, 우리가 미소 짓는 것 같군요! 제발, 다시 한 번 웃어 보세요!
이바노프/ (웃느다)알겠어. 당신이 날 구원하고 분별과 지혜를 가르치려고 하면, 당신 얼굴은 너무도 순진무구해지고, 마치 별똥별을 보는 것처럼 눈동자가 커다랗게 된다는 걸 말이야. 잠깐만, 어깨에 먼지가 묻었군.(그녀의 어깨에서 먼지를 털어낸다) 천진난만한 남자, 그건 바보야. 당신네 여자들은 순진한 척 머리를 짜내도, 당신들은 사랑스럽고 건강하며 따뜻해. 그래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 다만 당신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 태도는 뭐지? 남자가 건강하고 강력하며 쾌활하면 당신들은 남자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아. 하지만 남자가 급속도로 몰락해서 운명을 한탄하기 시작하면, 여자들은 성가실 정도로 남자를 따라다니는 거야. 건강하고 용감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게 변변찮고 눈물이나 짜는 실패자의 시중꾼이 되는 것보다 나쁜 일인가?
사샤/ 당연하죠!
이바노프/ 어째서 그렇지? (큰 소리로 웃는다) 다윈도 이걸 모르고 있어.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이 당신들을 혼내 줬을 텐데! 당신 들은 인간을 망치고 있어. 당신들 덕분에 세상에는 이제 불평분자들과 정신병자들만 태어나게 될 테니 말이야.
사샤/ 남자들은 많은 걸 몰라요. 모든 처녀는 행복한 남자보다 실패한 남자를 더 좋아해요. 그건 여자들이 적극적인 사랑의 유혹을 받기 때문이에요........ 아시겠어요? 적극적인 사랑. 남자들은 일에 몰두하고, 그래서 사랑은 뒷전이죠. 아내와 이야기하고, 정원을 거닐고, 유쾌하게 시간을 보내고, 아내의 무덤에서 울고, 그게 전부예요. 하지만 우리에게 사랑, 그것은 인생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으로부터 당신을 치유하고, 세상의 끄트머리까지 당신과 함께 가기를 꿈꾼다는 겁니다........ 당신이 산에 오르면 나도 산에 오르고, 당신이 구덩이에 빠지면 나도 함께 빠지는 거죠. 이를테면 당신의 서류를 밤새워 고쳐 쓰거나, 누군가각 당신을 깨우지 못하도록 밤새 불침범을 서거나, 아니면 당신과 100킬로미터를 걷는 일이 나한테는 커다란 행복인 겁니다. 한 3년 전에 타작할 때 당신이 그을린 얼굴에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온통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우리 집에 와서 마실 것을 달라고 하신 게 생각나요. 당신에게 물을 가져오니 이미 당신은 소파에 누워서 죽은 듯 잠들어 있었죠. 당신은 우리 집에서 반나절 주무셨고, 그동안 저는 누군가 들어오지나 않을까 해서 내내 문가에 서 있었죠. 그런데 그게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힘이 들면 들수록 사랑은 더 멋지고, 더 강력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251 이바노프/ 정말 미안해. 뭐든 원하는 벌을 생각해봐. 달게 받을 테니까. 하지만....... 질문은 참아줘....... 말할 힘도 없어.
안나페르브나/ (화를 내면서) 어째서 그 여자가 여기 온 거냐고?
아, 정말 당신은 그런 사람이야! 이제야 당신을 알겠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마침내 알게 됐어. 정직하지 않고 비열한....... 당신이 사랑한다고 거짓말했던 거, 기억하지....... 당신 말을 믿고 아버지, 어머니, 종교를 버리고 당신을 따라 왔어....... 당신은 내게 진실, 선, 순수한 계획에 대해 거짓말을 했고, 난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다 믿었다니까.......
이바노프/ 아뉴타, 당신한테 한 번도 거짓말한 적 없어.
안나 페트로브나/ 당신과 5년을 살면서 지치고 아팠지만, 난 당신을 사랑했고, 한 순간도 당신을 홀로 버려두지 않았어....... 당신은 나의 우상이었어...... 그런데 이게 뭐야? 그 모든 시간 내내 당신은 너무도 뻔뻔스럽게 날 속인 거야......
이바노프/ 아뉴타, 진실이 아닌 걸 말하지는 마. 그래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인생에서 한 번도 거짓말하지는 않았어....... 이 점에 대해서는 나를 비난할 수 없어.......
안나 페트로브나/ 이제 모든 걸 알겠어....... 당신은 나와 결혼하면서 생각했겠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날 용서하고 돈을 주실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이바노프/ 오 맙소사! 아뉴타, 그런 식으로 인내심을 시험하다니......(운다)
안나 페트로브나/ 조용히! 하지만 돈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새로운 장난을 시작한 거야....... 이제야 모든 걸 알겠어. (운다) 당신은 한 번도 날 사랑하지도 않았고, 내게 충실하지도 않았어....... 한번도!
이바노프/ 사라, 그건 거짓말이야! 뭐든 하고 싶은 대로 말해. 하지만 거짓말로 날 모욕하지는 마.......
안나 페트로브나/ 부정직하고 비열한 인간...... 당신은 레베데프에게 빚을 졌고, 그래서 지금 빚에서 빠져나가려고 그 사람의 딸을 어지럽게 해서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그 여잘 속이려는 거야. 그렇지 않아?
이바노프/ (숨을 헐떡이면서) 제발 그만둬! 내가 어떻게 할지 보증하지 못하겠어....... 분노가 나를 짓누르고 있어. 그래서 난...... 당신을 모욕할 수도 있다고......
안나 페트로브나/ 언제나 당신은 날 속였고, 그러니까 나 혼자만이 아니야...... 모든 부정직한 행위를 당신은 보르킨에게 전가했지만, 이제야 알겠어. 그게 누구 짓인지......
이바노프/ 사라, 그만하고 가, 안 그러면 내 입에서 무심코 말이 튀어나올 거야! 당신에게 무언가 무시무시하고 모욕적인 말을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소리친다)닥쳐, 유태 년아!
안나 페트로브나/ 못 닥쳐...... 내가 침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신은 오래도록 날 속인 거야......
이바노프/ 입 다물지 못한다는 거지?(자신과 싸운다) 제발......
안나 페트로브나/ 이제 가서 레베데프를 속여......
이바노프/ 그렇다면 알아둬. 당신은....... 곧 죽게 될 거야...... 당신이 곧 죽을 거라고 의사가 말했어.
안나 페트로브나/ (앉는다. 쇠진한 목소리로)언제 말했죠?
이바노프/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면서) 정말로 내 잘못이야! 아아, 내 잘못이라고!(흐느낀다)
265 이바노프/ (험상궂게) 악의가 나를 누르지만 냉정하게 말할 수 있어. 잘 들어. 방금 결혼 예복을 입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까 관자놀이에....... 흰머리가 있더군. 이러지 마, 슈라! 아직 늦지 않을 때 이런 무의미한 희극은 그만둬야 해...... 당신은 젊고 순수해. 당신 앞엔 인생이 있지만, 난......
사샤/ 새로운 건 하나도 없네요. 벌써 수천 번이나 들었어요. 지겨워요! 성당에 가세요. 사람들 기다리게 하지 말고.
이바노프/ 이제 집으로 갈 테야. 당신은 식구들에게 결혼식을 없을거라고 알려. 어떻게든 설명을 해봐. 정신을 차려야 한다니까. 난 햄릿을 연기했고, 당신은 고상한 처녀를 연기했던 거야. 이것으로 충분해.
사샤/ (화를 내면서) 무슨 말투가 그래요? 듣지 않겠어요.
이바노프/ 하지만 난 말하고 또 말할 거야.
사샤/ 왜 오셨어요? 당신의 끝없는 불평이 조롱으로 바뀌었네요.
이바노프/ 아니야. 불평하는 게 아니야. 조롱이라고? 그래, 조롱하고 있어. 그래서 만일 천 배나 더 강력하게 나 자신을 조롱하고, 온 세상을 큰 소리로 웃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어! 거울에 비친 내 자신을 보니까 양심 속에서 포탄이 터지는 듯해! 자신을 조롱했고, 수치심 때문에 하마터면 미칠 뻔했어. (웃는다) 우울증이야! 고귀한 애수! 영문 모를 비애! 시를 쓰기에는 아직도 부족해. 불평을 늘어놓고, 신세를 한탄하며, 사람들에게 우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인생의 에너지가 영원히 소진됐으며, 이미 녹슬고, 인생의 주어진 시간을 다 살았으며, 비겁함에 굴복하여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이런 혐오스러운 우울증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런것은 태양이 생생하게 빛날 때, 개미도 무거운 짐을 끌고 가서 만족을 느낄 때 인정하는 것이지만, 아니야. 정말로 싫어! 보라고. 어떤 사람들은 너를 사기꾼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동정하고, 세번째 사람들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네 번째 사람들은, 이게 가장 나쁘지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너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면서 마치 제2의 무하마드를 보듯 너를 보고, 이제 네가 바야흐로 새로운 종교라도 선언하는 걸 기다리는 거야....... 아니야, 고마운 일이지만 아직도 내겐 자존심과 양심이 있어! 내가 여기 온 건 나 자신을 비웃기 위해서야. 그리고 새나 나무도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아......
사샤/ 그건 악의가 아니라 광기예요!
이바노프/ 그리 생각해? 아니야, 난 미치지 않았어. 지금 나는 진짜 세상의 사물을 보고 있고, 내 생각은 당신 양심처럼 순수해. 우린 서로 사랑하지만 결혼은 안 돼! 내가 하고 싶은 만큼 미쳐 날 뛸 수도 있고, 우울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죽일 권리는 없어! 나의 끝없는 불평이 아내 인생의 마지막 해를 중독시켰어. 내 약혼자로 있는 동안 당신은 웃는 것도 잊어버렸고 5년은 늙어버렸어. 인생의 모든 것이 분명했던 당신 아버지도 내 덕택에 사람들을 이해하는 걸 그만뒀지. 집회가 가든, 누구를 찾아가든, 사냥을 하러 가든, 어디를 가도 나는 권태롭고 무료했으며 불만족했어. 잠깐, 끼어들지 마! 나는 신랄하고 잔인해. 하지만 미안해. 악의가 날 짓누르고 있어.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는 말할 수 없어.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인생을 비난하지도 않았어. 하지만 투덜거리는 인간이 되고 나서 나는 의지와 무관하게, 눈치 채지도 못한 채 인생을 비난하고, 운명을 한탄하며 푸념을 늘어놓았지. 그래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에 대한 혐오에 전염되어 나처럼 비난하기 시작하는 거야. 그런 태도라니! 마치 내가 자연에게 부탁을 하는 것 같아. 살겠다고 말이지. 그래 빌어먹을!
사샤/ 잠깐만요..... 방금 당신이 말한 걸 보면 당신도 불평하는 것에 물렸다는 것이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때라는 거죠! 잘됐어요!
이바노프/ 잘된 건 없어. 거기 무슨 새로운 인생이 있다는 거야? 나는 돌이킬 수 없이 파멸한 거야! 우리 둘 다 이걸 알아야 해. 새로운 인생이라니!
사샤/ 니콜라이, 다시 생각해요! 당신이 파멸했다고 어디 쓰여 있죠?
그런 냉소주의가 어디 있엉? 아니에요. 말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아요........ 성당으로 가세요!
이바노프/ 파멸했어!
사샤/ 그렇게 소리치지 마세요. 손님들이 들어요!
이바노프/ 만일 어리석지 않고 교양 있으며 건강한 인간이 그 어떤 명백한 이유도 없이 운명을 한탄하기 시작하고, 비탈진 언덕길을 굴러 내려온다면, 그래서 끝도 없이 구른다면 그에게 구원도 없는 거야! 자, 어디에 구원이 있는 거지? 어디 있냐니까? 포도주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술을 마실 수도 없어. 서툰 시조차 쓸 수 없어. 정신적인 태만을 경배할 수도, 거기서 지고지순한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어. 태만은 태만이며, 나약함은 나약함일뿐, 다른 이름은 없어. 파멸했어, 파멸했다니까. 더 이상 대화는 불가능해. (주위를 돌아본다) 사람들이 우릴 방해할지도 몰라. 들어봐. 만일 날 사랑한다면, 날 도와줘. 지금 즉시, 지체 없이 날 포기해! 빨리........
사샤/ 아아, 니콜라이. 당신이 날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내 영혼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선량하고 현명한 당신, 판단해봐요. 그런 문제를 정말로 내줄 수 있나요? 단 하루라도 문제가 없는 날이 없고, 하나가 풀리면 더 어려운 문제가 생기고....... 살아 움직이는 사랑을 원했지만, 이건 정말이지 고통스러운 사랑이에요!
이바노프/ 당신이 내 아내가 되면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질 거야. 당장 포기해! 당신 내부에 있는 건 사랑이 아니라, 순수한 본성의 고집이란 걸 알아둬! 당신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나의 내부에서 인간을 되살려내서 구원하겠다느 목표를 세웠어. 공훈을 완수하고 있다는 생각이 당신을 기쁘게 했지...... 지금 당신은 뒷걸음 칠 준비가 돼 있지만 거짓된 감정이 당신을 방해하고 있어. 이해하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