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지만 절판되어 큰 아쉬움을 남겼던 요슈타인 가아더의 <카드의 비밀>이 <수상한 빵집과 52장의 카드>라는 이름으로 다시 독자들을 만나게 됐다. <소피의 세계>로 널리 이름을 알린 요슈타인 가아더의 상상력과 철학적 통찰이 돋보이는 책이다.
표지와 제목만 봤을 땐 <무지개 곶의 찻집>처럼 평범해보이는 한 장소를 매개로 벌어지는 특별한 사건과 따뜻한 분위기의 소설을 예상했다. 요즘 그런 작품이 워낙 많으니까.
일단 읽기 시작했는데 거의 180페이지에 이를 때까진 본격적인 얘기는 언제 나오는 건지 알 수 없고 몰입이 하나도 안됐다. 그런데 중반을 넘어가니 슬슬 빠져든다. 책 속의 이상야릇한 이야기가 나에겐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연상시켰다. 떠나버린 엄마를 찾으러 가는 길 위에서 끊임없이 생각에 잠기고 아들과 철학적인 대화를 계속하는 아빠와, 꼬마책을 읽으며 삶의 신비를 풀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왠지 애잔했다.
"나는 불현듯 우리 인간이 살아 있는 생명과 같이 경이로운 것에 그저 익숙해진다는 게 끝없이 슬프게 느껴졌다. 어느 날인가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세상을 다시 떠나야 할 때가 되면 그제야 다시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아버지 자기 자신을 찾는 여자를 찾아다니는 데에 인생의 반을 보내는 대신 새 여자를 찾을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나요?"
그러자 아버지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그건 좀 이해할수가 없구나. 이 행성에는 어쨌든 50억의 인간이 살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건 특별한 한 사람하고지. 그리고 그 사람을 다른 누구와도 바꾸지 않는단다." p.122
"너 자신을 알라."
"하지만 그건 말하긴 쉬워도 행하긴 어려운 법이지."아버지는 혼잣말하듯 덧붙였다. p.242
"그러면 그들은 대체 나이가 몇인가? 100살인가? 아니면 1,000살인가? 그들은 아주 젊고 또 아주 늙었다네. 그건 바로 그들이 인간의 상상 속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라네. 아니지, 난 결코 이섬의 난쟁이들이 늙어서 흰머리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겁내지 않았다네. 심지어는 그들의 옷조차도 단 한 번도 찢어진 적이 없다네. 우리같이 죽어가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마련이지. 우리는 늙고 우리 머리는 백말이 되고 마니까. 우린 언젠가는 늙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네. 하지만 우리의 꿈은 다르다네. 꿈이란 우리가 이미 사라져비린 지 오래되었다 해도 다른 사람들 안에서 계속 살아 있을 수 있다네." p.254
"아버지와 아들은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 나선다....... 돋보기는 금붕어 어항의 떨어져 나간 틈에 들어 맞는다....... 금붕어는 섬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지만 꼬마빵은 누설한다....... 혼자 하는 카드놀이는 가문의 저주이다......." p.310
아버지는 계속 말했다. "우리는 시간을 피해 결코 몸을 숨길 수 없단다. 왕이나 황제들, 어쩌면 신들로부터도 우리 몸을 숨길 수 있지만, 시간으로부터는 숨길 수 없지. 시간은 어딜 가나 우리를 따라다닌단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이 쉼 없는 시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지." p.314
그날 밤 아버지와 나는 오랫동안 뒤척인 후에야 잠들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내게 한 말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향해 중인 배는 쉽게 방향을 돌리지 않는 법이지." 하고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운명은 우리 편이에요." p.392
나는 불현듯 우리 인간이 살아 있는 생명과 같이 경이로운 것에 그저 익숙해진다는 게 끝없이 슬프게 느껴졌다. 어느 날인가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세상을 다시 떠나야 할 때가 되면 그제야 다시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p.418
어쩌면 우리가 엄마를 패션업계의 환상에서 구해낼 수 있었던 게 가장 큰 수수께끼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건 사랑이니까 사랑만큼은 결코 시간이 기억을 퇴색시키는 것만큼 빨리 퇴색시킬 수 없는 것이다. p.446
초반에는 좀 지루했다. 번역 문체이기때문에 가독성이 조금 떨어지기는 한다. 하지만 끝에가서는 책에서 손을 떼기가 어려웠다. 알고보니 이 책의 저자는 유명한 철학소설인 소피의 세계를 썼다더라.
이 소설 또한 철학에 관한 고뇌를 담았다. 상당히 따분할 수 있는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읽었다. 초반의 지루한 구석들이 뒤에 갈수록 퍼즐처럼 맞춰진다. 무엇보다 생각하는 맛이 있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