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기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기쁜 이야기라면, 힘들어요
아주 멀리 되돌아가야 하니까요
웃다가 화석이 된 이야기거든요
모처럼 웃었는데 파묻힌
기쁜 이야기는 살 한 점 털 한 올 없어요
골자만으로 기쁠 수 있으면 기쁘겠어요
슬픈 이야기는 어떠세요?
너무 익숙해 싫으세요?
(그래도 돌이킬 수 없어요) 아니면
롱 테이크로 시간만 잡아먹는
속 보이는 슬픈 드라마가 좋으세요?
좋아서 요실금을 느끼세요?
슬픈 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콩팥이 걸러낸
눈물보다 깨끗한 액체예요
기쁜 이야기는, 조금 기다리세요
전혀 새로운 시선이 아마도
또 다른 우주를 발견할 거예요
이목이 낯선 우주를 발견하면
지구인이 하나라고 믿는
우주가 은하단만큼 많을 거예요
설탕 한 스푼에서 풀어져 나오는
색색의 솜사탕은 많을수록 기뻐요
한입 베 물면 허망한 맛
기쁨으로 시작해 슬픔으로 끝나는 맛
달큰한 잔맛을 기쁜 이야기라고 할까요?
끈적한 흔적을 슬픈 이야기라고 할까요?
폭신한 희망은 자꾸 작아져요
우주의 은하, 은하의 태양계, 태양계의 지구
지구의 한반도, 한반도의 신도시
동산을 눈 붉은 신발 한 짝이 공전해요
오른 신은 괜찮다 하고
왼 신은 절망해요
기쁨을 향해 슬픔을 걸어요
기쁨을 지나 슬픔을 맴돌아요
동산 한 바퀴가 태양 한 바퀴면 좋겠어요
곧장 서른세 바퀴째 돌고 나면
기쁜-슬픈 이야기의 데자뷔를 들려드리겠어요
오래전 사라진 별의 빛을 보여드리겠어요
- '기쁜-슬픈 이야기', 윤병무
나의 옛날을 사는 당신과
당신의 훗날을 사는 내가
외따로인 것은 별빛처럼
빛이 닿아도
열은 닿지 않아서이지
빛은 열에서 태어나지만
빛 없는 열은 당신이고
열 없는 빛은 나이니까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안녕의 시절은 시간이었지
어느 때부터 어느 때까지였지
빛이 열의 손을 놓았던 때는 시각이었지
때를 새긴 어느 한순간이었지
시간의 변주가 시작된 때였지
흩어졌지 오래도록 재편되지 않아
옛날이 훗날로 이행하는 중이었지
어둠을 길 삼아 고독한 길을 갔지
길은 고독을 배웠고 고독은 길을 익혔지
배우고 익혀도 기쁨은 따라오지 않았지
훗날을 사는 내가 멀리서 찾아갔지
옛날을 사는 당신이 찾아오지 않아
내가 당신을 찾아갔지
훗날이 옛날을 즐거워했지만
내가 당신을 즐거워할 뿐이었지
나를 사는 당신을 알아주지 않고
당신을 사는 나를 알아주었지
당신이 섭섭해하지 않아도 여전히
빛은 닿아도 열은 닿지 않았지
몰라주는 달빛이 그저 서운했지
- '당신과 나의 학이편', 윤병무
참으려 해도 안 할 수 없고
억지로는 못 하는 것
사랑도 예술도 불면도
갈비뼈 금 가는 재채기여라
- ‘재채기’, 윤병무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모릅니다
그게 네 죄다
그리하여 벌 받았다
징벌이 기니 이승도 길다
죄 없이도 벌은 받는다
설명할 길 없어 원죄라 했다
선택한 죄
내친김에 신발 끈을 조인다
마저 벌 받으려고
- ‘죄와 벌’, 윤병무
마저 말하려는데
왜 목메는지
목메는데 왜
말은 역류하는지
말을 물고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밤
밤이 바람을 뱉는다
구름이 반달을 뱉는다
반달이 절반만 말한다
해에게 빌린 말
빚 없는 말은
달 뒤편에 있다
- ‘말의 뒤편’, 윤병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