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버트 험버트가 소설의 첫 페이지부터 ‘롤리타’라는 이름을 혀끝에서 굴리듯 부르는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이상할 만큼 오래 불편했다. 그 불편함은 그가 무엇을 했는지를 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든 것은, 그토록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문장이 지나치게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문장은 매끄럽고 재치 있으며 때로는 황홀할 만큼 정교하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자꾸만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가지 감각 사이에 놓였다. 문장에는 감탄하면서도, 그 문장이 가리고 있는 현실에서는 눈을 돌리지 않아야 했다.
나는 여기서 아름다움과 진실이 반드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선한 것과 쉽게 연결하고, 세련된 언어를 지적인 것과, 지적인 것을 다시 진실한 것과 이어 붙이곤 한다. 그런데 <롤리타>는 그 익숙한 연결을 잔인할 정도로 끊어놓는다. 험버트의 언어는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이 가리키는 곳에는 진실이 아니라 은폐가 있다. 그의 문장은 현실을 비추는 창이 아니라 현실 위에 드리운 얇고 화려한 커튼에 가깝다.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우리는 잠시 커튼의 무늬를 바라보다가, 그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잊을 뻔한다.
험버트는 자기 자신을 시인이자 예술가로 만들고, 자신의 욕망 역시 미학의 언어 안에 집어넣는다. 그는 폭력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한 어린아이를 자신의 환상 속에서 ‘님펫’이라는 신비로운 존재로 다시 만들어낸다. 나는 이 대목에서 언어가 단순히 현실을 설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지우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행위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행위의 윤곽도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지배를 사랑이라고 부르고, 착취를 운명이라고 부르고, 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아름다운 비극이라고 부르는 순간, 말은 현실을 가리키는 표지가 아니라 현실을 가리는 가면이 된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롤리타’가 아니라 오히려 ‘돌로레스’인지도 모른다. 롤리타는 험버트가 만들어낸 이름이다. 그가 욕망할 수 있도록 가공한 한 이미지의 이름이고, 실제 소녀의 삶 위에 덧씌운 허구의 이름이다. 반면 돌로레스는 그 환상 아래에 묻혀 있는 한 인간의 이름이다. 나는 험버트가 그녀를 계속 롤리타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이름을 빼앗는 것이 한 사람의 현실을 빼앗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돌로레스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자기 욕망에 맞는 형상을 하나 만들어 그 위에 ‘롤리타’라는 이름을 붙인 뒤, 그 형상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이 소설의 일인칭 서술 자체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험버트는 돌로레스의 삶을 지배했을 뿐 아니라, 그녀를 기억하는 방식까지 지배한다. 독자가 사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창문은 험버트의 목소리이고, 그 창문의 유리에는 이미 그의 욕망과 자기연민과 미학이 짙게 칠해져 있다. 돌로레스의 목소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갇혀 있다. 그녀가 울고, 화를 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평범한 또래의 삶을 갈망했던 순간들은 험버트의 화려한 문장 사이에서 잠깐씩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그의 서술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을수록 험버트가 하는 말을 읽기보다, 그가 말하지 않는 것을 읽게 됐다.
어쩌면 나보코프가 험버트에게 이토록 매혹적인 언어를 쥐여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만약 험버트가 처음부터 조악하고 혐오스러운 언어만을 사용하는 인물이었다면, 우리는 너무 쉽게 그를 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저 사람은 나와 전혀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안전한 거리에서 그를 비난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롤리타>는 그런 안전한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험버트는 지적이고 재치 있으며, 자신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아름답게 설명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독자는 그의 논리가 아니라 그의 문장에 마음을 내어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바로 그 순간 이 소설의 함정이 닫힌다. 험버트에게 설득당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의 행동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때로 설득은 훨씬 조용하게 일어난다. 한 인간의 고통보다 그것을 묘사한 아름다운 문장을 먼저 바라보게 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시선의 방향을 빼앗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롤리타>가 욕망에 관한 소설인 동시에 독서에 관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을 때 언제나 말하는 사람의 눈을 빌린다. 그러나 누군가의 눈을 빌려 세상을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보지 않기로 한 것까지 함께 보지 못하게 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하다. 험버트의 시선만 따라가면 돌로레스는 영원히 롤리타로 남는다. 그 시선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그 이름 뒤에 한때 살아 있었던 아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책을 덮고 나서도 나는 첫 페이지의 그 아름다운 문장을 다시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 문장이 롤리타를 불러내는 주문처럼 느껴졌지만, 마지막까지 읽고 난 뒤에는 오히려 돌로레스를 지워가는 주문처럼 들렸다. 이름을 반복해서 부를수록 한 사람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 사람을 자신이 만든 환상 속에 더 깊이 가두는 말. 그래서 내가 이 소설에서 끝내 배운 것은 아름다운 문장을 의심하라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문장이 너무 아름다울 때일수록, 나는 그 아름다움이 무엇을 비추고 있는지만큼이나 무엇을 어둠 속에 남겨두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읽는다는 것은 쓰인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쓰이지 못한 것의 자리를 찾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롤리타>에서 내가 끝까지 찾아야 했던 것도 험버트가 수없이 불러낸 ‘롤리타’가 아니라, 그 이름과 그 문장과 그 욕망 아래에서 좀처럼 자기 목소리를 가질 수 없었던 돌로레스였다.
호텔에서 우리는 각방을 썼지만 한밤중에 그녀가 흐느끼며 내 방으로 찾아왔고 우리는 아주 다정하게 화해했다. 아시다시피 그녀에게는 이제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어린애한테 못된 짓을 하는 성범죄자도 아니고 정신병자도 아니야. 강간범(the rapist)은 찰리 홈스 같은 놈이고, 나는 치료사(therapist)란다. 띄어쓰기만 다르지만 크나큰 차이가 있지.
남녀 배심원 여러분, 어린 소녀와 더불어 굳이 성교까지 가지는 못하더라도 달착지근한 신음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짜릿짜릿한 육체적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성범죄자의 대다수는 사실 그리 사악하지도 않고 소극적이며 소심하고 서투르기 짝이 없는 풋내기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 바라는 것은 다만 우리가 가벼운-뜨겁고 축축한, 이른바 일탈 행동이라지만 사실상 무해한-성적 탈선 행위를 저질렀을 때 경찰과 사회가 너무 가혹하게 처벌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색마가 아닙니다! 우리는 유능한 군인들과 달리 강간을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비록 불행하지만 온순하고 신사적이며 강아지처럼 착한 눈매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어른들이 있는 곳에서는 자신의 충동을 억누르는 자제력을 지녔지만 님펫을 한 번 만져볼 수만 있다면 인생에서 몇 년이나 몇십 년쯤은 기꺼이 희생할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건대 우리는 결코 살인자가 아닙니다.⠀- P.143 중에서
롤리타 혀끝에서 튕기는 그 발음
하나의 병 하나의 아픔
소아성애자의 잿빛 사랑을 담았다
아니 집착을 담았다 .
현재 지금의 상황에 절대 용서 받을수 없는 행동들을 저지른 사람들에겐 어떤 미학도 없다
예술이라는 이름을 이용하여 벌어진 질 나쁜 범죄를
엄중한 처벌로서 다뤄야 한다는 마음이 크다 .
책은 훌륭하며 끊김 없이 읽어가는 재미가 있고
한 사람을 더 이해 할수있는 관념이 생기는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