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1차, 2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 독일 문학에서 ‘전쟁’과 ‘개인’의 관계를 치밀하게 제시한 선구적인 작품이다. 이 책은 1919년 헤르만 헤세가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출판한 초판본 표지 디자인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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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데미안 (1919년 오리지널 표지 디자인) 내용 요약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가 1919년에 발표한 성장 소설로,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의 내면적 여정을 통해 자아와 세계의 의미를 탐구한다. 📖 이야기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독일을 배경으로, 싱클레어가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에 이르는 심리적 갈등과 깨달음을 그린다. 소설은 싱클레어의 회고 형식으로 시작된다. 열 살의 그는 부모와 함께 안온한 가정에서 자라며 ‘빛의 세계’라 부르는 순수한 삶을 살았다. 🌞 그러나 어느 날 동네 불량배 프란츠 크로머와 얽히며 거짓말을 하게
드디어 데미안을 읽다
주제의식이 너무 좋다
초반 크로머와의 이야기 소재가 너무 공감공감
근데 그 이후 데미안과의 대화나 화자의 생각이 형이상학적이고
장황함
그리고 메시지 전달이 너무 직접적이고 올드함
스토리는 없고 철학EBS강의가 주요함
단순 성장소설로 치부하기에는 훨씬 깊이 있음
그래서 성인도 읽기를 추천
우리 모두 알을 깨고 나오자!
중학교때의 나는 이해를 못했었고,
고등학교의 나는 이상을 바라게 되었으며,
지금의 나는 에밀 싱클레어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 책의 한 문장 문장이 마음에 크게 다가오는건 아마 에밀 싱클레어의 삶이 나에게도 있었음을 이해하게 되는 일일것이다.
소년의 선과 악에대한 혼동
혼자만의 정답을 위한 반항
터닝 포인트같은 사람들과의 만남
알에서 깨어난 새가 황금빛으로 물들어 날아오르기까지
쫓아가던 데미안의 모습에 비친 아브락사스의 모습이 곧 자신의 모습이 되기까지
한 인간이라면 자신의 존재의 방향을 위해 쫓아본 사람이라면 저 과정이 더욱 크게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고전이 갑자기 끌려서 읽었지만 역시 오랫동안 사랑받은 책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 됨
처음엔 표면적인 것 밖에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읽으면서 무슨 뜻인지 검색도 하고 다 읽은 후에 작가? 옮긴이의 해설도 읽으면서 점점 깊어짐. 차장님은 자기가 10번도 넘게 읽은 책이라고 하셔서 그정도인가 싶었는데 역시 한 번 읽고 완벽한 이해는 어려워서 10번 읽으신게 아닌가...ㅋㅋ(
초반 기독교적인 이야기 중에 카인과 아벨 얘기가 그런 식으로 해석 될 수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교회 가면 항상 카인을 동생을 죽인 악인으로 몰고 아벨을 선한 사람으로 이야기하니까.
그리고 처음 (자세히 생각 안나는데) 사과를 훔쳤다고 거짓말 한 걸 들켰고, 그 친구한테 끌려다니고 이걸 부모님, 가족한테 이야기 할까 말까 고민하는 심리묘사가 넘 인상적이었음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이 구절이 여기 나온 걸 책 읽고 처음 알았다
ㅜㅜ 아직 다 이해못한 거 많아서 다시 읽을 듯
그렇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를 인정하고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분리한 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절반이 아니라, 온전한 전체를 인정해야 해. 우리는 신께 예배하는 동시에 악마에게도 예배해야해. 그래야 옳다고 할 수 있어. 자연스럽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묵살하지 않도록 악마 까지도 품어 내는 그런 신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돼
내가 장차 무엇이 되든지 나는 상관없었다. 술집에 앉아서 떠들어 대는 이상하고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방식으로 나는 세상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내 저항의 방식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내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부수어갔고 때로는 상황을 이런 식으로 파악하곤 했다. 만약 세상이 나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보다 더 나은 자리, 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분명 자멸하고 말 텐데. 그렇다면 그 책임은 마땅히 이 세상이 져야 한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우리들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 해내는 누군가가 들어있어.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나는 살기 위해서 내면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 말고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도 어려웠을까?
가령 자연이 당신을 박쥐로 만들었다면 타조가 되려고 애쓰지 말란 말이오. 당신은 번번이 자기를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며 자신을 자책하고 있소. 그런 생각을 버리시오. 불을 들여다보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시오. 그래서 어떤 예감이 당신을 찾아들고 당신의 영혼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그것들에 당신의 몸을 맡기시오.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버지, 혹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를, 그들의 마음에 드는지를 맨 먼저 묻지 마시오! 그런 물음이 사람을 망치는 거요.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안전하게 인도로 걸으면서 화석이 되고 마는 거요.
당신이 죽이고 싶은 어떤 사람은 실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의 형상 속에서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숨어 있는 그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것이오.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진정으로 우리를 흥분시키지는 못하는 법이니까 말이오!
내가 내 자신의 내부를 발견해 내는 일이 현저히 발전했으며, 내 자신의 꿈과 사상과 예감에 대한 믿음이 커졌으며, 나의 내부에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일이 나에게 유익했다.
각성된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는 단 한 가지,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부에서 견고해져서 그 길이 어디에 닿아 있건 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을 더듬어 나가는 일. 그 이외의 다른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임의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 운명을 자신의 내부에서 송두리째, 그리고 온전하게 끝까지 지켜내는 일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일부일 뿐이며, 도피하려는 노력이고, 대중의 이상 속에 숨으려는 재도피이자 순응이고,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게 헛된 일이라는 건 아냐. 오늘날의 이상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셈이 될 테고, 석기시대의 신들을 제거해 줄 거니까. 지금 이대로의 이 세게는 바야흐로 죽어 가고 있어. 이 세계는 멸망하고 있으며 또 결국에는 멸망하고 말 거야.
어디서나 똑같았다! 어디서나 그들은 행여 자기 자신의 책임을 상기시키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가도록 요구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자신의 과거시절 어느 곳에서 '자유'를 찾고 '행복'을 찾았다. 사람들은 이삼 년간 폭음을 하고 환성이나 지르다가 기어들어 와서는 관청의 성실한 관리가 되었다. 그렇다. 이건 부패했다. 우리들의 나라는 부패한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이 대학생들의 멍청함보다도 훨씬 더 멍청하고 나쁜 수백가지의 다른 멍청함이 있었다.
태어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요. 새도 알을 깨고 나오려면 온힘을 다해야 한다는 걸 당신도 잘 알잖아요. 돌이켜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대체 그 길은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그저 어렵기만 했던가? 그러나 역시 아름답지는 않았는가? 하고 말이에요. 당신은 보다 더 아름답고도 쉬운 길을 알고 있나요?
그래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꿈을 발견해야 하는 거예요. 발견하고 나면 길은 한층 쉬워지지요. 하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꿈이란 없어요. 또다시 새로운 꿈이 나타나지요. 어떤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 돼요.
우리는 단지 다른 영역에 속했을 뿐이었고, 다수의 사람들과 어떤 경계선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단지 보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분리되었을 뿐이었다. 우리의 사명은 이 세계에 한 개의 섬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에 불과할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살아가는 방식 가운데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임은 틀림없었다.
예전의 나는 인간이 왜 이토록 하나의 이상을 위해 살 수 없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나는 많은 사람이, 아니 모든 사람이 이상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았다. 물론 그것은 개인적이거나 자유롭거나 선택된 이상일 수는 없었고 공통적이고 떠맡겨진 이상임이 분명했다.
자신의 인생에 직접적으로 부딪치며, 책임 의식을 갖고 삶을 추구할 수 있는 내면의 성장을 중요시한다.
이 논쟁은 단순히 비판적 사고를 키우기 위해 사고의 틀을 깨고자 했던 소재일 수 있다. 하지만 자아가 성장하는 데에는 말뿐인 자아 성장이 아닌 자신의 선택을 책임질 수 있는 의무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책임 의식은 마지막 '종말의 시작'에서 전쟁에 참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책임 의식을 설명하는 단초가 된다. 현실에서 자기 존재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자아의 성장 정도와 상관없이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의무다.
아브락사스의 진정한 성취는 자기 자신에게로 나아가 자신의 운명을 찾아 그 운명을 자신 속에서 온전히 살아내는 것, 그리고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자 실천하는 것, 이를 위해 감당해야 할 고독의 깊이가 절대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엇이든 '우연히' 발견되고, '우연히' 시작되는 것은 없다. 사람이 무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루어진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나를 얽매 오더라도,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고 집중해야 한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우리들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 해내는 누군가가 들어 있다 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개인들이 내면적인 자아의 성장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접점에는 반드시 외부 세계와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인간 내면의 생각과는 다르게 피할 수 없는 전쟁의 과정도 세계를 다시 재창조해 내는 과정 중 하나일 수 있다. 여기에 참여하는 수많은 병사들은 그동안 우리가 무시해 왔던 성숙되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과소평가였다. 떠맡겨지긴 했지만 공동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이들은 전쟁터로 왔던 것이다.
우리가 피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준비했다 하더라도 삶은 늘 우리에게 사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를 준다.
자아는 이렇게 어느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제를 제시하며 우리 삶을 흔들어 놓는다.
현실에 분명하게 존재했지만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그것을 현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내면에서 이해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현실의 있는 그대로를 직시해야 한다.
새가 알에서 나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듯이, 우리도 세계로 통하는 자신의 껍질을 부수는 데 사력을 다해야 한다. 자신과 싸워 가는 길은 참 좁고 힘들지만, 그 길에 집중하면 인생의 돛대를 세워야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다.
지식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인식하려면 자아가 끊임없이 낡은 세계의 껍질을 벗어 내고 새로 태어나는 방법밖에 없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삶의 순간마다 주어지는 고민들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 스스로의 고민에 치열하게 답을 찾을 필요가 있다. 내 안의 자아가 어떻게 해야 껍질을 깨고 나와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있는지, 우리는 훈련이 부족하다. 그래서 밝은 세계에 조금만 위협이 가해져도 금방 죽을 것처럼 공포에 질린다. 하지만 이 공포는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듯이, 사력을 다해 껍질을 부수고자 한다면 극복할 수 있다. 겁에 질려 평생 자아를 세상 밖으로 꺼내 보지도 못하느냐, 당당히 세계와 마주하느냐는 우리들 선택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