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는 처음부터 하나의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일기와 편지, 축음기에 남긴 음성, 신문 기사와 전보가 서로의 빈틈을 메우며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처음에는 이 산산이 흩어진 형식이 공포를 늦게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본 것을 다른 사람이 아직 모르고, 독자는 그 어긋난 시간 사이에서 불안을 느끼게 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다시 읽고 나니, 이 소설에서 인간이 드라큘라와 싸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이야말로 바로 이 흩어진 기록을 한곳에 모으는 일이었다. 그들은 괴물을 만나자 칼보다 먼저 문서를 펼치고, 공포에 이름을 붙이며, 서로가 겪은 일을 날짜와 시간의 순서로 배열한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기록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순간, 괴물은 비로소 추적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나는 이 장면들이 이상하리만큼 근대적인 인간의 초상처럼 느껴졌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그대로 두지 못한다. 밤의 어둠을 지도 위에 옮기고, 우연처럼 보이는 일을 표와 문서 안에 집어넣으며, 끝내 이름 없는 공포에 이름을 붙인다. 드라큘라가 어둠과 전설과 미신의 세계에서 온 존재라면, 그를 쫓는 사람들은 기록과 분류와 시간표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이 소설의 싸움은 십자가와 흡혈귀의 싸움이기 전에, 형태 없는 것을 형태 안에 가두려는 인간과 끝내 어떤 질서에도 붙잡히지 않으려는 존재 사이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괴물을 쓰러뜨리기에 앞서 먼저 그를 문장 속에 붙잡는다.
그래서 드라큘라의 성에 시계가 없다는 사실이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았다. 시계가 없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곳에서는 시간이 인간이 아는 방식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뜻처럼 보였다. 인간의 삶은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강물 위에 놓여 있다. 아침과 밤, 약속과 마감, 탄생과 죽음이 끊임없이 우리를 앞으로 밀어낸다. 하지만 수백 년을 살아온 드라큘라에게 시간은 강물이 아니라 늪에 가깝다. 그는 앞으로 흘러가지 않고, 오래된 성과 오래된 기억과 오래된 욕망 속에서 끊임없이 같은 자리를 맴돈다. 그의 불멸은 시간이 무한히 주어진 상태라기보다, 오히려 시간으로부터 추방된 상태에 가까워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반 헬싱과 동료들이 드라큘라를 쫓는 방식도 다르게 보였다. 그들은 기차 시간표를 확인하고, 배가 언제 출항했는지 계산하고, 이동 경로를 겹쳐 보며 그보다 한발 앞서기 위해 분 단위로 움직인다. 흡혈귀를 물리치는 무기가 마늘과 성체와 십자가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무기는 시계였다. 시간을 벗어나 살아온 존재를 인간은 시간표 위에 올려놓고, 이동 경로를 계산하며, 마침내 하나의 순간과 장소 안으로 몰아넣는다. 영원의 존재를 죽이는 것은 결국 유한한 인간들이 가진 시간의 감각이었다.
루시의 몸을 오가는 피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혔다. 드라큘라는 다른 사람의 피를 빼앗음으로써 자신의 시간을 연장하지만, 루시를 살리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피를 내어줌으로써 그녀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주려 한다. 한쪽에서는 피가 약탈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피가 건네진다. 겉으로 보면 모두 한 사람의 몸에서 다른 사람의 몸으로 생명이 옮겨가는 장면이지만, 그 방향은 정반대다. 나는 여기서 괴물과 인간을 가르는 것이 무엇을 주고받느냐보다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드라큘라에게 타인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저장고이지만, 인간들에게 타인은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어서라도 붙잡고 싶은 존재다. 피는 그래서 단순히 생명의 상징이 아니라 관계의 윤리가 된다. 취한다는 것과 내어준다는 것 사이에는 같은 붉은 액체로는 메울 수 없는 깊은 간격이 있다.
미나의 상처도 그 간격 위에 놓여 있다. 드라큘라는 그녀의 몸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으로 미나를 지배하려 한다. 그러나 미나는 그 침범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자신과 드라큘라 사이에 생긴 연결을 이용해 오히려 그의 위치를 추적하고, 그가 자신 안에 남긴 흔적을 그를 쫓는 좌표로 바꾼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상처라는 것이 언제나 과거가 남긴 흉터로만 머무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떤 상처는 한 사람을 과거에 붙잡아두지만, 어떤 상처는 그 과거를 거꾸로 추적할 수 있는 길이 된다. 드라큘라는 미나에게 자신의 표식을 새겼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 표식은 미나가 그를 찾아가는 실마리가 된다. 지배의 흔적이 저항의 지도처럼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드라큘라는 관 속에서 심장을 찔리고 목이 잘린 채 죽는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스쳐가는 평온 때문에 나는 오히려 그 죽음을 오래 생각하게 됐다. 수백 년 동안 죽음을 피한 존재가 마지막 순간에야 비로소 인간과 같은 시간 안으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 그가 잃어버린 것은 생명이 아니라 끝이었다. 끝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삶에는 완결도 없었고, 완결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순간도 온전히 지나갈 수 없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영원히 가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어쩌면 아무것도 완전히 떠나보낼 수 없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죽음에서 벗어난 순간 그는 동시에 변화와 이별과 새로운 시작에서도 벗어난다. 불멸은 생명의 극대화가 아니라 삶을 이루는 리듬의 정지였던 셈이다.
그래서 <드라큘라>를 덮고 나서 내게 남은 것은 흡혈귀에 대한 공포보다 유한함에 대한 이상한 안도였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삶을 잘라내는 칼날처럼 생각하지만, 어쩌면 죽음은 삶에 모양을 만들어주는 가장 바깥쪽의 선인지도 모른다. 끝이 있기 때문에 하루는 하루가 되고, 계절은 지나가며, 누군가와 함께 있는 순간에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무게가 생긴다. 인간은 시간 때문에 늙고 잃고 사라지지만, 바로 그 시간 때문에 서로를 기다리고 기억하고 사랑한다.
드라큘라는 죽지 않음으로써 시간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존재였다. 그는 수백 년을 살았지만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했고, 수많은 사람의 피를 마셨지만 누구와도 삶을 나누지 못했다. 반대로 유한한 인간들은 서로의 일기와 편지를 모으고, 피를 나누고, 시간을 맞추며 하나의 삶을 서로에게 이어 붙인다. 나는 결국 이 소설에서 가장 무서운 저주가 영원히 산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시간에도 속하지 못한 채 홀로 영원해지는 데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오래 살아남는 능력이 아니라,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짧은 시간을 다른 사람의 시간과 기꺼이 포개는 능력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