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알 벨루치님이 이 책을 읽었어요
2년 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나는 아직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10년째 읽고 있다. 그런데 이 책 진짜 대단한 책이다.
매 페이지마다 명화를 수록할 정도의 꼼꼼한 챙김과 함께 늘어놓은 곰브리치의 진정한 미술에 대한 자세와 생각들...
특히, 마태오의 성서를 기록하는 장면을 그린 그 그림(첫번째 사진)은 참으로 예술, 미술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고 그 미술, 즉 미술의 결과인 작품을 보는 사람에 따라서 평가나 생각들이 얼마나 좌우되는지를 알고 있다.
나는 문득 이 대목을 가만히 생각해보면서 느끼는 것은 ‘미술’이란 영역에서 활동하는 그 예술가들,
미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예술적, 미술적 상상력이란 것이 형언할 수 없는 정도의 정신적 크기라는 것에 은근히 압도되었다.
20080129, 화...
특별히 마태오의 성서를 기록하는 대목에 대해서 내가 글을 적어놓은 것을 찾아보니 아마도 분실한 듯.
하드디스크를 뒤져도 없늘 걸 보니 백업하는 와중에 날아간 듯 싶다.
내가 이 부분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해준 적도 있는데, 마태오가 성경을 기록하는 장면이다.
왼쪽 그림은 천사가 직접 손을 지시하면서 문자하나 하나까지도 직접 기록에 개입했다는 신학의 '기계적 영감설'과 같은 그림이다.
이를테면, 메신저인 천사나 하나님이 받아적으라고 해서 마태오가 받아쓰기를 하듯이 '받아적는' 장면을 구현했는데,
카라바조는 오른쪽 그림에서 그는 예술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런 기계적인 받아쓰기가 아니라
마태오의 개인적인 모든 것을 동원하여 천사와 함께 성경을 기록하는 다소 '창조적인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두 그림이 주는 차이가 굉장히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신은 우리가 가진 모든 개인적인 능력과 은사와 창조성과 역량을 무시하고 배제한채 우리를 '받아쓰기용' 정도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용하실때 우리의 모든 것, 모든 경험,
더 나아가 우리의 모든 실패와 시행착오와 열등감과 트라우마와 심지어 죽음까지도 통째로 사용하신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 기여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저는 하나님을 믿으니, 각자 나름대로 자기 세계관에 따라 생각하심 좋겠다)
마태오의 그림은 그런 인사이트insight를 내게 주었다.
2014년 11월 28일 금요일...
이 그림(두번째 사진)도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말이 달리는 모습을 굉장히 과장되게 표현했는데,
그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그림이다.
그림은 사진이 아니다. 그림은 사실적인 사진이 아니라 그림은 작가, 예술가의 개인적인 모든 감정과 편견과 의견이 조합되어 드러나는 표현물이다.
제리코의 그림은 그런 의미에서 창조적이다.
말이 달리는 긴 롱다리가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그림만이 보여주는 달림의 힘참과 말의 힘을 느낄 수 있어 이 그림이 특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순전한 내 생각이다.
2014년 11월 28일 같은 시각의 사색...
결국 나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1/3쯤 남겨놓고 이글을 올린다.
다 읽고 남길려고 했는데, 읽어야 할 책, 안 읽은 책, 읽고 싶은 책은 넘쳐나고...언젠가 완독하겠지.
근데 도대체 언제 읽지? ㅎㅎ 그래서 글을 남긴다.
서양철학사는 힐쉬베르거, 서양미술사는 곰브리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