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데뷔 햇수로 30년을 맞은 시인 허연의 다섯번째 시집. 더러운 거리와 가난한 사람들, 병듦과 죽음을 한껏 끌어안고 북회귀선으로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시인. 그가 이제 더욱 진솔하고 담백한 언어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허연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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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 어떻게 시작해 볼까요?
요약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 시인선 542) (허연 시집) 내용 요약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는 허연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으로, 2020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542번으로 출간되었다(ISBN: 9788932037479). 📖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허연은 1995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로 90년대 청춘의 불온한 감성을 대변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13년의 침묵 끝에 2008년 『나쁜 소년이 서 있다』로 돌아온 그는 이후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를 통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시야로
세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거기에 분명히 저는 존재하지만
세상도 거기 있다는 것이 가득 느껴집니다
.
사물의 핵심을 날렵하게 크로키하듯 뽑아내지만, 그 순간 사물도 시인의 내면을 내시경 카메라로 찍듯 찰칵 찍어낸다. 시를 쓸 때 대상에게 나를 들 킬 때가 행복하다는 것을 아는 듯하다.
그런 것들이다 내가 아쉬운 건
트램펄린에 오를 때
나는 이미 처지가 정해져 있었고
그걸 누구에게 묻지는 못했고
트램펄린 밖으로 떨어진 소년
최선을 다해서 태연하고 최선을 다해서 일어서는 소년
그런 것들이다 언제나
어른들은 타협하고 소년들은 트램펄린에서 떨어지고
그런 것들이다 내가 아쉬운 건
하지만
트램펄린에 오를 때
이미 준비된 실패라는 걸 알았고
예정된 마지막 장면을 후회하지도 않았고
그냥 트램펄린이란 트램펄린은 모두 불태워졌으면 좋겠다
자꾸 오르게 되니까
또 최선을 다해 떨어질 테니까
떨어질 처지라는 걸 아니까
트램펄린에 날 던지면서 말한다
“말해줘 가능하다면 내가 세상을 고르고 싶어”
생각이 있으면 말해주리라 믿었지만
트램펄린은 그냥
나를 떨어뜨리고
미워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떨어뜨리고
그러면 내 처지도 최선을 다해 떨어지고
세상에서 트램펄린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아쉽다
날아오르는 몇 초가 달콤했기 때문에
- ‘트램펄린’, 허연
변심한 기억은 지금 다른 곳에서 한창 바쁘고
망각은 문자도 보내지 않고
어쨌든 최악이 아니었다는 듯
문자 한 줄 할 줄 모르고
내가 사연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사연에 누가 울었는지
기억은 나도 모르는 곳에서 바쁘고
기억을 조각낸
그 가위는 어떻게 왔을까
실타래를 잘라버린 가위는 어떻게 내게 왔을까
혈관이 따뜻해지는 순간
나는 가위를 들고 또 잠이 들고
잘려 나간 기억들은
어떻게 의문 하나 없이 그곳에서 바쁠 수 있는지
어떻게 잊을 수 있는 거지 장대비를 피하던 낡은 집들을 항구에 피신했던 목선들을•••••• 나에게 닿기 위해 놀라울 만큼 멀리서 왔던 빛을
잠만 들면 내 손에는 가위가 있고
깨고 나면 베고니아의 목이 잘려 있고
내 정원은 텅 비어 있고
기억은 또 날 버리고
기억은 기억들하고만 친구가 되어 있고
망각은 문자도 보내지 않고
- ‘기억은 나도 모르는 곳에서 바쁘고’, 허연
빼다 박은 아이 따위 꿈꾸지 않기. 소식에 놀라지 않기. 어쨌든 거룩해지지 않기. 상대의 문장 속에서 죽지 않기.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는 연습을 하자. 언제 커피 한잔하자는 말처럼 쉽고 편하게, 그리고 불타오르지 않기.
혹 시간이 맞거든 연차를 내고
시골 성당에 가서 커다란 나무 밑에 앉는 거야. 촛불도 켜고
명란파스타를 먹고 헤어지는 거지. 그날 이후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돌진하는 건 재미없는 게임이야. 잘 생각해. 너는 중독되면 안 돼.
중독되면
누가 더 오래 살까? 이런 거 걱정해야 하잖아.
뻔해,
우리보다 융자받은 집이 더 오래 남을 텐데,
가끔 기도는 할게. 그대의 슬픈 내력이 그대의 생을 엄습하지 않기를, 나보다 그대가 덜 불운하기를, 그대 기록속에 내가 없기를.
그러니까 다시는 가슴 덜컹하지 말기.
이별의 종류는 너무나 많으니까. 또 생길 거니까.
너무 많은 길을 가리키고 서 있는 표지판과
너무 많은 방향으로 날아오르는 새들과
너무 많은 바다로 가는 배들과
너무 많은 돌멩이들
사랑해. 그렇지만
불타는 자동차에서는 내리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허연
애인은 불법 개조한 3층에 살았다
옆방에선
커다란 무대의상 가방을 들고 귀가한 여자가
노래방 테이프를 틀어놓고 새벽 내 울었다
잠이 깬 나는
쥐 오줌으로 얼룩진 벽지 위에
“들뜬 피”라고 적었다
신도 가난뱅이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해가 중천에 뜨면 애인은
사발면에 물을 붓고 나를 깨웠다
창문을 열면 북국의 바람이 폐 속으로 들어왔다
자취촌에는 사복들이 서성거렸고
밥 타는 냄새가 나던 어느 저녁
나는 원고지 칸을 무시한 채
짐승의 시간들을 적어야 했다
돈이 생기면 아나고회를 사 먹었다
애인은 젓가락 끝으로 초고추장을 찍어 먹으며
동백이 지천이라는 고향 섬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나면 애인은 한 사나흘 아팠다
지리멸렬했다
도서관에서 훔쳐 온 책을 재독하거나
너덜거리는 속옷을 빨고 또 빨았다
가끔 크고 붉은 우표가 붙은 엽서가 배달됐다
저녁마다 우리는 패배만 했다
나는 좆도 아니었다.
나는 좆도 그 무엇도 아니었으므로
봄날은 갔다고 말하지 못한다
도무지 되는 일이 없었던 우리는
늘 깊게 잠들지 못했다
- ‘80년대’, 허연
노년기 산 능선에 걸린 구름. 시효 지난 현수막의 마지막 분투. 피뢰침에 걸린 직박구리 깃털과 그보다 가벼운 이데올로기. 위태롭게 쌓아놓은 호프집 의자에 반사되는 생.
매일 찾아오는 영안실. 지루하고 가난한 것들에게 자비를. 너의 상처로 나를 살게 하라. 도시여.
그렇게 살아남은 자의 손에 들린, 2천 원짜리 테이크아웃 커피를 스쳐 가는 햇살.
경광등 앞의 생.
- ‘세상의 액면 2’, 허연
용인 화장터 화구에 당신을 밀어 넣고 온 날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신발처럼
당신이 끝을 보낸 방에서
반나절이나 엎어져 있었어요
과묵한 후배는 자꾸 어디론가 나가선
소주를 두 병씩 사 들고 왔어요
오래 전에 말라 죽은 화초들과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만든
손금 닮은 무늬와
순장된 유물처럼 흩어져 있는 고지서들
돌아갈 때를 놓친 새처럼
당신의 방에 앉아 들어요
모든 게 분해될 때나 들릴 것 같은
신비스러운 이명耳鳴을
방 한가운데까지 치고 들어온 햇살은 성스럽기만 하고
영혼 한 개
먼지에 섞여 하늘로 올라가는 게 보여요
뭘 챙기고 뭘 버려야 하는지
그걸 알 수 없어서 우린
자꾸 눕기만 하고
창밖 주인집 사철나무 잎은
계시처럼 반짝이고
- ‘남겨진 방’, 허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