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nah님이 이 책을 읽었어요
3일 전
문학에서 '역사', '사랑', '인간'과 같이 거대한 주제는 다루어지는 것만으로도 뭔가 슬픈 느낌이 든다. 인간이 수천 년 동안 쌓아 놓은 그것들의 무게 때문이 아닐까 싶다. 1968년 프라하의 봄과 네 남녀의 사랑을 다룬 이 소설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지만, 그 무게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과 같이 놓고 보려고 시도한 작품이란 점에서 특별하다. 그래서 묘한 자유와 풍자가 느껴지고, 인간사의 구석구석을 작가와 함께 탐구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이 소설에서 메인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토마시와 테레자라는 두 남녀의 사랑이다. 냉정하게 보면 그냥 바람기 못 버리는 남자와 그를 못 떠나는 답답한 여자- 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만 읽으면 영 재미없을 것이다. (내가 사랑을 자꾸 글로만 배우는 느낌은 있지만) 이 소설에서 두 사람의 사랑이 그려지는 방식에는 그 이상의 매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단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반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더구나 토마시 같은 바람둥이가 한 여자에게 책임감을 갖게 되는 경우 말이다. '그냥 운명이다' 라든지, '예뻐서', '착해서' 같은 일차원적인 설명은 현대소설에서는 용납하기 어렵다. 토마시와 테레자의 만남 자체는 일단 우연이 맞다. 그것도 딱히 낭만적인 우연이 아니라, 토마시네 병원 과장의 좌골신경통 같이 별 것 아닌 우연, 왠지 숫자 6이 계속 나타나는 우연, 타이밍 좋게 라디오에서 베토벤이 흘러나오는 우연이다.
그런 별것 아닌 우연에 토마시는 비유를 달고 만다. 테레자가 '바구니에 담겨 흘러온 아기' 같다고. 그 비유가 토마시의 '시적 기억' 에 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무게를 갖게 되었다. 사랑의 시작에 대한 이런 설명이 좋았다. 이 외에도 쿤데라는 이 소설을 통해 사랑의 많은 측면을 알아보려고 한 것 같다. 인간이 섹스와 사랑을 연결시키는 것은 이상하다든지, 반려견에 대한 사랑이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고차원적이라든지 하는 신박한 가설들이 등장하는데 이상하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또 다른 주인공인 사비나 역시 재미있는 캐릭터다. 사비나는 모든 '키치'를 혐오하는 예술가로, 가족에게도 애인에게도 조국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궁극적인 '가벼움' 을 추구한다. 이것이 다라면 사비나라는 인물은 범접하기 힘든, 보통 사람들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일종의 아이콘이다. (프란츠 눈에 비친 사비나가 어느 정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비나라는 인물에게서 깊이를 느낀 것은, 그녀 역시 본성에 키치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비나는 '단란한 정상가족' 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것을 보면 슬퍼하고, 피붙이 없는 미국 땅에 묻히기를 두려워한다. 자신이 그렇게 답답하게 생각하고 밀어낸 모든 것들에 미련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이 소설에서 대단하다고 생각한 점이 바로 그런 이분법의 파괴이다. 책의 첫머리 부분에서, 토마시 또한 테레자에 대해 그런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가까이 하자니 부담스럽고, 밀어내자니 그립고, 다시 찾아가자마자 또 피곤하고. 정치도 마찬가지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민간인을 도청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명백히 부정적으로 그려지지만, 그런 공산당에 맞서는 사람들 역시 위선적이고 권위적으로 구는 면이 있다. 이 소설의 세계는 현실과 마찬가지로, 정말 답이 보이지 않는 세계다.
이런 부분에서 나는 쿤데라의 역사관을 좀 알 것 같기도 했다. 공산주의도 파시즘도 종교도 민주주의도 전작에서 말했듯이 '농담' 이요, 속 빈 '키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알 수 없다. 그러나 역사란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번이기 때문에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것이고, 우리의 모든 고통과 사랑을 품어주는 것은 그 가벼움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분명하게 결론 짓지 않아서 (그렇게 하는 것은 또 다른 키치일 테니까) 이 소설이 좋았다. 작가가 예의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을 썼다기보다는, 쓰면서 역사란 무엇이고 인생은 무엇인지 일종의 사고 실험을 해 보려고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작가의 창작 과정이 소설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도 문알못이지만 일종의 소격효과 같은 느낌이 나서 흥미로웠다. 이러나저러나 답을 주진 않지만 독자의 시야를 넓혀주는 듯한 책이다.
이 소설에서 좀 아쉬운 점이라면 주인공 네 사람 가운데 테레자만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토마시, 사비나, 프란츠의 '사랑', '키치', '대장정' 에 대한 태도는 어느 정도 공감이 되는데, 테레자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주제인 '영혼과 육체'는 너무 형이상학적인 내용이라 그런지 잘 와닿지가 않고 테레자의 행동도 일관성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런 소설은 두세 번은 더 읽어봐야 할 것 같으니 그때가 되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네 남녀의 사랑을 통해 바라본 삶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