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설에 가장 강렬하게 새겨질 새로운 여성 서사를 탄생시킨 구병모 작가의 《파과》가 새 옷을 갈아입었다. 40여 년간 날카롭고 냉혹하게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아온 60대 여성 킬러 ‘조각(爪角)’. 몸도 기억도 예전 같지 않게 삐걱거리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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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리커버) 내용 요약
《파과 (리커버)》는 구병모 작가의 장편소설로, 위즈덤하우스에서 2018년 4월 재출간되었다. 📚 원래 2013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60대 여성 킬러 조각(爪角)을 주인공으로 한 독특한 여성 서사로, 뉴욕타임스 주목할 만한 책 100선에 선정되며 국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344쪽 분량의 이 소설은 청부 살인이라는 강렬한 소재와 섬세한 심리 묘사를 결합해, 노화와 고독 속에서 변화를 겪는 한 인간의 삶을 깊이 탐구한다. 2025년 이혜영 주연의 영화로도 개봉하며 다시 화제가 된 이 작품은,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것은 나이 듦에 대한 이야기였다. 작품에서는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을 신체적인 변화에만 한정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과정으로 보여준다. 조각 역시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능력과 몸의 변화를 체감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젊었을때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면서 자신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달라진다. 조각이 자신의 나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주변의 시선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느꼈다. 특히 조각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부분이 더욱 두드러진다. 나이 든 여성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과 젊음에 대한 기준을 생각하면, 조각이 자신의 나이와 외모, 신체적 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더욱 복잡하게 다가온다. 그녀가 느끼는 불안이나 상실감 역시 개인적인 감정으로만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이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처럼 취급하는 사회의 시선이 그 안에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각의 직업과 생명을 바라보는 태도가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묘한 아이러니를 느꼈다. 수많은 사람의 죽음에 관여하며 살아온 조각이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느끼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평소라면 스쳐 지나갔을 낯선 사람들의 삶까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점이 특히 인상 깊었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아온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면서 삶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그 과정에서 조각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장면들도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느끼면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왔는지,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평생 살아남는데 집중했던 사람이 자신의 삶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갈지는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각의 변화가 의미 있게 다가왔다.
죽음은 조각에게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자신의 끝을 생각하게 되면서 타인의 삶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지금까지의 선택을 되돌아보게 된다. 결국 조각에게 남은 시간이 줄어들수록 오히려 삶을 바라보는 시야는 넓어진 셈이다. 그래서 파과를 읽고 난 뒤에는 나이 듦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잃게 되는 것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조각은 오랜 시간 동안 한 가지 방식으로 살아왔지만 자신의 삶이 끝에 가까워진 순간에도 다른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감정을 받아들이며 변해간다. 삶을 돌아보는데 정해진 시기는 없으며, 늦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새로운 선택은 가능하다는 점이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오래 남았다.
영어에는 ‘sonder’라는 단어가 있다. 지나치는 모든 낯선 사람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복잡하고 사적이며 감정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의미. 이것이 파과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람을 더 이상 개별적인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조각은 붐비는 기차 안을 거의 아무에게도 인식되지 않은 채 지나간다. “항목이 분류되지 않은 폐지처럼 인식에서 치워버린다. 또는 인식 자체를 처음부터 하지 못한다.”
아주 디테일하게 묘사된 배경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어휘 선택 평범한 장면을 낯설게 만든다. 조각은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며, 마치 쓰레기처럼 사람들의 의식에서 간단히 치워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비가시성은 그녀가 유능한 암살자가 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사회가 이미 노년의 여성인 그녀에게 부여한 것이기도 하다.
처음에 조각은 사람들이 자신의 쓸모에 따라 평가되는 세계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방역은 이런 식이다. 누가 왜 이것을 원하는지 묻지 않는다. [...]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또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된 데 대해 카프카적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암살을 묘사하는 완곡한 표현은 도덕적 거리를 만들어낸다. 대상은 더 이상 역사와 관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제거되어야 하는 해충이 된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주인공의 변신이 한 사람이 얼마나 빠르게 사회적 가치를 잃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듯, 소설은 누군가가 타인의 눈에 얼마나 빠르게 ‘해충’이 되는지를 질문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조각 결국 같은 시스템에 취약해진다. 나이가 들면서 그녀의 몸은 느려지고 신뢰하기 어려워진다. 고장 난 냉장고는 조각 자신을 상징하는 은유가 된다. 여전히 작동하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점점 ‘단종된’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조각은 평생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았고,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버려질 위험에 처한다.
그리고 조각은 자신이 배운 모든 초연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타인에게 애착을 갖게 된다. 강 박사이나 아저씨처럼 사람들을 돕기 시작하면서, 조각은 자신이 평범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럽다고 여길 연민이 그녀에게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너무 오랫동안 연민을 느끼지 않도록 자신을 훈련해왔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그녀의 인간성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돌아오고 있어 더 이상 억누를 수 없게 된다. 그녀가 ‘무용’이라는 이름을 붙인 강아지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에도, 살아 있는 존재를 불쌍히 여겼다고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한다. 대신 그 결정을 생물학적 본능으로 정당화하며 합리화한다.
“어째서 이런 중요한 순간에 목표물을 놓치고 타인을 도와버렸을까. [...] 지금은 지나치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조각은 자신의 행동과 순간마다의 판단이 보통 사람들의 것과 같은 차원에서 자꾸만 맴돌려 함을 감지하며 초조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혀를 찬다.”
투우는 조각의 내적 갈등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그녀에게 불리하게 이용한다. 조각은 자신이 없애야 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 그녀는 제거해야 할 “목표물”과 “인간”, 즉 살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 사이에 거리를 둘 수 없게 된다.
투우 역시 자신의 삶을 그저 우연히 흘러온 것으로 묘사한다. “그야말로 어쩌다 보니 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조형과 부착으로 이루어진 콜라주였고 지금의 삶은 모든 어쩌다 보니의 총합과 그 변용이었다.”
조각과 투우는 모두 타고난 살인 욕구가 아니라 우연한 상황을 통해 이 세계에 들어왔다. 이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라는 단순한 구분을 복잡하게 만든다. 투우의 삶 역시 조각의 삶처럼 수많은 사건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투우는 조각이 평범해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고, 그녀에게 집착하게 된다. 그는 조각이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괴물, 바로 그 여자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여자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라면, 그녀는 자신의 슬픔과 원망을 억누르기 위해 하나의 의미 없는 존재로 축소하기가 훨씬 어려워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투우는 조각이 평범해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괴물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녀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라면, 그는 그녀를 자신의 슬픔과 원망을 위한 하나의 존재로 축소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sonder가 투우에게 다시 돌아온다.
“그는 이 순간의 위안이 광대한 고통 가운데 찍힌 점 하나에 불과하며, 결국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필연적인 과정임을 안다. 이제 그의 삶에서 어떤 부분들이 스쳐 지나갈까? 그것들이 그의 앞에서 하나씩 풀려나간다.”
조각은 자신이 그의 어린 시절 가정부였을 때 알았던 투우의 아주 사소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들 사이의 마지막 인식은 한 사람의 삶을 이루는 작은 세부사항이다. 투우 역시 기억과 선택, 사소한 일들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사적인 삶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복수를 원했던 남자로만 축소될 수 없으며, 조각 역시 늙은 암살자로만 축소될 수 없다. 마지막에 조각은 타인을 돌보고 자신의 삶을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사랑할 수 있고, 남은 한 손의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지극히 평범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sonder’를 통해 파과는 사람을 쓸모 있는 존재와 쓸모없는 존재,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 살인자와 피해자,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과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으로 분류하고 축소하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한다. 인간인 우리는 모두 결국 육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무너지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사라진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하나의 존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혼이라는 게 빠져나갔는데도 육신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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