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시 전문지 「시인」에 시를 발표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박남준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적막>(2005) 이후 거의 5년 만이다. 이전 시집을 '사회현실에 대한 단호한 인식과 섬세한 서정'으로 평가할 수 있다면, 이번 시집은 자연을 더 닮아가는 과정 속에서 '마음의 성숙한 진화'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꽃이 피어나는 건
당신을 향한 내 사랑 때문이다
지금 별똥별이 반짝이는 건
이 밤 당신께 보내는 연분홍 편지를 전하려는 것이다
산들이 푸른 숲으로 샘물을 품고 있는 것
강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인생의 나침반을 삼으라고
당신이 내게 보여주는 선물인 것이다
- ‘최대의 선물’, 박남준
빈 들녘 바라본다
오래도록 앉아 있거나 혹은 서성거리듯 걷는다
거기 돋아나는 소리,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연둣빛 물들이는 봄날의 노래가 있다
습기들의 장마와 무더운 햇살과 뜨거운 사랑 훅훅거리던
여름 거친 숨소리가 있다 땀 흘려온 것들이
고요히 익어가는 시간, 대지를 금빛 경이로 물들이며
겸손한 알곡들이 세상의 생명들에게 경배하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빈 들녘, 어찌 엎드려 절하지 않겠는가
한 그루 나무가 태어나 살아서는
지친 이들을 쉬게 하는 시원한 그늘과 향기로운 열매,
바람과 새들의 노래뿐일까 아낌없이 온몸 다 내어주는
나무처럼 남김없이 비워낸 빈 들녘에
그 수고로운 시간 알고 있다는 듯 첫눈을 뿌린다
소복소복 하얀 눈, 산에도 들에도 저 마른 풀꽃 위에도
이 겨울 쓸쓸한 것들 조금은 따뜻해지라고
- ‘첫눈과 빈 들녘’, 박남준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대의 곤한 날개 여기 잠시 쉬어요
흔들렸으나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작은 풀잎이 속삭였다
어쩌면 고추잠자리는 그 한마디에
온통 몸이 붉게 달아올랐는지 모른다
사랑은 쉬지 않고 닮아가는 것
동그랗게 동그랗게 모나지 않는 것
안으로 안으로 깊어지는 것
그리하여 가득 채웠으나 고집하지 않고
저를 고요히 비워내는 것
아낌없는 것
당신을 향해 뜨거워진다는 것이다
작은 씨앗 하나가 자라 허공을 당겨 나아가듯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여간다는 것
맨 처음 씨앗의 그 간절한 첫 마음처럼
- ‘나도야 물들어간다’, 박남준
모처럼 동네가 흥청거렸다
우체국 앞 삼미식당도 찬새미 송어횟집도 동창회다 뭐다
밀려드는 주문에 일손이 달렸다
고작해야 경운기나 일 톤 트럭이 서 있던 길목마다
미끈한 자가용들이 줄을 지어 들어섰고
아이들이 청년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들썩거렸다
잔치는 짧다 울긋불긋
단풍 같은 고향을 매달고 사람들은 떠나갔다
마을 길은 텅 비어 해는 더 바짝 짧아지고
밤새 환하던 집들은 벌써 깜깜해졌다
늙은이들의 두런거리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 잔기침 소리 너머
꼬부랑 꼬부랑 고로롱 고로롱 풀벌레 소리
홀로 남아 등 굽은 가로등이 노인처럼 침침하다
- ‘추석 무렵’, 박남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