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은 천국이다
지옥에도 꽃밭이 있고
깊은 산에 비도 내리고
새들이 날고
지옥에도 사랑이 있다
나 이 세상 사는 동안
아무도 나를 데려가지 않아도
반드시 지옥을 찾아갈 것이다
지옥에서 쫓겨나도
다시 찾아갈 것이다
당신을 만나
사랑할 것이다
- ‘지옥은 천국이다’, 정호승
내 언제 인간을 넘어뜨렸느냐
내 언제 인간을 쓰러뜨렸느냐
나는 그냥 돌일 뿐
땅속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뿌리에 꽃을 피우는 돌의 열매일 뿐
내 언제 인간의 사랑을 방해했느냐
내 언제 인간의 욕망을 가로막았느냐
바람도 내게 걸리지 않고
낙엽도 스쳐 지나가고
함박눈도 고요히 내려앉거늘
나는 인간을 쓰러뜨리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 걸려 넘어지고
쓰러졌을 뿐
- ‘걸림돌’, 정호승
모든 기다림은 사라졌다
더 이상 기다림에 길들여질 필요는 없다
잠 못 이루는 밤도 사라져야 한다
그 어딘가에 순결한 기다림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잘못이다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더 이상 희망에 길들여질 필요는 없다
절망 따위는 더더구나 필요 없다
그 어딘가에 성실한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잘못이다
이제 봄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봄은 언제나 기다리지 않을 때 왔다
겨울은 봄을 준비하기 위하여 있는 게 아니라
겨울을 살기 위하여 있다
지금이라도 절벽 위에 희디흰 뿌리를 내려라
무심히 흰 눈송이가 솔가지 끝에 켜켜이 쌓여도 좋다
허옇게 속살까지 드러난 분노의 상처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좋다
- ‘백송(白松)을 바라보며’, 정호승
꽃이 시드는 동안 밥만 먹었어요
가뿐 숨을 몰아쉬며
꽃이 시드는 동안 돈만 벌었어요
번 돈을 가지고 은행으로 가서
그치지 않는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오늘의 사랑을 내일의 사랑으로 미루었어요
꽃이 시든 까닭을 문책하지는 마세요
이제 뼈만 남은 꽃이 곧 돌아가시겠지요
꽃이 돌아가시고 겨우내 내가 우는 동안
기다리지 않아도 당신만은 부디
봄이 되어주세요
- ‘꽃이 시드는 동안’, 정호승
당신의 미소를 한번만 더 보여주세요
내 비록 한송이 꽃과 같은 인간은 아니지만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은 인간이지만
마지막으로 당신의 미소를 보고 싶어요
그래도 어머니가 나를 용서해주셨으므로
죽기 전에 꼭 한번은
어머니가 해주시던 김치찌개 같은
당신의 미소를 맛있게 먹고
나도 이제 마지막으로 착한 인간이 되고 싶어요
존엄사는 바라지도 않아요
소신공양하지 못한 내 영안실에
미소를 띠고 당신이 슬쩍 한번 다녀가시면
내가 허공을 밟고 허공으로
올라갈 수 있을 거예요
- ‘가섭에게’, 정호승
목포역에 내리면 눈물 난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나의 슬픈 눈물인가
예전에 목포역에 내리면 대합실 가득
목포의 눈물 노랫가락이 젊은 어머니의
가슴 아픈 눈물처럼 흘러나왔는데
이제는 목포 사람들도 눈물이 다 말라
노래는 사라지고 유달산에 올라야
이난영 노래비에서 흘러나오는 녹음된 노래만
목포대교 위를 나는 흰 구름의 학이 되어
삼학도로 날아간다
어머니
돌아가신 당신의 목소리로 제 어릴 적
들려주시던 것처럼 오늘밤
목포의 눈물을 불러주세요
어머니 임종도 못 본
늙은 아들은 오늘 혼자 목포에 왔어요
어머니가 안 계신 제 인생을
이제 버릴 때가 되었어요
목포역에서 해물짬뽕 한그릇 사 먹고
목포항에 가면
이승을 떠나는 뱃고동 소리를 들려주세요
- ‘목포역’, 정호승
이제야 아침이 오지 않고 밤이 오는 까닭을 알겠습니다
당신은 사랑으로서 존재하지만 나는 배반으로서 존재합니다
하늘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허공을 버려야 하고
진리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당신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당신께서 말없이 내게 무엇을 원하셨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배반은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의 완벽한 방법일 뿐
때로는 배반도 진리에 속합니다
내 굳이 당신의 진리의 완성을 위해 나를 버렸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될 일은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이므로
내 운명을 명예롭게 끝까지 견뎌내었을 뿐입니다
이제 모든 인생에 유다가 너무 많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유다의 말을 하고 유다의 옷을 입을 것입니다
당신은 날마다 십자가에 묶여 손에 또 대못이 박힐 것 입니다
그래도 당신을 해치는 자를 가장 높이 받드는 당신은
오늘도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십니다
- ‘유다의 유서’, 정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