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짧은 시간 동안

정호승 지음 | 창비 펴냄

이 짧은 시간 동안 :정호승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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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04.5.25

페이지

154쪽

상세 정보

정호승 시인이 5년 간의 침묵을 깨고 신작 시집을 출간했다. 시집에 실린 74편의 시 중 25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작이다. 시인은 "지난 5년 동안 시를 못 쓰는 상황에 대해 비참함을 느꼈다"고 고백하면서 "나는 모든 인간에게서 시를 본다"고 말한다.

시인은 맑은 시심으로 낮은 곳에 자리한 존재들의 구체적 삶을 그려내는데 몰두한다.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의 아픔에 주목하는 시인. 그는 노숙자, 독거노인, 무릎없는 걸인... 이처럼 고통받는 이들을 특유의 상상력으로 따스하게 위로한다. 장례식장 미화원 아주머니는 영안실 바닥에 앉아 주섬주섬 꽃을 주워먹고, 한 맹인 소녀는 식물원에서 나무들이 달아준 눈을 얻는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가족과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털어놓는다. 시적 자아는 '참회'를 멈추지 않는 자이며 이미 참회한 것을 깨달음으로 이어가는 자이다. 평론가 김수이는 시인이 "인간과 새, 바닥과 산정은 같은 세계'이며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힘은 인간이며 시인의 수고"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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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재건축 아파트 철거작업이 끝나자
마지막으로 나무들이 철거되기 시작한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았는데
뿌리를 꼭 껴안고 있던 흙을 새끼줄로 동여매고
하늘을 우러러보던 나뭇가지를 땅바닥에 질질 끌고
이삿짐 트럭에 실려가는 힘없는 나무 뒤를
까치들이 따라간다
울지도 않고
아슬아슬 아직 까치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 나무 뒤를
울지도 않고

- ‘이사’, 정호승


막다른 골목에서 울다가
돌아 나온 사람들은 모르지
그곳이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음을

막다른 골목에서 주저앉아 울다가
결국 막다른 골목이 된 사람들도 모르지
당신이야말로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음을

막다른 골목에서 결국 쓰러진 사람들도 모르지
낙타가 쓰러지는 건 깃털같이 가벼운
마지막 짐 하나 때문이라는 것을

막다른 골목에 핀 민들레는 알지
사막이 쓰러지는 것도 결국은
한 마리 쓰러진 낙타 때문이라는 것을

- ‘막다른 골목’, 정호승


사람은 죽었거나 살아 있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따뜻해야 하고
사람은 잊혀졌거나 잊혀지지 않았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눈물이 글썽해야 한다
눈 내리는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누군가 걸어간 길은 있어도
발자국이 없는 길을 스스로 걸어가
끝내는 작은 발자국을 이룬
당신의 고귀한 이름을 불러본다
부도 위에 쌓인 함박눈을 부르듯
함박눈! 하고 불러보고
부도 위에 앉은 작은 새를 부르듯
작은 새! 하고 당신의 이름을 불러본다
사람들은 오늘도 검은 강물처럼 흘러가
돌아오지 않지만
더러는 강가의 조약돌이 되고
더러는 강물을 따라가는 나뭇잎이 되어
저녁바다에 가닿아 울다가 사라지지만
부도밭으로 난 눈길을 홀로 걸으며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들린다
누가 줄 없는 거문고를 켜는 소리가
보인다 저 작은 새들이 눈발이 되어
거문고 가락에 신나게 춤추는 게 보인다
슬며시 부도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내 손을 잡아주는
당신의 맑은 미소가 보인다

- ‘부도밭을 지나며’, 정호승


하모니카를 불며
지하철을 떠돌던 한 시작장애인이
종각역에서 내려
힌색 지팡이를 탁탁 두드리며 길을 걷는다
조계사 앞길엔 젊은 스님들이
플라타너스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플래카드를 내걸고
분주히 행인들에게 팥죽을 나누어준다
교복을 입은 키 작은 한 여고생이
지팡이를 두드리며 그냥 지나가는
시각장애인의 손을 이끌고
팥죽을 얻어와 건넨다.
나도 그분 곁에 서서
팥죽 한그릇을 얻어 먹는다
곧 함박눈이 내릴 것 같다

- ‘12월’, 정호승


아들을 미워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일인 것처럼
아버지를 미워하는 일 또한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일이나니
아들아 겨울부채를 부치며
너의 분노의 불씨가 타오르지 않게 하라
너는 오늘도 아버지를 미워하느라 잠 못 이루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술을 사러 외등이 켜진 새벽 골목길을
그림자도 떼어놓고 혼자 걸어가는구나
오늘 밤에는 눈이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내가 눈사람이 되어 너의 집 앞에
평생 동안 서 있었으면 좋겠다
너의 손을 잡고 마라도에서 바라본
수평선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면
지금쯤 너와 나 푸른 물고기가 되어
힘찬 고래의 뒤를 신나게 쫓아갔을 텐데
아들아 너를 엄마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일은 미안하다
살아갈수록 타오르는 분노의 더위는
고요히 겨울부채를 부치며 잠재워라
부디 아버지를 미워하는 일로 너의 일생이
응급실 복도에 누워 있지 않기를
어두운 법원의 복도를 걸어가지 않기를
나 다음에 너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다면
겨울부채를 부치며
가난한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는 아들이 되리니

- ‘겨울부채를 부치며’, 정호승


칼을 버리러 강가에 간다
어제는 칼을 갈기 위해 강가로 갔으나
오늘은 칼을 버리기 위해 강가로 간다
강물은 아직 깊고 푸르다
여기저기 상처 난 알몸을 드러낸 채
홍수에 떠내려 온 나뭇가지들 옆에 앉아
평생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낸다
햇살에 칼이 웃는다
눈부신 햇살에 칼이 자꾸 부드러워진다
물새 한마리
잠시 칼날 위에 앉았다가 떠나가고
나는 푸른 이끼가 낀 나뭇가지를 던지듯
강물에 칼을 던진다
다시는 헤엄쳐 되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갈대숲 너머 멀리 칼을 던진다
강물이 깊숙이 칼을 껴안고 웃는다
칼은 이제 증오가 아니라 미소라고
분노가 아니라 웃음이라고
강가에 풀을 뜯던 소 한마리가 따라 웃는다
배고픈 물고기들이 우르르 칼끝으로 몰려들어
톡톡 입을 대고 건드리다가
마침내 부드러운 칼을 배불리 먹고
뜨겁게 산란을 하기 시작한다

- ‘부드러운 칼’, 정호승


나의 눈물에는 왜 독이 들어 있는가
봄이 오면 봄비가 고여 있고
겨울이 오면 눈 녹은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는 줄 알았더니
왜 나의 눈물에는 푸른 독이 들어 있는가
마음에 품는 것마다
다 독이 되던 시절이 있었으나
사랑이여
나는 이제 나의 눈물에 독이 없기를 바란다
더 이상 나의 눈물이
당신의 눈물을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
독극물이 든 검은 가방을 들고
가로등 불빛에 길게 그림자를 남기며
더이상 당신 집 앞을
서성거리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살아간다는 것은 독을 버리는 일
그동안 나도 모르게 쌓여만 가던 독을 버리는 일
버리고 나서 또 버리는 일
눈물을 흘리며
해독의 시간을 맞이하는 일

- ‘사랑에게’, 정호승

이 짧은 시간 동안

정호승 지음
창비 펴냄

2019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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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정호승 시인이 5년 간의 침묵을 깨고 신작 시집을 출간했다. 시집에 실린 74편의 시 중 25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작이다. 시인은 "지난 5년 동안 시를 못 쓰는 상황에 대해 비참함을 느꼈다"고 고백하면서 "나는 모든 인간에게서 시를 본다"고 말한다.

시인은 맑은 시심으로 낮은 곳에 자리한 존재들의 구체적 삶을 그려내는데 몰두한다.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의 아픔에 주목하는 시인. 그는 노숙자, 독거노인, 무릎없는 걸인... 이처럼 고통받는 이들을 특유의 상상력으로 따스하게 위로한다. 장례식장 미화원 아주머니는 영안실 바닥에 앉아 주섬주섬 꽃을 주워먹고, 한 맹인 소녀는 식물원에서 나무들이 달아준 눈을 얻는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가족과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털어놓는다. 시적 자아는 '참회'를 멈추지 않는 자이며 이미 참회한 것을 깨달음으로 이어가는 자이다. 평론가 김수이는 시인이 "인간과 새, 바닥과 산정은 같은 세계'이며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힘은 인간이며 시인의 수고"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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