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젊은 작가 13권. 조남주 장편소설. 시사 교양 프로그램에서 10년 동안 일한 방송 작가답게 서민들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비극을 사실적이고 공감대 높은 스토리로 표현하는 데 특출 난 재능을 보이는 작가는 <82년생 김지영>에서 30대를 살고 있는 한국 여성들의 보편적인 일상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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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장편소설) 내용 요약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김지영의 삶을 통해 성차별과 불평등의 현실을 그린 장편소설이다. 📖 이야기는 2015년 가을, 서른넷인 김지영가 정신적 혼란을 겪으며 시작된다. 그녀는 갑작스레 시어머니나 지인의 목소리로 말하며,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남편 정대현은 아내의 상태를 걱정하며 정신과 상담을 권하고, 소설은 김지영의 상담 기록을 바탕으로 그녀의 삶을 되짚는다. 김지영은 1982년 서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
3년 전에 읽었던 것인데, 사실 그 때 다 읽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과 함께 책장에 넣어뒀는데, 3년이 지난 지금 다행스럽게도 완독했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영화 때문이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게 처음이었다.
평소에 사실 책을 잘 안 읽지만, 마음 먹고 내 용돈으로 책을 사봤다.
이 책의 주인공인 김지영씨는 82년생이다.
하지만 그 나이가 되어서 자신의 꿈을 놓은 채 결혼이라는 것에 놓이게 되고, 자식과의 생활에 치우치게 되었다.
읽으면서도 참 슬펐다.
나도 사실 지금 원하는 꿈이 있는데, 주인공처럼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에.
아직 결혼에 대한 생각을 하기에는 어리지만, 그래도 지금부터 내 꿈을 위해 달려가야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힘들거나 위로받고 싶을 때 읽어야지.
이 책을 이제야 읽었다니. 참 늦었다.
말이 많았던 책이라 뭔가 모를 무서움이 있었는데 딱히 그렇지 않았다.
주변에서 직간접적으로 들려오던 이야기가 단지 한 명의 인물에게 쏟아진게 안타까울 뿐 너무 현실적이어서 소설인지 잊을 정도.
문제를 조금 과격하게 드러내긴 했지만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비슷하게 다른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 보다는 현실 직시 후 문제 해결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 책이 다루는 문제 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를.
근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어렵다.
남녀차별과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으로 빚어진 수많은 문제를 한 인간의 삶 가운데 배치한 설정이 과도하게 느껴질 수 있을 테다.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삶으로 가져와 풀어내는 수법이 갖기 쉬운 문제인 것인데 소설은 이같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그로 인한 장점을 취하려 시도한다. 요컨대 시대의 전형을 한 몸에 입은 캐릭터를 보며 얻게 되는 공감이 그것이다.
소설은 김지영씨가 직·간접적으로 접한 수많은 차별의 순간에 각종 통계자료와 기사를 기계적으로 삽입해 소설의 문제의식를 강화한다. 일부 평론을 통해 지적되었듯 이러한 통계 가운데 일부는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해석 상의 오류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어느 누구도 김지영이 겪는 꾸준하고 저열한 차별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게 분명하다. 여성을 차별하는 요소가 곳곳에서 철폐되고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성평등 의식이 제고되고 있는 2017년, 그리고 2018년 한국의 오늘에서도 <82년생 김지영>이 여전히 유효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
분명한 것은 이 소설이 던진 담담하고 무거운 질문에 독자 일반이 떳떳하게 답할 수 있을 때에야 <82년생 김지영>이 고리타분하고 지루하기만 한 작품으로 여겨질 것이란 사실이다.
틀린 읽기인가, 틀린 쓰기인가?
'틀린 읽기'에서 출발해 보자. 『82년생 김지영』이 전유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은 이 소설의 사회학적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임금 격차의 원인이 정말 성차별적 구조인가?" 이에 대해 '맞는 독자'는 아마 이렇게 응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이러한 응답을 보아 왔다.) "중요한 것은 정량적 지표, 합리적(이라고 주장되는)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여성들의 차별 경험과 인식이다. 이것은 소설이며, 이 소설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학적 가설의 검증이 아니라, 공통의 감각을 경유한 여성들의 연대와 그것을 통한 정치적 의제화에 있다." 그런데 이것이 소설이기 때문에 행해지는 비판에 대해서는 반대로 사회학적/인류학적 방어가 가능해진다. "길거리에서 '맘충' 소리를 듣는 것이 뜬금없고, 작위적이고, 개연적이지 않다." "현실이 곧 개연성이다. 소설의 내적 논리로는 납득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게 현실이고, 그러한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절절히 공감되는 대목이다."
상술한 비판들은 『82년생 김지영』의 문제제기의 핵심을 다소 비껴 간 '트집 잡기'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답변들도 어느 정도는 편의적으로 들린다. 이것은 사회학이나 인류학 서적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답변과, 이것은 그냥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답변이 때에 따라 선택적으로 동원되는 현상은, 문학을 특정한 방식으로 전유한 결과인 것은 아닌가? 확실히 『82년생 김지영』의 스타일은 '소설적'이지 않다는 비판들이 줄곧 제기되어 왔다. 물론 그러한 스타일 덕분에 아마 이 소설이 텍스트를 넘어서 공론장으로 기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정한 스타일이 특정한 '틀린 읽기'의 생성과 관계 있어 보인다면, 그러한 독해들을 '틀린 읽기'로 치부하는 것 이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 이렇게 볼 때 『82년생 김지영』으로부터 일종의 지적 게으름을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여성주의 담론의 계기를 제공했으니 그걸로 됐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예컨대 이런 질문이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에 '동의'할지 말지를 함부로 논할 '자격' 없는 남성들의 '비생산적인' 독해가 틀린 것이라 간주할 때, 그러한 판단의 준거는 어디에서 오는가? 여성으로서의 삶이라는 '문학적 자원'을 갖고 있는, 또는 비관습적 방식으로 텍스트를 읽는 법을 교육기관에서 훈련받은 독자들이 '뭣모르고' '못 배운' 남성들의 독해를 오답 취급하는 데에는, 지식을 둘러싼 권력 구조와 억압의 재생산에 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한편으로, 『82년생 김지영』은 여성들에 대하여 비폭력적인가? 소설로써 현실을 그렸다고 주장하지만, 르포가 아닌 소설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현실의 여성들 대신 가상의 집합적인 개인을 그림으로써 '덜 현실적으로' 그릴 가능성이 허용되는 것을 안전장치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이 또한 『82년생 김지영』의 특징적 스타일에 관련한 문제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재현 방식은 여성 독자에게 근원적인 수준에서 불만족스러울 수 있다. 여성의 삶을 표준화하여 균질적인 것으로 만들어 제시하는 거대서사의 논리를 따를 때, 개별 여성의 경험이 지닌 고유성은 훼손되거나 소외되기 십상이다. ... 또한 김지영의 삶을 인위적으로 구획하고 해당 시기를 대표할 만한 주요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삶을 좀먹는 불안과 분노, 두려움과 공포, 슬픔과 우울 등 연속적 관점에서 세심하고 깊이 있게 탐구돼야 할 감정들은 단순하고 일시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신샛별의 비평은 페미니즘적 시각에서도 『82년생 김지영』이 비판받을 이유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는 이어서 이렇게 쓰고 있다. "... 김지영의 개별성은 번번이 지워지는데, 이렇게 지워진 개별성의 자리에 여성 독자는 스스로 김지영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체험과 그 체험에 응결돼 있는 감정들을 능동적으로 발굴해 기입하고 있다. 다시 말해 『82년생 김지영』이 프레카리아트 여성의 대표서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여성 독자의 더 읽기/더 쓰기를 북돋우는 재현 방식으로 일종의 참여를 유발하기 때문이지, 이 소설이 그 자체로 여성의 삶을 충분히 적확하게 재현하고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로써 그의 작업은 『82년생 김지영』의 '흠결'로 지목되던 스타일을 매개적 가치로 전환한다.
소설이 어떠해야 하는가, 여성이 어떻게 재현되어야 하는가, 그러한 재현이 어떻게 읽히고 다시 쓰여야 하는가에 관한 규범적 주장들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규범이 절대화될 때 "『82년생 김지영』은 틀린 미학의 소설"이라거나 "이 소설에 대한 뭇 남성들의 반응은 무지와 빻음의 소치"와 같은 결론이 더 신중하고 열린 사유를 거치기 전에 도출된다. 『82년생 김지영』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예컨대 남성을 근원적으로 여성과 연대 불가능한 존재로 그림으로써 적대에 기반한 연대를 지향하기 때문에 비판받을 수 있다. 물론 이 적대는 개별 남성들을 넘어 사회 구조를 겨냥하고 있지만, 2023년의 독자는 여기에 덧붙이는 다른 읽기를 통해 이 책의 문제제기를 조심스럽게 전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덧붙임이란, 우리 모두는 (그러니까 여성들끼리도) 자아의 구조 상 서로에 대해 근원적으로 타자이며 진정한 상호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남성인 정신과 의사는 주체의 시선으로 객체화한 김지영을 "이해"했다는 바로 그 자부심 때문에 연대의 가능성에서 자기도 모르게 멀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남성'은 실제 세계의 남자를 지시할 뿐 아니라 세계와 타인에 대한 특정한 사유 및 관계 설정의 방식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그것의 대안을 '여성적' 관계 맺음이라고 임시로 명명할 수 있다면, 이것이 우리 모두의 삶에 필요하다는 지적이야말로 페미니즘적 사유의 중요한 결실 중 하나다.
나는 '틀린 읽기'와 '틀린 쓰기'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아직)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식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은 대개 틀려 보였던 무언가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로 수렴하는 것 같다. 『82년생 김지영』은 열린 문학장에서의 텍스트와 세계(의 독자들)의 관계 맺음을 여전히 사유케 하는 소설이고, 그런 이유에서도 지속적으로 진지하게 읽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