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 <눈길>, <당신들의 천국> 등 우리 시대의 한과 아픔을 사랑과 화해로 승화하려 한평생 고뇌한 작가 이청준. 2008년 7월에 타계한 소설가 이청준 선생의 문학을 보전하고 재조명하고자 문학과지성사에서 새로운 구성과 장정으로 준비한 '이청준 전집' 2권으로, 초기 중단편소설들을 발표순으로 모았다. 양장본.
“지난봄 갑자기 세상을 등지고 만 민태준 형은, 그가 이승에 있었다는 흔적으로 단 한 가지 유물만을 남겨놓고 갔었다.”
<매잡이>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이 첫 문장을 읽을 때부터 이 소설이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이나 한 명의 매잡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화자인 ‘나’는 매잡이 곽서방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다시 그 소설을 쓰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며, 그 뒤에는 자신을 곽서방에게로 이끌었던 민태준의 삶까지 포개놓는다.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를 품고, 그 안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가 태어난다. 처음에는 이런 구조가 형식적인 장치처럼 보였지만, 다 읽고 나니 오히려 이 겹침 자체가 소설이 말하고 싶은 것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지는 것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고, 그 기억은 다시 이야기가 되어 또 다른 사람에게 건너간다.
곽서방은 이미 시대가 버린 매사냥이라는 기예를 끝까지 붙들고 살아간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매를 하늘로 풀어주고 스스로 곡기를 끊는다. 민태준 역시 비슷하다. 평생 자신을 소설가라 여기며 수없이 취재하고 기록했지만 정작 한 편의 소설도 완성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역시 어느 순간 스스로 삶을 멈춘다.
두 사람의 죽음이 유난히 닮아 보였던 것은 그것이 병이나 사고처럼 외부에서 닥쳐온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붙들고 있던 세계와 현실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졌을 때 스스로 멈추는 쪽을 택한다. 곽서방에게 그것은 매사냥이었고, 민태준에게 그것은 끝내 쓰이지 않는 소설이었다. 세상은 이미 다음 시대로 건너가고 있는데 두 사람만은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에게 죽음은 삶을 포기하는 일이기보다, 더 이상 자기 방식으로 살 수 없는 세계와 타협하지 않는 마지막 선택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그중에서도 나는 민태준에게 오래 마음이 갔다. 그는 소설가이면서 소설을 쓰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쓰기 직전의 상태에서 평생을 보낸다. 소재를 찾고, 사람을 만나고, 조사하고, 기록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끝내 작품이라는 형태로 굳어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 삶을 미완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읽을수록 반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대개 결과물이 있어야 비로소 어떤 행위가 완성되었다고 여긴다. 쓰지 못한 소설은 실패한 소설이고, 발표되지 않은 글은 존재하지 않는 글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민태준에게 창작은 애초에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대상을 오래 들여다보고, 그것을 이해하려 애쓰고, 사라지기 전에 기억 속에 붙잡아두는 일. 그 과정 자체가 이미 그의 문학이었을 수도 있다.
오히려 소설을 완성하는 순간 그가 바라보던 세계는 하나의 이야기로 고정되어버린다. 살아 움직이던 사람은 인물이 되고, 무수한 가능성을 품고 있던 현실은 몇 장의 문장 안에 갇힌다. 그런 의미에서 민태준은 쓰지 못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완성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바라본 세계를 훼손하지 않으려 했던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작가였겠지만, 어쩌면 그에게는 평생 이어진 취재와 기록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작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곽서방과 민태준을 나란히 놓고 보면 이 소설이 묻는 질문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반드시 결과로 남지 않아도 어떤 삶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끝까지 지키는 일에도 가치가 있는가.
곽서방의 매사냥은 더 이상 쓸모 있는 기술이 아니었고, 민태준의 기록은 끝내 한 권의 소설이 되지 못했다. 세상의 기준대로라면 두 사람의 삶은 비효율적이고 무성과하며, 어쩌면 실패에 가깝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이상할 만큼 그들의 실패를 초라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순간에도 자신이 선택한 방식에서 물러서지 않는 태도에 어떤 존엄을 부여한다. 쓸모가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버리지 않는 것,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시간을 부정하지 않는 것. 나는 그 고집 속에 이 소설이 지키고 싶었던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화자인 ‘나’ 역시 결국 그들과 완전히 다르지 않다. 그는 이미 죽은 민태준을 기억하고, 민태준이 찾아낸 곽서방을 다시 소설 속으로 불러들인다. 곽서방의 매사냥이 사라지고, 민태준의 삶이 끝난 뒤에도 화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쓴다. 그렇게 보면 이 소설의 액자 구조는 단순히 이야기가 이야기를 감싸는 형식이 아니다. 한 사람이 사라진 것을 다른 사람이 붙잡고, 그 사람마저 사라지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기록하는 과정에 가깝다.
물론 기록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을 완전히 구할 수는 없다. 기록 역시 언젠가는 잊히고, 이야기도 결국 시간 속에서 희미해진다. 하지만 <매잡이>는 바로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쓰는 쪽을 택한다. 완전히 붙잡을 수 없다는 이유로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동안만이라도 이름을 불러주는 것. 어쩌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인지도 모른다. 이미 사라진 것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한때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조금 더 오래 남겨두는 일.
책을 덮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내가 붙들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게 됐다. 지금은 무엇이든 효율과 결과로 설명해야 하는 시대다. 얼마나 빨리 끝냈는지, 무엇을 만들어냈는지, 그것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가 삶의 가치를 증명하는 숫자처럼 따라붙는다. 그런 세계에서 곽서방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기예에 평생을 바치거나, 민태준처럼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준비에 생을 쏟는 사람은 쉽게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나니 그 어리석음이 꼭 패배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인간에게는 쓸모와 상관없이 끝까지 놓고 싶지 않은 것이 하나쯤 필요할지도 모른다. 세상이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아도, 아무런 결과로 돌아오지 않아도, 그것을 붙들고 있는 동안만큼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잊지 않게 해주는 것.
곽서방에게는 그것이 매였고, 민태준에게는 끝내 쓰이지 않은 소설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사람은 자신이 끝까지 놓지 못한 바로 그것으로 가장 오래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