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갈 사람

김중일 지음 | 창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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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29

페이지

176쪽

이럴 때 추천!

이별을 극복하고 싶을 때 , 외로울 때 읽으면 좋아요.

#고독 #시집 #외로움 #지루

상세 정보

사는게 지루하고 고독한 이들에게
신선하고 낯선 경험을 선물하는 책

창비시선 388권. 감각적인 언어와 환상적인 이미지가 어우러진 독창적인 시세계로 주목을 받아온 김중일 시인의 세번째 시집. 신동엽문학상(2012)과 김구용시문학상(2013) 수상작 <아무튼 씨 미안해요>(창비 2012)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상 이상의 '농담 같은 일들이 끝없이 일어나는 세상'을 향해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거짓된 눈물의 역사'로 얼룩진 모순투성이의 현실을 냉철하게 꿰뚫어보는 치열한 의식이 담긴 시편들이 공감을 자아내는 한편, '잊지 말 것은 잊지 말자고' 다짐하며 '잊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창작자로 살게 해달라고'(시인의 말) 기도하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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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람 지평선 왼쪽 맨 가장자리에서 공기로 빚은 얼굴만 한 빵을 한입씩 나누어 베어 물듯 고요하게
왼쪽 맨 가장자리가 지구 한바퀴 돌아 오른쪽 맨 가장자리를 따라잡기까지 순식간에

실업한 두사람 발치에 떨어진 풍선을 몰래 들듯 가만히
두 손으로 서로의 얼굴을 들고 온몸 부풀어 떠오르도록 입 맞대고 서로를 숨처럼 서로에게 불어넣고

어느새 달아오른 살갗 주름진 표정을 뒤집어쓴 두사람
온몸을 서로에게 구겨넣고 이제 멀리 떠나버리려는 듯 마지막으로 키스하는 두사람
서로의 몸속에 각자 온몸을 다 쏟아붓자 사라진 두사람
눈앞에 남은 건 한주먹의 투명한 적막뿐

적막을 걷고 맨 앞으로 등장하는 두사람
숨소리로 빚은 얼굴만 한 빵을 한입씩 베어 먹듯 막 키스를 시작하는 두사람

- ‘키스의 시작’, 김중일


단 한 번 우리는 술잔을 부딪쳤고 비웠고 멀리 던져 깨버렸다. 여독 속에 내 무릎을 훔쳐 베고 잠든 너의 두 눈은 길고 아름다운 속눈썹에 덮여 있다. 꿈을 꾸고 있다는 건 꿈을 빌리고 있다는 것. 너의 감은 눈은 달빛에 깊이 찔린 상처 같다. 너의 긴 속눈썹은 너라는 하얀 주머니를 급기야 꿰맨 자국이다. 감은 눈의 너. 지금 여기 내 무릎을 벤 너라는 주머니 속에는 나와 같은 부피의 죽음이 밀주(密酒)처럼 가득하다. 나는 누가 볼까봐 황급히 너의 눈을 두 손으로 꼭 틀어막았다. 내 손바닥의 수면 아래서 새파란 꿈들이 치어처럼 일렁이는 감은 눈으로 너는 우리가 기대앉은 나무를 보았다. 나무가 흔들리는 건 나무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건 바람이 기억한다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옆을 돌아봤을 때 번번이 거기에 없는 것은 그냥 이제 없는 것이다. 너의 눈에 가만히 입술을 대고 너의 이름을 불렀다. 밤하늘 멀리 우리를 메모해둔 휘파람들은 사라졌다. 밀밭의 까마귀 떼가 물고 갔다. 호주머니를 뒤집자 작은 돌멩이처럼 툭 떨어지던 불과 태양, 맹약과 용기 등의 낱말들. 그 잿빛 낱말들을 하나하나 가만히 올려보던 취한 입술도 함께.

- ‘밀주’, 김중일


나의 친애하는 고아
제이는 울고 있다 어떤 감정도 흔한
이유도 물고기 한마리도 없이 울고 있다
이제 제이의 얼굴 위로 주름이 그물처럼 떠올랐다

제이와 자정의 백사장에 앉아, 호주머니 속의 몽당연필을 꺼내 밤하늘에 빼곡히 찍힌 별들을 이어 기록에 없는 별자리를 그렸다. 밤새 그 별자리를 모조리 잇자 검게 빛나는 그물 한벌이 되었고, 그물이 걷잡을 새 없이 우리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코앞에서 긴 지느러미를 흔들며 도망가는 어제와 그을린 낮달과 놓친 실타래처럼 뒤엉킨 잿빛 해무와 갈라진 홍해를 덮고 잠든 아침과 초록의 갯바람만 겨우 빠져나가던 그물, 우리는 그물을 둘러메고 물고기 잡으러 갔다. 달밤에 저마다 그림자를 작은 보트처럼 옆구리에 끼고 난바다로 나갔다. 이제야 고백건대 지난 계절 나는 지독히 사랑했던 제이의 얼굴에 푹 빠져 지낸 적이 있다. 몸을 내버린 마음의 투신이었고 제이는 무방비였다. 제이의 얼굴은 깊었고 나는 내내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제이는 나를 이번 생으로부터 안전히 건지기 위해 평생 제 얼굴에 그물을 드리웠다. 나를 보며 울고 웃고, 웃고 우는 순간 얼굴 위로 팽팽히 그물이 끌어당겨졌다. 무수한 표정의 물고기들이 그물에 갇혀 얼굴 속으로 자맥질했다. 벗어나지 못했다. 결코 제이는 나를 산 채로 얼굴 밖으로 끌어 올리지 못했다. 밤새 같이 울던 제이와 이별로 가던 날. 모래톱처럼 깎인 제이의 얼굴, 턱선 밖으로 파도의 주름에 떠밀린 죽은 물고기처럼 나는 쓸려나왔다. 이제, 제이의 얼굴 속에 내 물고기는 살지 않고 이제, 제이의 얼굴 위로 성긴 주름의 그물이 허물처럼 떠올랐다.

- ‘제이와 함께한 이야기’, 김중일


발치에 구겨진 안개처럼 쌓이는 편지들

제이의 편지를 받고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무섭게 넘쳐나는
사랑을 묘사할 길 없어
차라리 그나마 가장 유사한
죽음의 감정에 대해 답장을 썼다
그리고 밤이 저물어 제이에게 전해주기까지
도무지 기다릴 수 없어 창 밖으로 버렸다

그가 구겨서 버린 편지를
빗물에 젖어 퉁퉁 불어버린 편지를 주워
내 머릿속에 슬쩍 넣어 왔다
그것이 바로 지금 나의 뇌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나는 내 영혼의 제삼자
아직도 나는 구겨진 내 마음을 펴서 읽지 못했다

빙판 같은 창문을 건너려는 당신이
지금이라도 이 쪽지를 읽고 있는 당신이
낯선 당신이 구겨진 편지를 주워 든다면
우연히 젖은 그의 편지를 주워 든다면
밤낮이 데깔꼬마니처럼 안개처럼 번진 문장들을
제이를 대신해서 끝까지 읽어다오
특히 마지막 문장에 사랑도 이별도
모두 다 불면이라는 농담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성격 급한 그를 대신해서
이제라도 제이에게 전해다오

이제와 제이와 사랑할 수 없겠지만
제이와 이제와 다시 살아갈 수 없겠지만
지금도 그의 머릿속이 바람에 젖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로 가득하다고
그나마 못 전한 고백이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이제라도 제이에게

오늘밤을 대신해서 전해다오

- ‘이제와 제이와’, 김중일


그는 혁명가. 그는 망명 작가. 그러므로 그는 방랑자.

나는 방랑자의 빵을 싼 보자기였다. 빵 냄새 나는 빈 보자기였다. 바람으로 자은 보자기였다. 나는 떠도는 바람이었다. 밥 짓는 연기처럼 날리는 바람이었다. 장난스런 방랑자가 모닥불을 훔쳐 쬐며 잠든 나의 끝단을 그저 한번 묶었다 풀었다. 하릴없이 매듭을 지었다 풀었다. 미처 다 풀리지 않은 매듭의 모습으로 나는 처음 밤을 맞았다. 나는 지상과 공중 사이를 묶은 매듭이었다. 나는 내 바람의 체중을 잃어버렸다. 나는 내 귀퉁이에 묶인 매듭들을 구부려, 쪽잠을 자는 방랑자의 얼굴을 매만졌다. 내 손을 잡고 일어나요. 그게 싫다면, 일어나 내 손을 잡아요. 다음날 그로 인해 묶인 매듭은 발목이 되었다. 한순간 나는 우주의 외진 기슭에 불시착했다. 나는 지구라는 거대한 쇠구슬을 발목에 매단 죄수처럼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매듭이 조금씩 늘어 갔다. 나는 창살 속의 개가 되었다가 새가 되었다가 결국에 사람이 되었다. 이미 피곤해서 죽을 지경인 내가 기어이 어느 날 섧게 우는 갓 난 매듭 덩어리로 땅 위에 내던져졌다. 인생은 얽힌 매듭을 푸는 시간이었다. 지나치게 명민했던 내 친구는 단 이십 년 만에 제 몸의 매듭을 모두 풀고 바람의 태생으로 돌아갔다. 내 친구의 친구는 회사 난간에서 투신하여, 지구라는 거대한 망치로 자신을 내려쳐 호두처럼 단단한 매듭을 단번에 으스러뜨리기도 했다. 부러진 계절과 계절, 하루와 하루라는 관절 사이에 밤이 검고 차가운 쇠심처럼 박혀 있다. 하루는 수만 개로 조각난 관절을 가진 짐승이다. 수십억 년간 지구는 초 단위의 관절을 모조리 구부려 거대한 원형으로 웅크린 짐승이다. 언젠가 순식간에 날개를 펴고 바람으로 날아가 버릴 것이다. 늘 시큰거리는 무릎은 나를 이루는 가장 굵은 매듭.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무덤.

그는 천진한 학살자, 날 이곳에 묶어 둔 방랑자. 나는 그가 나를 혁명적으로 다시 써주기를 희망한다.

- ‘관절이라는 매듭’, 김중일


별이 되고자 끝까지 날아가는 새가 있다
새가 되고자 투신하는 별이 있다
새와 별이 부딪쳐 빗방울로 흩어졌다
막 태어나려는 날 위해
날 향해 천사는 밤새 붉은 화살을 쐈다
그 혈관은 지금 내 심장이라는 과녁에 모조리 꽂혀 있다
나는 비명과 울음을 터뜨리며
혈관 다발을 부여잡고 지상으로
거꾸러졌다 곧바로 죽을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난 태어나 생을 경유하게 되었다
지금 이 기록을 남기는 내 손등 위에도 그날의
시퍼런 화살 한자루가 부러진 채 불거져나와 있다
과녁 뒤에서 무표정한 친구들이 걸어나와
과녁에 꽂힌 화살을 하나하나 모조리 뽑아갈 것이다
내 손을 잡고 내 손을 꼭 잡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잠깐이나마 울어줄지도 모른다
누굴 위해선지는 모르지만
다시 텅 빈 허공에 붉은 과녁만 남을 것이다

천사가 활활 타오르는 달빛을 촉에 붙여 쏜
빗줄기 중 하나가 내 가슴을 관통한다
비를 맞고 죽는 사람이 있다
집 밖으로 나와서
글 안으로 들어가다가
빛을 맞고 죽는 사람이 있다
나는 비명도 없이 기쁘게 죽겠으나
다만 죽기 전에 나라는 가난한 나라는
변변히 기록할 농담의 역사가 없구나
점선처럼 비 내린다 오늘밤 하늘로부터
그어져 내린 무수한 절취선들이 공중에 가득하다
모든 이별에 대하여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떤 기록부터 뜯어내어
종이학을 접어 날릴까
종이별을 접어 띄울까
이것은 오늘의 마지막 농담

- ‘들어가는 글’, 김중일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동시에 울음을 터뜨린다면
바다의 수위는 얼마나 올라갈까
세상의 어느 낮은 섬 외진 모서리부터 차례로 잠길까
선잠 위로 차오르는 바다의 수위가
구름까지 닿으면 구름이 철썩철썩 파도처럼 부서질까
필요 이상으로 구름은 또 얼마나 많이 피어나
지구를 빈틈없이 모두 뒤덮고도 남아 우주로 새어나갈까
난민촌 밥 짓는 연기처럼 모락모락 새어나갈까
우주 밖으로 백기처럼 휘날릴까
구겨진 백지처럼 버려질까
지구상의 사람 누구든 펑펑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
방금도 일어난 잔혹하고 끔찍하며 슬픈 일이 우리 모두에게
단 한번만 공평히 동시에 일어난다면 어떨까
그러면 그 누구에 의해서든
두번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텐데

- ‘농담’, 김중일

내가 살아갈 사람

김중일 지음
창비 펴냄

2019년 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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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창비시선 388권. 감각적인 언어와 환상적인 이미지가 어우러진 독창적인 시세계로 주목을 받아온 김중일 시인의 세번째 시집. 신동엽문학상(2012)과 김구용시문학상(2013) 수상작 <아무튼 씨 미안해요>(창비 2012)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상 이상의 '농담 같은 일들이 끝없이 일어나는 세상'을 향해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거짓된 눈물의 역사'로 얼룩진 모순투성이의 현실을 냉철하게 꿰뚫어보는 치열한 의식이 담긴 시편들이 공감을 자아내는 한편, '잊지 말 것은 잊지 말자고' 다짐하며 '잊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창작자로 살게 해달라고'(시인의 말) 기도하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출판사 책 소개

망각과 침묵을 넘는 간절한 시,
진실에 가닿는 가장 결정적인 언어들


감각적인 언어와 환상적인 이미지가 어우러진 독창적인 시세계로 주목을 받아온 김중일 시인의 세번째 시집 <내가 살아갈 사람>이 출간되었다. 신동엽문학상(2012)과 김구용시문학상(2013) 수상작 <아무튼 씨 미안해요>(2012)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상 이상의 “농담 같은 일들이 끝없이 일어나는 세상”을 향해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거짓된 눈물의 역사’로 얼룩진 모순투성이의 현실을 냉철하게 꿰뚫어보는 치열한 의식이 담긴 시편들이 공감을 자아내는 한편, “잊지 말 것은 잊지 말자고” 다짐하며 “마음속으로 먼저 간 사람들이 빌려갈 수 있는 유일한 책”을 “나를 먼저 살다 간 사람”과 “내가 살아 갈 사람”에게 전하겠다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동시에 울음을 터뜨린다면/바다의 수위는 얼마나 올라갈까/세상의 어느 낮은 섬 외진 모서리부터 차례로 잠길까/선잠 위로 차오르는 바다의 수위가/구름까지 닿으면 구름이 철썩철썩 파도처럼 부서질까/필요 이상으로 구름은 또 얼마나 많이 피어나/지구를 빈틈없이 모두 뒤덮고도 남아 우주로 새어나갈까/난민촌 밥 짓는 연기처럼 모락모락 새어나갈까/우주 밖으로 백기처럼 휘날릴까/구겨진 백지처럼 버려질까/지구상의 사람 누구든 펑펑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방금도 일어난 잔혹하고 끔찍하며 슬픈 일이 우리 모두에게/단 한번만 공평히 동시에 일어난다면 어떨까/그러면 그 누구에 의해서든/두번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텐데(「농담」 전문)

현실과 환상, 실재와 가상의 세계를 자유분방하게 넘나드는 김중일의 시는 감각과 환상을 버무린 “경계를 잠식하는 꿈의 언어”(조재룡)로 우울과 슬픔과 고독으로 뒤발한 우리의 비극적 현실을 사실적으로 기록해낸다. 시인은 “나무가 흔들리는 건 나무가 생각한다는 것” “바람이 부는 건 바람이 기억한다는 것”(「밀주」)이라는 비상한 시각으로 “야만의 시나리오가 다시 인쇄되는” 세계를 응시하며 “역사의 구유 속에 머리를 처박고/죽어간 아비와 아이들의 그림자를 되새김질”(「금요일의 연편누독, 낙서, 초록의 구유」)하고, 진실을 외면하는 침묵과 망각의 늪을 걷어내고 과거의 처참한 기억을 오롯이 되살려 “맨 처음부터 다 같이 기억의 연주”(「노래할 수 있다면」)를 시작한다.

아직 살아남은 나뭇잎은 석양의 가장자리에 놓인 희생자의 숟가락이다/해진 소매로 그 나뭇잎이란 나뭇잎마다 묻은 분진을 한잎 한잎 빠짐없이 다 닦아라//편백나무 잎처럼 무성한 눈썹/눈썹 아래 희생자의 눈동자/눈꼬리에서부터 뻗은 주름의 가장귀에 연기의 몸으로 걸터앉아/비 맞을 몸도 없이/비 맞을 몸도 없이//폭우처럼 불행이 쏟아진 후 손수건 한장 들고/세세연년 무지개 위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닦아라(「비 맞을 몸도 없이」 전문)

시인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과 너와 나의 불행이/평등해지길 기대하지” 않지만, “그러나 끝끝내 평등해질 때까지”(「삼십대」)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고자 한다. “새처럼 철탑 위에 앉은 사람 촛불로 공중에 제 얼굴을 조각하는 사람”(「흐린 책」), “제 스스로 공중에 갇”(「눈물이라는 은색 지퍼」)히거나 “한데서 잠든 세상 모든 사람들”(「고스트」)처럼 자본의 폭력 앞에 삶의 터전을 잃고 죽음의 자리로 내몰린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함께하며 시인은 “불타는 발자국만 산더미처럼 쌓”(「당신의 옷입니까」)이고 “선연한 학살의 무늬들이 새겨져 있”(「공중, 낙서, 내 귓속으로 날아든 새」)는 지구 곳곳의 현장을 세심히 기록하고 되새긴다.

공중에 핀 사람들/철탑 위에 누워 귀 기울이면/날아드는 바람의 밀어들/눈물이 지나가며 얼굴 위에/잠시 낸 틈새로 들여다보이는 별들/네 두송이 귀는 세상 모든 꽃들의 주형/그 두송이 꽃을 머릿속/상념의 화병에 꽂고 너는 공중으로 갔다//(…)//하늘로 떨어지거나 지상에 오르거나/공중에서 한장 한장 떼어지는 꽃잎처럼/바람 속의 귀가, 네 얼굴에 피고 지고 흩날린다/한장의 꽃잎처럼 침대가 놓인 집으로/바람 속의 귀가,/찬 밤마다 인중에 고이는 너의 고독/철탑을 타고 너는 끝까지 전송된다(「타인의 투쟁」 부분)

시가 되고자 끝까지 날아가는 언어들

독특한 감각과 몽환적 이미지로 색다른 시세계를 펼치는 시인은 언어를 부리는 솜씨 또한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그의 ‘말놀이’는 문법을 허무는 단순한 말장난이나 언어유희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와 제이와 사랑할 수 없겠지만/제이와 이제와 다시 살아갈 수 없겠지만” “이제라도 제이에게”(「이제와 제이와」), “백지 같은 백주 위로” “유방은 곧 유빙처럼”(「야행」), “혹시 했는데 역시 그렇습니까”(「당신의 옷입니까」), “촛불은 일어서는 초의 풀”(「양초」), “나라는 가난한 나라는/변변히 기록할 농담의 역사가 없구나”(「들어가는 글」) 등에서 보듯 치밀하게 짜인 연상 기법으로 시적 효과를 극대화하며 간간이 시를 읽는 재미도 선사한다.

걱정 마 걱정 마/전지구상의 전쟁의 불씨란 불씨는 내가 오분 전에 다 껐어/그는 자꾸 이불을 덮어주고 간다/내가 차 던져도 자꾸 이불을 덮어주고 간다/이 불 속에서 나는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나는 차 던져버릴 수도 없는 이 불에 뜨겁게 뒤덮여 있는데(「불면이라는 농담」 부분)

세상 어디에도 희망의 불빛은 보이지 않고 “기도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떨어진 달처럼 무거운 마음”(「꽃처럼 무거운 마음」)뿐인 절망과 상실의 시간 속에서도 시인은 “불가피하게 읽히는, 이해할 필요 없는 시들이 세상을 무작정 가득 채웠으면, 좋겠”(「시인의 애인」)다는 소망을 잃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랑이라는 상실과 불면이라는 농담”(시인의 말)으로 가득 채워진 이 시집이 “매일매일 공습이 매해 계속되”고 “속절없이 여객선이 침몰”(「얼음나라 노동자」)하는 상상 이상의 일들이 벌어지고 “철철 진물을 흘리고 있는 무능력한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따듯한 위로를 건넬 것이고, “이 무지막지한 세계는 시적인 생명력을 수혈 받을 것”(이병률, 추천사)이다.

두사람 지평선 왼쪽 맨 가장자리에서 공기로 빚은 얼굴만 한 빵을 한입씩 나누어 베어 물듯 고요하게/왼쪽 맨 가장자리가 지구 한바퀴 돌아 오른쪽 맨 가장자리를 따라잡기까지 순식간에//실업한 두사람 발치에 떨어진 풍선을 몰래 들듯 가만히/두 손으로 서로의 얼굴을 들고 온몸 부풀어 떠오르도록 입 맞대고 서로를 숨처럼 서로에게 불어넣고//어느새 달아오른 살갗 주름진 표정을 뒤집어쓴 두사람/온몸을 서로에게 구겨넣고 이제 멀리 떠나버리려는 듯 마지막으로 키스하는 두사람/서로의 몸속에 각자 온몸을 다 쏟아붓자 사라진 두사람/눈앞에 남은 건 한주먹의 투명한 적막뿐//적막을 걷고 맨 앞으로 등장하는 두사람/숨소리로 빚은 얼굴만 한 빵을 한입씩 베어 먹듯 막 키스를 시작하는 두사람(「키스의 시작」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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