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창비시선'의 문을 여는 첫번째 시집으로 정현우 시인의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가 출간되었다.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의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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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정현우 시집) 내용 요약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는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정현우 시인의 첫 시집으로, 2021년 창비시선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 2019년 동주문학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시인은 ‘시인의 악기 상점’이라는 밴드의 보컬로도 활동하며 문학과 음악을 아우르는 독특한 감성을 보여준다. 이 시집은 6년간 발표한 68편의 시를 4부로 나누어 엮었으며, 삶과 죽음, 정체성, 슬픔을 주제로 한 깊이 있는 성찰과 환상적 이미지가 돋보인다. 시인은 “천사의 말”을 통
수초의 질감이 잠긴 하늘
해변에서 소라를 주웠다.
몇시간째 소라는 나올 수 없다.
기차역 차단기 앞에서 나는 놀라 뒷걸음치고
소라를 놓쳤다.
새들은
나만 빼고 어디로 다 데려가는지
처음부터 혼자는
그렇게 탄생했을지도.
슬픔은 오른쪽이야,
기억을 나사처럼 돌리다가
더이상 돌아가지 않는 오른쪽이야,
돌아갈 집이 없는
소라에게 속삭였다.
- ‘소라 일기’, 정현우
두 눈은 울기 위해 만들어졌지,
인간은 가장 말랑한 슬픔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돌려도 주사위의 검은 눈이
하나밖에 나오지 않는
두개의 눈동자 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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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내겐 운,
슬픔을 가진다는 것 또한 인간이 되기 위한
경우의 수,
천사는 생각해, 마음껏 울어도 돼 그래도 돼
얼마나 많은 슬픔을 깨뜨려야
사람이 인간이 될까
깨질 듯 굴러갈 듯
천사들이 사람을 줍고 있다.
- ‘유리 주사위’, 정현우
이파리가 가늘게 가지들을 낭독한다
불 꺼진 난로, 은색 주전자,
입김은 사라진다
모든 슬픔을 한꺼번에 울 수는 없나
아, 난 죽은 사람
숨을 거두어가는 일이
새를 데리러 오는 일이
나에게도 일어난 것
- ‘꿈과 난로’, 정현우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그 어떤 얼굴도 만져지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길이 생각나지 않았다. 죽은 이들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실종된 사람들이 몰려왔다가 사라졌다. 모든 배경이 통증을 파냈다. 눈이 묻은 사물들이 나를 통과했다. 얼굴이 없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새들이 데리고 가는 것은 아닐까. 새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보았다. 벌목된 숲, 식물들이 새들의 발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그림자를 먹어치우면서 새들을 놓지 않았다. 새들을 주머니 속에 넣으면 지워진 얼굴들과 모르는 얼굴들이 많아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깃털은 빛을 말아 올린 새들의 혀. 해가 지는 쪽에는 실어(失語)가 있다고. 빛의 그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빛들이 가진 여러겹의 목소리를 알지 못했다. 잊고 싶은 말들은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라 했다. 쓸쓸한 얼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정현우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
텅 빈 고해소에서
쉽게 하는 고백이 있었지,
자살을 쉽게 하는 방법을 나눴고,
목을 매달아 죽는 사람, 연탄가스를 마시거나,
옥상 팔층은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아니, 불에 타 죽는 것이 가장 아프다는데
완벽하게 자살하는 방법에
까짓것, 네가 그럴 용기 있어?
나는 크게 웃었다.
네 부고를 듣고,
죄들이 손바닥 끝에서
붉고 투명한 귀들로 자랐다.
종일 두 손을 모으는 것일지도 몰라
사라지기 위해
죽음을 듣는 마음이 있어서
들리지 않는 것이 있어서
눈꺼풀을 닫으면
죽음이 필요해진다.
겨울, 불어오는 일들이
한밤의 불면으로 들어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데,
견딜 수 있는 것들만 고통을 준다는
신은
없다.
그것은 사물의 시작
사람이 끝에 매달리는 것
불쑥 찾아와 사라지는
죄를 사해주세요.
내가 정말 그를 죽인 것 같다.
밤이 나의 비밀을 서성인다.
아프지 않게 눕는 인간의 방향으로
나는 누웠다.
죄 없는 기도가 지속된다.
신부님이 없는 고해소에서
신이 없는 고해소에서
- ‘용서’, 정현우
앞지르려고 한다
나의 늙은 개가
헐떡이며 눈길을 걷는다
눈동자 안 유리 속으로
수없이 기억이 쌓이고
더이상 견디지 못할 때
콰직 - 깨져버리는 세계
사람이 죽게 되면 함께 살았던 것은
우르르 달려나와
멀리서 눈빛만 보고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먼저 가 꼬리를 흔들고 있을 것 같아
입김은 서두르지 않고
누군가를 버리고 가는 마음은
울기 직전의 눈썹
가장 살고 싶을 때의 표정으로
우리는 두 발이 움푹 -
눈밭의 깊은 곳에 살자고 했었지
젖은 당신의 눈가를 떠올린다
눈이라는 단어를 지우면
나는 완성될 수 없는 문장
괄호 안이 비워진 마음으로
눈이 먼 다정한 손으로
무엇이지 모를 것들을
둥글게 뭉쳐 던진다
왈칵 - 쏟아져버릴
유리의 세계로
당신은 안녕하신가
- ‘스노우볼’, 정현우
참외를 먹다 벌레 먹은
안쪽을 물었습니다.
이런 슬픔은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뒤돌아선 그 사람을 불러 세워
함께 뱉어내자고 말했는데
아직 남겨진 참외를 바라보다가
참회라는 말을 꿀꺽 삼키다가
내게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먼 사람의 뒷모습은
눈을 자꾸만 감게 하는지
나를 완벽히 도려내는지
사랑에도 뒷면이 있다면
뒷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습니다.
단맛이 났던 여름이 끝나고
익을수록 속이 빈 그것이
입가에서 끈적일 때
사랑이라 믿어도 되냐고
나는 참외 한입을
꽉 베어 물었습니다.
- ‘사랑의 뒷면’, 정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