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도시에서 지금 돌아온 사람들은
폭설주의보가 매달린 겨울 숲에서
모닥불을 지펴놓고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가움을 녹이며
조금씩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며
자기 몫의 봄소식에 못질을 하고 있다
물푸레나무 숲을 흔드는
이 지상의 추위에 못질을 하고 있다
가까이 오라, 죽음이여
동구 밖에 당도하는 새벽 기차를 위하여
힘이 끝난 폐차처럼 누워 있는 아득한 철길 위에
새로운 각목으로 누워야 하리
거친 바람 속에서 밤이 깊었고
겨울 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모닥불이 어둠을 둥글게 자른 뒤
원으로 깍지낀 사람들의 등뒤에서
무수한 설화가
살아 남은 자의 슬픔으로 서걱거린다
- ‘땅의 사람들 1 - 서시’,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 ‘땅의 사람들 6 - 봄비’, 고정희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지렛대 하나는 가지고 있는 법이다
운명의 바위를 젖히고
시간의 암초를 뒤엎어
새벽길 징검다리 볼가내는
지렛대,
사람은 누구나 혈관 속에
묵시의 강 하나 돌고 있는 법이다
거꾸로 북받치는 분노의 불을 삭이고
어둡게 뛰는 피 맑게 걸러내어
천체의 광명을 발산하는 초음파의
강, 가앙
- ‘천둥벌거숭이 노래 4’, 고정희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옆에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평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 ‘천둥벌거숭이 노래 10’, 고정희
최후의 통첩처럼
은사시나무 숲에 천둥번개
꽂히니
천리 만리까지 비로
쏟아지는 너,
나는 외로움의 우산을
받쳐들었다
- ‘소외 - 편지 4’, 고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