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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인 책
출간일
2011.5.20
페이지
296쪽
상세 정보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와 한겨레출판이 공동 기획한 '한겨레역사인물평전'. '한겨레역사인물평전'은 현재 우리의 삶이 과거와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전제하에 우리 과거사 인물들을 현재의 시각으로 조명해보려는 야심찬 시리즈이다. 이 책은 그 첫걸음으로, 민족을 대표할 만한 지성으로 주목받았으나 결국 변절의 길을 걸었던 육당 최남선의 평전이다.
「소년」을 창간하며 신지식층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했던 계몽운동가, 당대 최고의 지식 아카데미였던 조선광문회를 주도하며 조선사 연구에 매진했던 역사학자, '기미독립선언서'를 집필하며 당당히 3.1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민족운동가, 최남선. 그를 거치지 않고서는 한국 근현대 지성사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최남선은 당대를 대표하는 지성이자 신문화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자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우리 근현대사의 아물지 않은 상처이기도 하다. 일본의 관변 단체인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면서 최남선은 변절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만주 건국대학 교수를 거쳐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강연을 하는 등 최남선은 돌이키기 힘든 선택을 했다.
그러나 이처럼 굴곡 있는 그의 행보는 우리 근현대사가 경유했던 극단적 스펙트럼을 되짚어보는 데 그 무엇보다 유효한 지표이기도 하다. 문제적 인간 최남선의 삶을 통해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거쳐온 우리 근대와 민족주의의 실체를 들여다보자.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류시현 교수가 집필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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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자
@sonkiza
최남선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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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와 한겨레출판이 공동 기획한 '한겨레역사인물평전'. '한겨레역사인물평전'은 현재 우리의 삶이 과거와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전제하에 우리 과거사 인물들을 현재의 시각으로 조명해보려는 야심찬 시리즈이다. 이 책은 그 첫걸음으로, 민족을 대표할 만한 지성으로 주목받았으나 결국 변절의 길을 걸었던 육당 최남선의 평전이다.
「소년」을 창간하며 신지식층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했던 계몽운동가, 당대 최고의 지식 아카데미였던 조선광문회를 주도하며 조선사 연구에 매진했던 역사학자, '기미독립선언서'를 집필하며 당당히 3.1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민족운동가, 최남선. 그를 거치지 않고서는 한국 근현대 지성사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최남선은 당대를 대표하는 지성이자 신문화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자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우리 근현대사의 아물지 않은 상처이기도 하다. 일본의 관변 단체인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면서 최남선은 변절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만주 건국대학 교수를 거쳐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강연을 하는 등 최남선은 돌이키기 힘든 선택을 했다.
그러나 이처럼 굴곡 있는 그의 행보는 우리 근현대사가 경유했던 극단적 스펙트럼을 되짚어보는 데 그 무엇보다 유효한 지표이기도 하다. 문제적 인간 최남선의 삶을 통해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거쳐온 우리 근대와 민족주의의 실체를 들여다보자.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류시현 교수가 집필을 맡았다.
출판사 책 소개
근대화를 주도하면서도 우리의 것을 되돌아보았던 당대의 지성,
동시대와 긴장하고 동요하며 타협했던 문제적 인간!
일본 유학을 거친 후 <소년>을 창간하며 신지식층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했던 계몽운동가, 당대 최고의 지식 아카데미였던 조선광문회를 주도하며 조선사 연구에 매진했던 역사학자, 「기미독립선언서」를 집필하며 당당히 3ㆍ1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민족운동가. 이러한 최남선을 우리 근현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의 반열에 올리는 것은 분명 타당할 것이다. 그를 거치지 않고서는 한국 근현대 지성사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최남선은 당대를 대표하는 지성이자 신문화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자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우리 근현대사의 아물지 않은 상처이기도 하다. 일본의 관변 단체인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면서 최남선은 변절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만주 건국대학 교수를 거쳐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강연을 하는 등 최남선은 돌이키기 힘든 선택을 했다. 그러나 이처럼 굴곡 있는 그의 행보는 우리 근현대사가 경유했던 극단적 스펙트럼을 되짚어보는 데 그 무엇보다 유효한 지표이기도 하다. 문제적 인간 최남선의 삶을 통해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거쳐온 우리 근대와 민족주의의 실체를 들여다보자.
■ 본문 소개
과거와 단절하고 민족을 계몽하려 했던 신지식인, 최남선
근대화와 우리의 전통을 고민한 당대의 지성
우리 근현대기의 대표적인 지식인 중 하나인 최남선의 이력을 살펴보다 보면, 우선 그의 어린 시절에 눈길이 간다. 유복한 중인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1904년 그의 나이 열다섯 살 때 동경으로 유학을 간다. 황실에서 파견하는 특파 유학생으로 선발된 최남선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어린 나이에 외국으로 조기 유학을 떠난 셈이다. 이광수, 홍명희, 최남선 등 일명 ‘동경삼재(東京三才, 동경의 3대 천재)’가 교유를 시작한 것이 최남선의 나이 열일곱 살 때이니, 이들은 청소년기에 이국 타향에서 비교적 허물없이 생각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최남선은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열아홉 살에 조선 사회의 주목받는 인물로 부상한다. 그는 일본에서 출판용 기계들을 매입해 들여와 1908년 신문관이라는 출판사를 설립했는데, 여기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잡지인 <소년>이 발행되었다. 또한 그는 일본에서 조선의 희귀 고서가 발간된 데 충격을 받고서 조선광문회를 설립한다. 이 단체는 자주ㆍ근대ㆍ과학을 기준 삼아 조선의 고전을 발간했는데, 일제의 무단통치로 인해 정치적 결집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다양한 성장 배경 및 학습 과정을 거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모이는 집합소로 기능하기도 했다.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당대의 주목을 받으며 조선 사회에 문제제기를 해온 최남선이었기에 서른 살에 민족 대표로 「기미독립선언서」를 집필하고,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3ㆍ1운동을 조직화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었다. 그가 조선 지성계의 중심에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출중한 능력 탓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포함한 신지식층이 앞 세대와 단절 의식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앞 세대의 역할을 부정하면서 자신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며 시대를 선도해 계몽에 앞장선다는 자의식의 표현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최남선에 대해 이광수는 그가 청년 시절을 잃어버렸으며 시대의 선구자이면서도 희생자라고 평했다.
3ㆍ1운동으로 수감 생활을 거친 후 출옥한 최남선은 1920년대에 자신이 발간한 잡지 <동명>을 통해 사회주의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을 적극 소개했다. 또한 조선광문회 시절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조선 전통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시켜 나갔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최남선은 서구의 근대를 긍정적으로 전파하려 했던 계몽주의자에서 조선의 전통을 고민하는 역사학자로 변모한다. 그는 1922년 본격적으로 ‘조선학’을 천명하는데, 민족 단위의 독자성을 확인하기 위해 단군을 연구했고 중국과 일본, 조선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규정한 후 이 가운데 조선 문화를 가장 우월한 것으로 바라보는 불함문화론을 설파했다. 이러한 연구들은 중국 및 일본과 구별되는 고유하고 독자적인 ‘조선적인 것’의 발견을 통해 일본에 대항하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28년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면서 ‘변절’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조선사편수회는 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의 ‘반도사’ 편찬을 위해 설립된 조직으로 조선사를 왜곡하는 일본의 관변 단체였다. 192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조선사편수회에서 활동하던 일본 관변 학자들을 비판했던 그는 이 단체에 발들이면서 별다른 입장을 밝힌 바 없다. 다만 해방 후 “제 마음이 약하기 때문이었지요”라고 회고한 적이 있을 따름이다.
반일에서 친일로의 변절, 그리고 해방 이후 다시 돌아선 최남선
우리 근현대사의 아물지 않은 상처
1931년 만주사변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 전쟁은 점차 확대되었고,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지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전시 체제에 들어갔다. 식민지 지식인들의 전쟁 협력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최남선은 이전에 주장했던 논리의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한다.
우선 그는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조선 문화를 일본 제국 내의 문화로 지역화시킨다. 이는 그가 1920년대에 주장했던 불함문화론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일본의 괴뢰국으로 설립된 만주국으로 건너가 만주 건국대학에 교수로 재직했는데, 당시에 그는 조선인을 일본인의 하위 동반자로 보면서 일본을 중심으로 조선이 참여하여 만주에 진출할 것을 주장했다. 중국 입장에서 보자면 일본의 손아귀에 있는 조선인이 중국 침략과 수탈의 첨병으로 보일 수도 있는 논리였다.
한편 1943년경부터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의 반격이 이뤄지자 일본은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최남선은 학병 지원 연설 및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인종론을 기반으로 한 앵글로색슨 문명 비판과 함께 일본을 맹주로 한 동양 문화의 우월성을 강변한다. 그에게 태평양전쟁은 서구에 대한 동양의 승리를 역사적으로 재현하는 제국의 ‘성전’이었다.
결국 일본이 패전하고 조선이 해방되자 최남선은 다시금 일제 말기에 자신이 펼쳤던 논리를 바꾸어야 했다. 해방 후 그는 해방된 조선을 ‘늠름 여장부’로, 패전한 일본을 ‘골방 속 색시’로 묘사하였고, 새로운 국가 수립에 걸맞은 역사관을 피력한다. 또한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와 연동하는 위치로 자리매김한다.
이처럼 입장 변화를 거듭해온 최남선을 온전히 용납할 순 없지만, 그의 변전(變轉) 어린 삶이야말로 우리 근현대가 거쳐온 다사다난한 현실을 극명하게 규명해볼 수 있는 프리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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