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읽은 강진아의 『오늘의 엄마』(민음사, 2020)가 대번에 떠올랐다. 이 책이 베테랑 보호자와 새로운 보호자의 세대교체를 다루고 있다면, 보부아르는 (새로운 보호자였다가) 베테랑이 된 보호자가 (베테랑 보호자였다가) 은퇴한 보호자의 마지막 순간을 다룬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보부아르가 마음을 어떻게 추슬러 이 글을 썼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세계가 병실 크기만큼으로 줄어들었다. 택시를 타고 파리를 가로지를 때면 이 도시가 단역 배우들이 돌아다니는 무대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나의 진짜 생활은 엄마 곁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엄마를 지키는 것, 그것만이 내 유일한 목표였다"(103쪽). 이 소설은 너무 아프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언젠가 겪어야 할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것,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은, 피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이고, 소설과 영화로 아무리 추체험해도 온전히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왜 누군가의 죽음을 다루는 서사는 그 사람의 죽음 이후에 쓰이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자전적 소설보다 그렇지 않은 소설이 더 많고, 소설은 기본적으로 허구이기에, 작가는 언제든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고찰을 작품 속에 녹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중요할 것 같다. '여성 작가가 딸의 입장에서 쓰는 "어머니"의 죽음 이야기'는 실제 사건의 발생에 선행하여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인가? 그것은 죽는 사람이 "어머니"이기 때문인지, 혹은 쓰는 사람이 누군가의 딸인 "여성"이기 때문인지가 궁금하다. (『아주 편안한 죽음』과 『한 여자』의 화자가 모두 언급했듯, 어머니에 관한 것은 '신화'의 영역이기에? 미리 추체험할 수 없을 만큼 '나'를 뒤흔드는 거대한 존재이자 사건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