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례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 나왔다. 2003년 이수문학상을 수상한 <붉은 밭>의 2001년 출간 이후 5년 만이다. 시인이 '기억과 시간으로부터 관심을 돌릴 수 없었다'라고 말한 이전 시집과 마찬가지로 시집 <레바논 감정> 역시 그 연장선에 놓인다. 하지만 이전 어느 시집보다 슬픔과 능청스러움이 엇물려 낯설게 다가온다.
느닷없이 너 마주친다 해도
그게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할 것 같다
물건을 고르고
지갑 열고 계산을 치르고
잊은 게 없나 주머니 뒤적거리다
그곳을 떠나듯
가끔
손댈 수 없이
욱신거리면 진통제를 먹고
베개에 얼굴을 박고
잠들려고
잠들려고 그러다가
젖은 천장의 얼룩이 벽을 타고 번져와
무릎 삐걱거리고 기침 쿨럭이다가
왜 그럴까 왜 그럴까
도대체 왜 그래야 할까
헛손질만 하다가 말듯이
대접만 한 모란이 소리 없이 피어나
순한 짐승의 눈처럼 꽃술 몇 번 껌벅이다가
떨어져 누운 날
언젠가도 꼭 이날 같았다는 생각
한다 해도
그게 언제인지 무엇인지 모르겠고
길모퉁이 무너지며 너
맞닥뜨린다 해도
쏟아뜨린 것 주워 담을 수 없어
도저히 돌이킬 수 없어
매일이 그렇듯이 그날도
껌벅거리다
주머니 뒤적거리다
그냥 자리를 떠났듯이
- ‘껌벅이다가’, 최정례
수박은 가게에 쌓여서도 익지요
익다 못해 늙지요
검은 줄무늬에 갇혀
수박은
속은 타서 붉고 씨는 검고
말은 안 하지요 결국 못하지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봐요
나귀가 수박을 싣고 갔어요
방울을 절렁이며 타클라마칸 사막 오아시스
백양나무 가로수 사이로 거긴 아직도
나귀가 교통수단이지요
시장엔 은반지 금반지 세공자들이
무언가 되고 싶어 엎드려 있지요
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싶어
그들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죽지요
그들은 거기서 살았고 나는 여기서 살았지요
살았던가요, 나? 사막에서?
레바논에서?
폭탄 구멍 뚫린 집들을 배경으로
베일 쓴 여자들이 지나가지요
퀭한 눈을 번득이며 오락가락 갈매기처럼
그게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지요
내가 쓴 편지가 갈가리 찢겨져
답장 대신 돌아왔을 때
꿈이 현실 같아서
그때는 현실이 아니라고 우겼는데
그것도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요?
세상의 모든 애인은 옛애인이 되지요
옛애인은 다 금의환향하고 옛애인은 번쩍이는 차를 타고
옛애인은 레바논으로 가 왕이 되지요
레바논으로 가 외국어로 떠들고 또 결혼을 하지요
옛애인은 아빠가 되고 옛애인은 씨익 웃지요
검은 입술에 하얀 이빨
옛애인들은 왜 죽지 않는 걸까요
죽어도 왜 흐르지 않는 걸까요
사막 건너에서 바람처럼 불어오지요
잊을 만하면 바람은 구름을 불러 띄우지요
구름은 뜨고 구름은 흐르고 구름은 붉게 울지요
얼굴을 감싸쥐고 징징거리다
눈을 흘기고 결국
오늘은 종일 비가 왔어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봐요
그걸 레바논 구름이라 할까 봐요
떴다 내리는
그걸 레바논이라 합시다 그럽시다
- ‘레바논 감정’, 최정례
꿈엔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창밖에서 이파리 하나가 흔들리듯
잠깐 반짝이고 있었다
낯익은 벽지 위엔 모란이 박혀 있었다
인동초 잎 덩굴은 연속해서 꼬부라지고
꼬부라지고
방을 보러 간다고 가서
슬리퍼 끌고 나온 그를 따라
들어섰을 뿐인데
유리 어항에 금붕어가 살랑이듯
잠깐 서성였는데
수십 년을 거기서 살았다고 한다
남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었을 그와
창밖에서 이파리처럼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잠깐 반짝였는데
- ‘잠깐 반짝였는데’, 최정례
그 많은 연기가 어디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 많은 먼지가 벽 속에 어떻게 숨었었는지
조그만 주먹 속에 조그만 폭탄 속에
눈먼 폭풍들
불꽃과 연기와 굉음들
네가 나를 버렸듯이
나도 나를 버릴거야
폭탄을 안고 숨어들어
솟구치며 날아갈 거야
나의 뼈 너의 피를 안고
네 마천루를 관통할거야
저것 봐
바닥은 끓어오르고 벽들은 녹아내리지
불길이 하늘의 반을 가리고
작은 주먹이 연기로 바뀔 때
내뿜는 폭풍을
그 후의 한없는 정적을
네가 폭파시킨 나
내 속에 함께했던 너
내 몸속에 갇혔던
연기와 불꽃과 비명을
- ‘폭탄에 숨다’, 최정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