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시기에 근대화의 여정에 나섰으나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고,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해 식민지로 전락하는 운명으로 엇갈렸다. 106년 전, 조선은 전쟁도 하지 않고 그렇게 나라를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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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탐한 사무라이 (상투 잡은 선비, 상투 자른 사무라이) 내용 요약
이 책은 조선 시대와 일본 사무라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인물의 만남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기묘한 우정, 그리고 시대적 아픔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 저자인 이광훈 작가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상상력을 더해, 당시 동북아시아의 긴장감 넘치는 정세를 배경으로 두 주인공의 가치관이 어떻게 충돌하고 화해하는지를 긴장감 있게 묘사합니다.
밀항에 실패한 요시다 쇼인은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 학숙을 열게 되는데,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신분과 출신을 따지지 않고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사무라이의 시중을 드는 최하층 계급 출신까지도 배울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학숙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일본의 근대사가 다시 한 번 요동을 치게 된다. 쇼인이 신분을 떠나 제자로 거두어 주지 았더라면 일본 근대화 역사에 등장할 기회 자체가 없었을 처지였던 사람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쇼인의 밀항과 운명적인 회항은 자신의 인생행로를 되돌린 역사적 사건인 동시에 일본의 근대사를 침략적 군국주의로 치닫게 하는 전기가 되었다. 그가 낳은 수많은알(제자)이 부화하여 일본제국과 군국주의의 기틀을 닦았기 때문이다.
요시다 쇼인의 사상에 중독된 제자들은 메이지유신의 소용돌이에스스로 몸을 던져 그중의 절반이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특히쇼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갔던 애제자들이 일찍 죽었다. 감화의 정도가 깊을수록 일찍 목숨을 던졌다는 점은 쇼인의 가르침이 그만큼 중독성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 자신도 20대였기 때문에 젊은 피를 끓게 하는 급소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쇼인이 제자들에게 자주 했던 어록은 젊음을 격동케 하는 마력이 있었다. 그가 제자들에게 자주 행했던경구에 이런 말이 있다.지사志士는 불망재구학不忘在溝壑하고, 용사勇士는 불망상기원不忘喪其元이라(孟子,第三縢文公篇下第一枉尺直尋章)뜻을 가진 선비는 시신이 도랑에 버려질 것을 잊지(두려워하지)않고,용사는 자기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피하지)않는다. 이 경구는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나오는 내용으로 맹자의 제자인 진대陳代가 맹자에게 제후들을 찾아가 뜻을 펴라고 권하자, 맹자가 공자의 말을빌려 회답한 것이다. 제후 밑에서 뜻을 굽히지 않는 선비로 지내려면 언제라도 죽어서 시신이 길가 도랑이나 골짜기에 버려질 수 있다는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단지 명예만을 추구하며 벼슬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하다.
시다 쇼인이 제자들을 격동시켰던 말 중에 특히 자주 인용되는것으로 이런 말이 있다.학문도 중요하지만 학문을 알고 또 이를 실행하는 것이 남자의 길이다. 시도 좋겠지만 서재에서 시를 짓고 있는 것만으로는 뜻을 펼 수 없다. 사나이라함은 자기의 일생을 한 편의 시로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한 줄의 시도 쓰지 않았으나 그의 일생은 그대로 비길 데 없는 크나큰 시가 아니겠는가.사나이는 일생 그 자체가 한 편의 시가 되어야 한다.20대 반 피 끓는 나이의 젊은 제자들이 이런 강론에 얼마나 격동되었을지 눈에 선하다. 쇼인의 강론법은 독특했다. 자신이 독파한 서적을 토대로 습득한 지식을 주입식으로 강론하는 식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화두話頭를 던지고 서로 토론하면서 문제를 풀어 갔다. 정해진 교재도 없으며체계적인 교과 과정도 없었다. 그때그때 대두되는 문제를 놓고 고전과 최근 서적을 두루 섭렵하면서 답을 찾아 나가는 방식이었다.
천황에 대한 충성의 상징으로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무덤에서 불러낸장본인이 바로 요시다 쇼인이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칠생보국七生報國을 외치면서 죽었다. 일곱 번 다시 태어나도 천황을 위해 죽겠다고 했다는 그의 정신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되살아났다. 가미카제 특공대로 출격하는 대원들에게 사케 한 잔과 이 구호를 적은 머리띠를 질끈 매주고 사지로 내몰았다. 요시다 쇼인이 남긴 유산은태평양전쟁 말기 이런 식으로 왜곡되어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념이 변질되면 어떤 모습으로 인간을 옭아매는지 처절하게 보여준셈이다. 이 사건은 일본에 신우익이 형성되는 전기를 만들었고, 그를 추종하는 다양한 우익 단체가 생겨났다. 일본인들의 심성 어딘가에는 아직도 이런 정신이 꿈틀대고 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근대화의역사는 곧 시민혁명의 역사라고할 정도로 근대화와 민권 신장은 비례하여 신장되어 왔음에도불구하고, 일본만 유일하게 근대화와 동시에 천황을 위하여목숨을 바치는 천황 중심의 군국주의로 치달았던 데는 요시다쇼인이 뿌린 씨앗이 큰 바탕이되었다.
사람이 출세하려면 천시天時지리地利인덕人德을 다 갖추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이 세 가지를 기가 막히게 타고났다. 전통적인 신분 질서가 파괴되던 유신의 격동기(천시)에 태어나 좋은이웃(지리)을 둔 덕분에 천하의 스승과 기라성 같은 동문들(인덕)을 만날 수있었다.
의회가 설립되기 전 근대화 초기 일본의 국체는 정부와 군부의 2원제체제였다. 군부는 내각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대등한 위치에서 천황의 직속 군대로 독자적인 군령권을 행사했다. 오직 천황의 명령만 받는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천황이 군대를 직접 통솔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군부가 전횡을 하는 체제였다. 일본이군국주의로 치달았던 배경에는 이 같은 독특한 국가 통치체제도 한몫했다. 문민 통제를 받지 않는 일본의 군부는 폭주기관차처럼 제국주의적 침략 전선을 확대했고, 결국은 패망에 이르게 됐다.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이런 독특한 군부의 입지를 확립한 사람이 바로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일본제국의 근대화에 끼친 실제적인 영향력으로 본다면 두 사람이 요시다 쇼인 문하의 최후의 쌍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을_탐한_사무라이> 중에서
일본 근대사에서 가쓰라 고고로는 사쓰마 번薩摩藩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함께 메이지유신을 완성한 유신 3걸로 불리는 인물이다. 료마가 주목한 것은 조키센의 그 엄청난 규모와 신기술이었다. 자신들이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대양을 건너 대륙을 돌아 일본에 내항한 구로후네의 존재를 통해서 료마는 앞으로의 세상은 바다를 정복한 사람들이 지배할 것이라는 영감을 얻게 된다. 그때부터 료마는 오로지 바다를이용한 새로운 사업에 골몰하여 후일 일본 해군과 해운업의 바탕이 되는카이엔타이海援隊를 창설하여 나가사키를 무대로 활동하게 된다. 일본재벌의 원조격인 미쓰비시三菱그룹은 바로 이 카이엔타이에서 사카모토료마의 오른팔로 활동했던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가 사카모토 료마가남긴 유산을 밑천으로 창업한 기업이다. 와다 쇼류가 앞장서 개국을 주장하게 된 연유는 그 자신의 특별한 경험 때문이었다. 그는 표손기략漂巽紀略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손巽은 동남쪽을 가리키는 말로 미국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미국 표류기라는 뜻이었다. 그 자신의 경험담은 아니었고,도사 어부인 나카하마 만지로에게 직접 듣고 쓴 것이다. 만지로는 1841년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어선이 표류하여 미국 포경선에 구출돼 12년간 미국을 유랑하다가 귀국했다. 가와다 쇼류는 만지로가 이런 이력 때문에 막부에 특채되어 에도로 올라가기 전에 찾아가 미국 표류기를 구술 받아 집필했다. 동시에 구로후네를 목격했던 세 사람 중 요시다 쇼인은 신분이 병학 사범이었기 때문에 군사 전략적인 측면에서 이 사태에 대한 대응 방안을 찾으려고 했다. 페리 함대의 위용에 큰 충격을 받고 군비를 서양식으로 고치지 않으면 일본도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쇼인은 러시아 함대가 나가사키에 입항해 있다는 말을듣고 그해 9월 에도를 떠나 10월에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러시아로 밀항을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함대가 이미 떠나버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는데, 도중에 구마모토에 들러 사쿠마 쇼잔과 함께 당대최고의 개화 지식인이었던 요코이 쇼난橫井小楠(구마모토 출신의 사상가이자 개혁가로서 메이지유신에 큰 영향을 끼침)을 만나게 된다. 요시다 쇼인은 아이자와 세이시사이에서 사쿠마 쇼잔, 그리고 요코이 쇼난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직접적으로 교유하면서 자신의 세계관을 완성했다. 이렇게 섭렵한 지식과 사상관으로 내로라하는 제자들을 길러내어 메이지유신의 초석을 닦았는데, 그 전환점이 바로 구로후네의 목격이었다.
러시아에 기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신속히 다시 일본을 찾은 페리 함대는 함정 수도 7척으로 늘었고, 증기선 군함도 포헤탄 호(2,415톤) 1척이추가됐다. 막부 측은 최초 접선 장소였던 우라가 앞바다로 돌아가 달라고요청했으나 페리 제독은 거부하고 첫 내항 때와 같이 에도 만 내부를 측량하는가 하면,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생일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대포를 발사하며 무력시위를 했다. 양측의 기 싸움에 더해 회담 장소인 조약관條約館을 신축하느라고 거의 한 달이 흘러 2월 10일 요코하마橫濱에서최초 교섭이 시작됐다. 미국 함대가 바로 코앞에서 버티고 있는데도 한달을 끌면서 조약 체결을 위한 모양새를 만들어 놓고 협상 테이블에 나온것이다.
하야시 라잔으로 이어지는 일본 성리학의 계보를 계승한 당대 제일의 학자였다. 또 1850년부터 막부의 대외 교섭 자료집인 통항일람通航一覽(345책)을 저술한 대외교섭 전문가이기도 했다. 페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대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편전쟁 이후 막부는 일본에도 비슷한 상황이 올 것을 예상하고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행운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항상준비를 하고 있는 자에게 걸려든다는 이치는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막부 측 대표가 1853년 6월 페리 제독과의 첫 접촉에서 미국 대통령의국서 수령만 하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때와는 달리, 하야시 후쿠사이는 페리의 주장에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도 하고 일본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면서 회담을 이끌어 갔다. 통항일람 편찬 과정에서 축적된 대외 교섭의 노하우가 빛을 발휘했다. 준비된 후에 칼을 뽑는 사무라이의기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특히 이 과정에서 일본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페리를 맞이했는지에 대한 일화가 있다. 최초 개항지인 시모다와 하코다테에서 미국인이 돌아다닐 수 있는 유보遊步 구역을 정하는 협상에서 하야시는 5리,페리는 10리를 주장했다. 유보 구역은 서양인이 일본인의 생활권 내에서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처음부터 강경하게 나왔던 페리는 요코하마에 오기 전에 들렀던 하코다테에서 저지른 실책 때문에 발목이 잡혔다. 하코다테에 먼저 들렀던 페리는 처음에 시찰만 하겠다고 약속하고는상륙하자마자 조약 교섭에 응하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항해 경비를배상하라고 협박했다. 하코다테에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고 10일 만에시모다로 상륙했던 페리는 에도에서 그 일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일본의 후진성을 감안할 때 적어도 50일은 걸려야 보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부는 페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하코다테에서의 상세한 전말을 보고받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결국 시모다는 7리, 하코다테는 5리로 유보 구역이 정해졌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것은 그 전해 9월에 일본이 운요호雲楊號를 보내 강화도에서 의도적으로 도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 조정은 이 배가 일본 함선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운요호에 대한포격을 유도하기 위해 일본이 의도적으로 식별기를 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운요호가 조선에 전혀 생소한 함선은 아니었다. 당시 운요호는 강화도 침투 전 1875년 9월에 부산의 량왜관(倭館. 일본의 상관이 있는 일본인 거주 지역)에 먼저 들렀다. 내항 목적을 묻는 조선의 관리를 승선시켜함포 사격 훈련을 참관시키며 위력 시범까지 보여주고 나서 강화도까지올라와서 포격 사건을 일으켰다. 이 운요호가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강화도에서 충돌이 일어날 때까지 조선 조정은 전혀 운요호의 동태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일본의 유도 작전에 말려들어포격 사건이 일어나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1876년 2월에 강압적으로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페리 함대의 항로를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왜 태평양을건 바로 일본으로 오지 않고 반대편의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돌아 6개월에 걸친 머나먼 항로를 거쳐 왔는가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미국이 왜일본을 강압적으로라도 개항시켜 통상조약을 체결하려고 했는가 하는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고 미국이 개항을 원했던 대상이 왜 조선이 아니고 일본이었는지에 대한 이유도 숨어 있다.증기선의 주 연료는 석탄인데, 한 번 항해에 실을 수 있는 물량은 일주일 치에 불과했다. 따라서 대양 항로를 개척하려면 석탄의 중간 보급 기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대서양과 인도양 항로는 유럽 제국의 식민지 개척으로 중간 보급 기지가 개발되어 있었지만,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바로중국으로 항해하려면 유일한 중간 기착지인 일본에서 연료 보급을 받지않고는 불가능했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서유럽 제국에 거의 무장해제를 당하다시피 하여 대 중국 무역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고 있었다.신생 무역국인 미국은 영국, 프랑스에 이어 1844년에 중국과 통상조약을체결하면서 태평양을 통한 중국 항로의 개설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유일한 중간 보급지였던 일본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무역 항로 개척을 위한 목적보다 더 절실한 이유도 있었다. 미국은1858년 펜실베이니아에서 유전을 발견하기 전까지 고래 기름으로 램프의 불을 밝히고 난방을 했다. 고래 기름을 조달하기 위한 포경선단은 주로 대서양을 어장으로 하고 있었는데, 대서양의 포경업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미국 동부에 포경 항구만 50개, 포경선이 600여 척에 이르렀다.그러나 남획으로 인해 대서양의 어획고가 줄어들자 포경선단은 북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1840년대 미국 서부의 골드러시와 함께태평양 연안 항구가 개발되자 태평양의 포경업은 폭발적인 신장세를 보였다. 이 때문에 당시 하와이는 포경선단의 모항으로 500여 척의 포경선이 기항하여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문제는 하와이를 떠나면 중간 보급 기지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벌어진 교섭에서 두 나라는 에도 만(도쿄 만)의 입구인 시모다下田와 홋카이도의 하코다테箱館, 두 곳의 개항에 합의했다. 미국이 북쪽의 하코다테를 먼저 개항지로 선택한 이유는 북태평양 조업에 나선 포경선단의 중간 기착지로 지리적 접근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시모다는 태평양을 횡단하여 중국으로 항해하는 선박의 중간 기착지로 선정됐다. 이때 미국은 당시 유럽 제국이 중국과 수교할 때 강요한 치외법권을 유보구역 내에서 요구하지 않았다. 영국이 치외법권을 악용하여 중국에서 저지른 횡포로 민족주의적 갈등을 유발한 전례를 반면교사로 삼은 것이다. 오히려 영국의 아편전쟁을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여 일본 측의 호감을샀다.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이런 사탕발림에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수교 조약에 따라 1856년 시모다에 총영사로 부임한 해리스는 1857년 10월 막부 수뇌부와의 회담에서 일본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 미국은 다른 곳에영토를 획득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전쟁으로 영토를 획득한 적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그 전해에 일어난 제2차 아편전쟁에 대해서도 미국은아편을 전쟁보다 위험하게 생각한다고 열변을 토했다(막말 유신幕末維新에서. 이노우에 가쓰오). 영국이 중국을 손보고 일본으로 쳐들어오기 전에 미국과 빨리 통상 조약을 체결하라는 노림수였다. 일본은 나가사키에 있는 네덜란드 상관에서 입수한 정보를 통해 미국이 멕시코전쟁(18461848)에서캘리포니아를 약취하였으며, 전쟁 배상금 대신에 뉴멕시코를 빼앗았고,중국에서는 터키 아편 1천여 상자를 반입하려다 중국에 발각된 사실을거론하며 손을 내저었다. 미국에 밀리기는 했지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2개 항구의 개항과 지정된 항구에서 물자와 석탄을 공급받고 대가를 지불하기로 함으로써 핵심적인 사항이 모두 타결되었다. 1854년 3월3일에 화친 조약이 체결되었고, 페리의 참모장이 조약 등본을 가지고 전함 사라토가 호를 타고 워싱턴의 비준을 받으러 갔다. 미국 상원의 비준을 받아 양국 사이에 비준서가 교환되고 조약의 효력이 발효된 때는 다음해인 1855년 2월이었다. 미국과의 화친(수교) 조약 체결을 계기로 막부는서구 열강의 개국 요구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영국(1854년 8월), 러시아(1854년 12월), 네덜란드(1855년 12월)와 연속적으로 화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1년 만에 서구 주요국과의 수교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미국(1858년 6월),러시아영국네덜란드(1858년 7월), 프랑스(1858년 9월)와 각각 통상 조약을체결하여 당시 서구 열강 5개국과의 수교 및 통상 조약 체결을 완료했다.조선이 1876년 2월에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뒤 서구 열강과본격적인 수교에 나선 것은 미국(1882년 5월)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이시작이었다. 그 후 영국독일(1883년 11월), 이탈리아(1884년 6월), 러시아(1885년 10월)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주목할 점은 일본이 수교를 위한 화친 조약을 선행하고 34년의 시간이 흐른 뒤 통상(무역) 조약을 체결한데 비해, 조선은 수교와 통상 조약을 동시에 체결했다는 사실이다.일찍 문을 연 일본은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단계적으로 시장을 열면서 시행착오를 교정해 나갔지만, 출발이 늦었던 조선은 그와 같은 시행착오를 교정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조선과 일본의 개국(수교) 시점 자체도22년(일본 1854년 : 미국조선 1876년 : 일본)의 격차가 있지만, 서구 열강을 대상으로 한 실질적인 개항(통상)을 따지면 그 격차는 24년(일본 1858년 : 미국조선 1882년 :미국)으로 벌어진다. 이 기간에 일본은 근대화를 위한 국체 변경(왕정복고)과 국가 제도의 개혁(폐번치현 :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을 거의 마무리했고, 조선은 이 24년간의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본에 합병됐다.
가나가와조약 체결 당시 페리는일본에 줄 선물로 매우 의미 있는 신문물을 준비했다. 페리는 당시로서는 첨단기술이었던 증기기관차를 실제 작동이 가능하도록 정교하게 축소한 모형을 가져온 것이다. 길이 3.2미터, 폭 2.2미터에 이르는 제법 큰 모형으로, 100미터의 레일까지 가져와 실제 조립하여 작동 시범을 보였다. 일본은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872년 10월에 도쿄 신바시新橋와 요코하마를잇는 최초의 철도 노선을 개통하게 된다. 일본이 철도 강국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899년 9월에 개통된 조선 최초의 경인선 철도보다27년이나 빨랐다.
시간적인 격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은 미국, 일본 자본과 기술을 들여와 땅과 노동력만 제공하고 철도를 개설했지만, 일본은 영국 유학을 다녀온 국내 기술진의 힘으로 건설했다. 근대화라는 변혁이 세월이 라는 물리적 공간을 거슬러 이루어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은 철도부설의 시간적 격차에서도 나타난다. 근대화에는 좀 더 많은 축적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선은 더 분발했어야 했고 더 깨어 있어야 했으나, 그때까지도 조선은 조용한 은자隱者의 나라였다.
<조선을_탐한_사무라이> 중에서
세 번째 무가武家정권으로 탄생한 도쿠가와 막부(1603~1867.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마지막 무사정권)는 250년간 외부 세계와 문을 닫고 태평세월을 구가했다. 전통적으로 무사정권이 집권해 온 일본에서 전쟁이 없는 세월을이렇게 오래 누린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 태평세월에 종지부를찍은 사건은 불과 4척의 조키센, 즉 증기선蒸氣船이었다. 흑선 전단은 기함 서스케해나(2,450톤) 호를 선두로, 순양함 미시시피(1,692톤) 호, 전함 플리머스(989톤)호와 사라토가(882톤) 호 등 4척으로 구성된 미국 함대였다. 불과 4척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일본 전체 해군력을 총동원해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의 막강한 화력을가진 함대였다. 조키센 함대가 일으킨 풍파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당시 에도의 서민들 사이에는 이런 노래까지 유행했다. 태평의 잠을 깨우는 조키센, 겨우 넉 잔으로 밤잠을 설치네.
쇼군 밑에는 로쥬老中라고 하는 수석 각료 35명이 있었는데, 로쥬는도쿠가와의 측근 다이묘 중에서 선발하여 쇼군을 보좌하는 직위로 조선의 정승과 비슷한 지위였다. 도쿠가와의 직속 가신으로 1600년 천하통일후 영지를 받은 다이묘를 후다이譜代 다이묘라 하는데, 로쥬는 반드시 후다이 다이묘 중에서 선출됐다. 반면에 도쿠가와의 적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 출신으로 세키가하라 대회전 이후에 도쿠가와에 귀순하여영지를 보존하게 된 다이묘를 도자마外樣 다이묘라 한다. 도자마 다이묘는 도쿠가와 막부 260년 동안 막부 로쥬로 한 번도 등용되지 않았다. 이렇게 260년 동안 응어리진 한이 메이지유신으로 분출하여 막부를 몰락시킨 원동력이 된다. 페리가 내항했을 당시 쇼군 이에요시는 의사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로위독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의 운명은 전적으로 아베 마사히로의 결단에 달려 있었다.
아베 마사히로는 페리 제독이 가지고 온 필모어 대통령의 국서를 도사번土佐藩(지금의 고치 현)의 표류 어민으로 미국에서 12년 동안 생활하다1851년에 돌아와 있던 나카하마 만지로中濱万次郞에게 번역을 시켰다. 만지로는 미국에서 돌아온 뒤 그 가치를 인정받아 하급 신분 출신으로는 파격적으로 하타모토旗本(쇼군의 직속 무사)의 관직을 받고 막부에 봉직하고 있었다. 페리 함대가 내항했을 당시에도 직접 통역이 가능한 유일한 인물이었으나 하층 계급 출신인 그가 전면에 등장하는 것을 견제한 막부 고위관리들의 제지로 통역에 나서지 못했다. 마사히로는 만지로가 번역한 페리 국서를 막부의 모든 관리와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배포했다. 일반 백성들에게도 일부를 배포했다. 그리고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막부에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마사히로의 이 같은 파격적인 조치는 페리 함대가 이미 만천하에 공개 되었기 때문에 막부의 내부적인 미봉책으로 사태를 수습할 상황이 아니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차라리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모두 쏟아내게 하여 그중에서 혜안을 찾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페리 함대와 국서 전달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에백가쟁명百家爭鳴의 주장들이 잠재되어 있을 것이므로 이를 분출하게 해주지 않으면 사회적인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이를 통해 약 700통의 의견서가 접수됐고, 이 과정에서 개국론과 양이론이 충돌하면서 존왕양이 운동이 본격적으로 분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상의하달의 일방통행식 명령 체계만 존재하던 막부 체제에서 일반 백성까지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는 통로를 열어 줌으로써, 각지의 지사들이 횡적으로 소통하여 하나의 여론을 형성해 가는 새로운 공론, 즉 횡의橫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변화에 편승하여 급격하게 형성된지사 집단이 바로 존왕양이 세력이었다. 이렇게 생성된 존왕양이 세력의봉기에 의해 결국은 막부의 몰락을 초래하고 말았지만,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보면 마사히로의 결단은 일본 역사를 진일보시킨 위대한 결단이었다.
<조선을_탐한_사무라이> 중에서
내각과 군부를 망라하여 당시 일본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인물들이 조선 침탈에 총력전을 펼쳤다는 점은 그 면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모두 야마구치 현 출신이어야 했는가? 10명의 정점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 학숙에서 동문수학했다. 두 사람은 요시다 쇼인에게서 배운 1년 남짓한 기간이 평생 학력의 전부였고, 그 학력으로 천하를좌지우지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사실 학숙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천출이었다. 사무라이의 자제들만 배울 수 있었던 시절에 요시다 쇼인은신분을 가리지 않고 제자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그 은덕을 입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은 후일 메이지유신을 이끈 주역들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여기서 맺은 사무라이들과의 인연을 디딤돌로 혁명의 과도기에 천출에서 사무라이로 신분 세탁을 할 수 있었고, 상급 사무라이였던 이노우에 가오루를 평생의 동지로 얻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고무라 주타로와 하야시 곤스케를 제외한 8명이 직간접적으로 쇼카손주쿠 학숙의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자랐다. 결국 조선을 삼킨 아메바는 야마구치현 하기 시골 마을의 작은 학숙이 숙주였다.
막부 말기 일본에는 약 260개의 번(藩. 도쿠가와 막부시대 1만 석 이상의 영지를보유했던 봉건 영주의 직할령)이 있었다고 하는데, 조슈 번이 어떻게 한 시대를뒤흔들 정도로 수많은 인재를 동시에 배출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불과다다미 8장의 초라한 시골 학숙이 분화구가 되어 폭발적으로 인재를 쏟아낼 수 있었을까? 이 시골 학숙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가르쳤기에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막부 체제를 타도하고 천황국가를 건설한 주역이 되었을까? 그들의 칼끝은 왜 조선을 겨누었을까?
야마구치 현에서는 전후戰後에 4명(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간 나오토, 아베 신조)의 총리가 더 나와서 모두 9명의 총리가 배출되었다. 특히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한국과 일본이 60년에 걸친 구원을 끊고 국교를 정상화할 때의 총리도 야마구치 출신인 사토 총리였다. 한일합병과 한일협정이 모두 야마구치 출신 총리의 손을 거쳐 이루어진 것을 보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가던 길을 계속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전율마저 든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러시아 관할 지역에서 국제법을 무시하고 일본 법정에 세워사형 판결과 집행을 속전속결로 처리한 인물이다. 그 또한 야마구치 출신이다. 아베 총리의 진외가陳外 (아버지의 외가) 고조할아버지가 바로 이 사람이다. 아베 총리가 안중근 의사에 대해 ‘사형 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라고 단언했던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요시다 쇼인이 학숙에서 기른 제자 90명 중 그가 끔찍이 아꼈던 준재들은 메이지유신의 혁명 과정에서 비명횡사하거나 요절했다. 뛰어났기에혁명 대열에 일찍 가담했고,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던졌다. 생사가 확인된 제자 50여 명 중 절반이 그렇게 젊은 나이에 혁명 전선에서 숨졌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천출이라 처음부터 전면에 나서지는 못하고 다카스키 신사쿠의 부하로 그 뒷줄에 서 있었기 때문에목숨을 보전했다. 유신이 성공한 이후에도 요직을 차지했던 상급 사무라이 출신들이 권력 암투로 암살되거나 내전으로 전사 또는 과로로 병사하면서 사라진 공백을 이 두 사람이 차지했다. 천출이라 기득권층인 사무라이 신분에 대한 빚이 없었던 두 사람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개혁의 주역으로 나서 혁명의 과실을 독점하고 내각과 군부의 권력을 양분했다. 한일합병 추진에 주도적 역할을 한 조슈 번 출신의 주역들은 이 양대 인맥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었다.
쇼인은 그들에게 조선에 대해 무얼 가르쳤을까? 쇼인은 역사서라기보다는 픽션에 가까운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맹신자로, 일본의 지각 있는 역사학자들조차 그 실체를 인정하지 고 있는 ‘신공황후神功皇后(한반도에 출병하여 신라를 정벌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된 인물)’의 한반도 정복설을 굳게 신봉했다. 신공황후의 한반도 정복설을 굳게 신봉하고 있던 요시다 쇼인에게 조선을 병탄하는 것은 일본이 당연히 추구해야 할 ‘국체의 완성’이라는 대업이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신성神聖의 도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했고, 조선통신사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조선을 상국처럼받들었던 도쿠가와 막부는 국체의 정립을 위해 마땅히 토벌해야 한다고했다.
쇼인은 첫 번째 규슈 여행에서 사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양분을 제공한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된다. 쇼인이 태어나기 5년 전(1825년)에 ‘아이자와 세이시사이會澤正志齋’라는 국학자가 쓴 『신론新論』이었다. 이 책은 메이지유신의 발화점이었던 존왕양이尊王攘夷(천황의 권위를 회복하고 외세를 배격하는막부 말기의 정치사상) 운동의 이론적 교과서로서 유신혁명에 목숨을 걸었던지사들의 필독서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일본의 국가 지도자들은 러시아에 대해과도할 정도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해야 했던 러시아가 조선에 접근하면서 남하 정책을 펴자 한반도를 일본의 허리를 찌르는 단도로 인식했다. 아관파천을 전후한 시점부터 조선이 러시아로 급격하게 기울자 조선이 러시아에 그 칼의 손잡이를 쥐어 준 것으로 판단했다. 그 시점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아이자와 세이시사이의 러시아 경계론은 요시다 쇼인을 통해 그대로 계승됐고, 쇼인에게 사숙했던 조슈 번의 근대화 주역들이 조선에 칼끝을 겨눈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서양 제국주의의 침탈 과정에 대해 먼저 통상을 통해 상대의 동정을엿보다가 틈이 보이면 군사적으로 침략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기독교를 전파하여 민심을 동요시킨다고 기술했다. 해외에 한 번도 나가 보지않고도 이렇게 정확하게 식민지 개척의 실상을 기술했다는 점에서 아이자와 세이시사이가 상당한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이자와 세이시사이가 쓴 신론은 일본 국수주의의 뿌리를 내린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청년기 사상적 흡수력이 가장 강한 시점에 처음으로 접한 외부 서적이 바로 이 책이었다는 사실은 요시다 쇼인의 그 후 사상적 행로를 극단의 국수주의로 치닫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된다. 문제는 그렇게 사상적 편력을 거친 쇼인의 문하에서 메이지유신을주도하고 일본 근대화와 제국주의를 완성하여 아시아 침략의 선봉에 섰던 주역들이 대거 배출되었다는 데 있다. 사쿠마 쇼잔은1811년 마쓰시로松代 번(지금의 나가노현)에서 태어난 국학자로 해군력의 강화를 요점으로 하는 해방론海防論을 서양 세력의 내침에 대한 대비책으로 제시하여 개항 초기 막부의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아이자와 세이시사이가 서양 세력의 내침을 막기 위한 전략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면 사쿠마 쇼잔은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다. 주자朱子는 송나라 명신들의 언행을 기록한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에서 위기에 필요로 하는 세 가지 능력으로 잘 보는 것이 첫째요, 보고 행하는 것이 둘째요, 행해야 할 때 과감하게 결단하는 것이 그 셋째라고 했다. 사쿠마 쇼잔 평전을 쓴 마쓰모토 겐이치松本健一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쇼잔은 잘보는 사람, 즉 상황 판단에 대한 인식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라고 기술했다. 쇼인은 사쿠마 쇼잔에게서 동서양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였고, 양이攘夷를 위한 방법론으로서 개국의 불가피성 등을 배웠다.무조건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소양이小攘夷를 하지 말고 그들의 실력을배워 서양의 기술로 서양을 제압하는 대양이大攘夷를 해야 한다는 것이사쿠마 쇼잔의 지론이었다.
<조선을_탐한_사무라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