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 시인선 475권. 2015년 올해로 등단 15년차를 맞는 시인 이민하의 네번째 시집. 2012년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한 작품 '세상의 모든 비밀'을 포함한 총 61편의 시가 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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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세상의 모든 비밀 내용 요약
이민하 시인의 산문집 《세상의 모든 비밀》은 우리 일상의 평범한 풍경 속에서 길어 올린 깊고 서정적인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거창한 진리를 설파하기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하는 사소한 슬픔과 고독,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하는 작지만 소중한 위로의 순간들을 시적인 언어로 풀어냅니다. 저자는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수많은 질문들, 이를테면 사랑과 이별, 상실과 회복, 그리고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해 차분하고도 따스한 시선으로 응답합니다. 📖
한 사람이 공놀이를 한다
공은 공중을 돌아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다
공이 바닥에 닿기 전에 발은 움직인다
다시 머리 위로 솟구칠 때
구부러진 발등과 이마는 키스처럼 가깝고
두 사람이 공놀이를 한다
공은 두 손에서 뻗어 가슴을 향해 파고든다
공중에 떠 있는 눈은 온몸을 잡아당기고
공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두 사람은 점점 멀어진다
공이 덤불에 처박혀 달걀처럼 깨질 때
공을 주우러 간 그림자는 기차처럼 길고
두 손을 털고 사람들이 떠난 길 위에
수만 갈래 힘줄을 뻗는 공은 지구보다 넓고
하늘이 한 뼘 더 두꺼워진 다음 날
낯선 공이 떠도는 공터에 모여
세 사람이 공놀이를 한다
공은 공중으로 솟구쳐 공중으로 나아간다
바닥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방향을 잡고
공은 새가 된다
한 사람에게 날아가지만 세 사람의 심장이 뛴다
두 사람이 공을 주고받을 때
망을 보는 한 사람은 비밀처럼 뜨겁고
- ‘체육 입문’, 이민하
눈을 떠요 엄마, 나를 좀 깨워줘요
교복을 다려줘요 노란 리본도 달아줘요
어둠에 갇힌 친구들이 돌아올 수 있게
다락방에 쌓인 동화책 속에서 램프를 꺼내줘요 양탄자도 깔아줘요
두 눈을 떴는데도 몸은 왜 묶여 있나요
가위눌린 거라면 토닥토닥 자장가를 불러줘요
나쁜 꿈을 꾼 거야 너도 그렇지?
혼자서 앓지 말고 일어나 얘기해봐요
얘야, 오늘은 일요일이란다 마음껏 자렴
미소라도 지으며 둘러대봐요
거짓이라도 지어서 속삭여줘요
아이들이 걸상에 앉아 죽음의 교과서를 펼치고 있어요
손을 잡아주세요 시를 읽어주세요
악기도 없이 반복되는 침묵의 연주를 멈춰주세요
아이들이 강당에 남아 끝이 없는 왈츠를 돌고 돌아요
눈을 떠요 엄마, 오후가 지나갔어요
정수리에 피딱지가 앉을 수 있게 석양이라도 쬐세요
등뼈가 기우는 엄마 옆에서 곁눈질하는 해바라기씨처럼
볕 좋은 창가에 뿌려지고 싶어요
멈춰 있는 달력을 넘겨줘요 장맛비가 와도 사월의 수요일
슈퍼문이 겉돌다 가는 추석에도 死月의 水요일
창유리엔 청얼음이 깔리고 있는데
이제 그만 눈꺼풀을 덮어줘요
물방울 같은 내 눈을
물보라 치는 내 심장을
물거품 이는 내 발꿈치를
그림자 속에 담아두지 말아요
기억하는 건 내가 할게요 엄마가 늙어가는 새벽이면 사진 속으로 돌아와
우는 건 내가 할게요 마르지 않는 물이 되어
얼굴을 씻는 아침마다 그릇을 닦는 저녁마다
수도꼭지만 틀면 흘러나온는 긴 물소리, 그건 나의 노래
갈라 터진 가슴을 축이는 한 모금의 물, 그건 나의 입맞춤
눈을 떠요 제발, 누워 있지만 말고 차라리 울기라도 하세요
책상 위의 금붕어들을 버려두지 말아요 피고 지는 눈물로
어항 속에 고인 피를 갈아주세요
금붕어들이 깨물 때마다 물의 혀처럼 일렁이는 물풀들
자를 수 없는 물빛, 그건 우리의 숨결
- ‘수인(囚人) - 죽은 시간 속에서’, 이민하
눈을 감은 사람의 얼굴은 어디에 있나
눈꺼풀의 안쪽과 바깥
한 사람이 옷을 훌훌 벗는다면
부끄러움은 누가 뒤집어쓰나
벗은 몸의 안쪽과 바깥
당신은 깊은 잠에 빠져 있고
나는 당신 안에서 빠져 있는데
서로를 향하여 끝없이 멈추는 움직임 속에서
정지한 사람의 두 발은 어디에 있나
한 뼘과 천 길 사이
굳게 닫힌 눈과 입
실금이 간 얼굴로 시체처럼 누워
당신은 가장 가깝고
나는 가장 먼 곳에서
껍질과 수염을 벗겨내고 옥수수알을 씹는다
천 개의 알갱이를 입 안에서 터뜨리며
당신을 자꾸 귀에 대본다 깜깜한 백지처럼
입을 다문 사람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나
입술의 안쪽과 바깥
배시시 눈을 비비며 마주 보는 당신은
멀리서 불빛을 보고 숙소로 찾아든 이방인 같다
모호한 발음으로 인사를 나눠야 할 것 같다
눈빛을 껐다 켰다
유리문을 열고 닫으며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들 같다
가장 투명한 곳에서
- ‘육체의 비밀’, 이민하
내 이름을 새기겠다는 사람을 벼랑에서 새처럼 떨어뜨렸다
그럼 난 누가 밀어주지?
눈이 터질 것 같으면 눈을 닫고 입이 터질 것 같으면 입을 열면 그만인데
걷다가도 곤두서는 몸으로
자다가도 쓰러지는 몸으로
내 이름이 새겨진 한 권의 시간을 벼랑으로 끌고 갔다
어떤 날은 풍선처럼 빵,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손을 끊는 심정으로
날개를 펴는 심정으로
발톱을 세운 바늘이 독수리처럼 손목 위를 맴도는데
뼛속까지 찌를 수 있는
바늘의 질주는 어떻게 멈추는가 속도와 힘을 조절하는 건 머리인가 손인가
피부와 마음 사이
통증과 무감각은 어느 지점에서 교차하는가
이봐요 당신, 나를 찌르고 싶니? 쑤시고 싶어 죽겠지?
그는 정말 나를 쑤시고 기억 속으로 뺑소니쳤다
많이 아프면 얘기해요
나는 잠만 오는데 당신은 벌써 약해졌나
내 손목이 찔리는 건지 당신 마음이 찔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순간이 지나고
자, 오늘을 남깁시다
그의 폴더와 책날개에 나란히 박히는 비포 앤 애프터
과거와 결별하려고
몸과 마음은 어디서 입을 맞추나
실내에서만 발을 뻗는 비밀들이 건물들마다 모여있다
똑같이 쓰고 앉으면 웃음이 안 나는
미용실 모자 같은 것
이제 벗길 일만 남았다는 듯 입은 모이는데
목욕탕의 이웃들이 얼굴을 가리지 않고 때를 벗기듯이
벌거벗은 두 남자가 모텔방의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 듯이
더 이상 벗을 수 없을 때
손가락들은 달라붙는가 흩어지는가
아름다운 노출의 수위는 어디까지인가
다 벗지도 않을 거면서
온몸에 문신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까요?
기분이 아니라 결심이죠 통증에 중독된 사람도 있고요 고통을 못 참고 달아나는 사람도 있어요
담벼락의 낙서를 긁듯 즉석복권을 긁어대듯 문신을 지운 사람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횡단보도의 흔적 위를 건너가고 있었다
두껍게 비누칠을 한 알코올 중독자들이 이제 막 떠돌기 시작한 거리에서
모퉁이마다 비추고 있는 스탠드 불빛을 따라
나는 손목을 끌고 골목에서 골목으로 책갈피처럼 넘어갔다
바코드가 새겨진 손목으로
묘비명이 새겨지는 골목으로
- ‘tatoo’, 이민하
나는 옆집 아이의 태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애 아빠의 정치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
왜 그들은 내게 입막음을 안 하나
하루아침에 미용실 여자가 미인이 된 까닭을,
편의점 남자가 시인이 된 까닭을, 그들이 손잡고 구청에 간 까닭을,
석 달 후 남자 혼자 구청에 간 까닭을 나는 알고 있는데
여자의 머리색이 남자의 정치색과 어울려
신발 속에 감춰진 짝짝이 양말처럼 아무도 모르게
호들갑을 피우는 오후
선박처럼 무거운 귀를 잠시 멈추고 잠이 오는 의자에 앉아
문맹인 나는 머리색을 바꾸고
색맹인 애인은 이별의 편지를 바꾸고
내 귀를 타고 밀입국한 사람들은
어떻게 빠져나온 것일까 반대편 귀를 향하여
얼굴을 뒤집고
지하철 남자의 의족이 지상의 물결 위로 떠오를 때
인어공주가 되는 이야기
아름다운 두 다리의 침묵에 대하여
진위 논란으로 시끄러운 세상에 대하여
칼의 입맞춤 대신 물거품이 되어 바다에 녹아버린
성전환자의 슬픈 동화 속에서
목소리를 가로챈 마녀의 기술처럼
목사의 안수기도에 섞이는 어떤 성분들
이를테면, 앞 못 보는 어둠의 눈을 번쩍 후려치는
어떤 선언들
늙은 소녀들은 아직 사랑이 넘치고
구걸하는 남자들은 눈물이 넘쳐서
기울지도 침몰하지도 않는
어떤 세계에서
흩어진 나의 비밀들은 어느 귀를 타고 흘러가는가
내가 같은 남자와 백 번째 헤어진 날에 대해
당신은 지금 내 비밀 하나를 보관 중이다
혀처럼 얇게 저며진 물결 하나가 귓속으로 들어갔다
의도하지 않아도
언젠가 귀를 기울이는 쪽에서
당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를 것이다
- ‘세상의 모든 비밀’, 이민하
세탁부와 청소부의 사랑을 먹고 자라서
나는 정물의 세계에 고용되었다
아버지의 빗자루와 어머니의 다리미와
부드러운 맨손이 번갈아 지나가는
규칙적인 손놀림과
척추를 구부려 채찍질하는 인사법 속에서
나는 어디까지 공손해질 수 있는가
사물에 대한 예의를 베끼고
기다림의 대가를 외우고
몸이 다른 종족을 감싸며
기꺼이 한 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공원에 단정히 앉아 있는 나무 벤치처럼
옷걸이에 걸린 세탁소의 낡은 셔츠처럼
늘 새롭게 접혀 있는 모텔 선반 위의 수건처럼
벗은 몸을 세탁하고 누워
쫙 폈다가 힘없이 늘어지다가
각이 지게 접으면서 하얗게 잠들었다
나무관절 사이로 비가 내려 혼자서 젖는 날에도
계절이 바뀌도록 비닐커튼에 싸여 숨 막히는 날에도
길 위의 하룻밤이 여행에서 쓸모없어진 날에도
- ‘요조숙녀’, 이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