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 대하여

강남순 지음 | 동녘 펴냄

용서에 대하여 (용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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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7.1.5

페이지

264쪽

상세 정보

그 사람을 도저히 용서하기 힘들 때
용서에 대한 이해와 의미를 들여다보는 책

정치·철학·종교·심리학 등 다양한 인문학 영역을 넘나들며 연구를 해온 강남순 교수가 ‘용서’라는 하나의 주제를 철학적으로 성찰한 책이다. ‘용서’라는 주제가 지금까지 주로 신학적 영역에서 많이 다루어져 왔고, 철학 분야에 있어서도 자크 데리다나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한나 아렌트 등의 단편적인 글을 통해 용서를 성찰한 사례는 있지만, 이렇게 하나의 주제로서 용서의 의미와 이해를 총체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깊다.

이 책은 현대사회에서 심각하게 논의되는 주제인 ‘용서와 화해’의 의미를 정치적·철학적·종교적으로 예리하게 탐색한다. 이 책은 단순히 철학적 의미로서의 용서를 넘어서 윤리적·철학적·정치적으로 그 의미를 확장시킨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 나치의 유대인 학살,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는 위안부 문제 등 폭력과 살상으로 점철된 어두운 역사 속에서 용서의 의미를 논의한다. 저자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두 질문을 들려준다.

“용서란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프랑스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가 홀로코스트를 두고 한 말이다. 한나 아렌트 역시 처벌이 용서의 공통적 조건이며, ‘용서의 가능성’은 ‘처벌의 가능성’이 전제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장켈레비치의 입장에 섰다. 반면, “용서란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는 자크 데리다가 한 말인데, 이는 무조건적 용서를 의미한다. 이 무조건적 순수성의 용서는 칸트적 의미에서 ‘도덕적 법률’이며, 레비나스적인 의미에서는 ‘무한한 책임성’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 그리고 화해할 수 없는 것과 화해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 무조건적 용서의 정언명령이다. 이러한 점에서 무조건적 용서와 조건적 용서는 용서의 두 축을 이룬다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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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선서

@ryhs2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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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하여

강남순 지음
동녘 펴냄

읽었어요
14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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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음

@i6qml68figag

그러나 여전히 김소리를 용서할 수가 없다.

용서에 대하여

강남순 지음
동녘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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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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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정치·철학·종교·심리학 등 다양한 인문학 영역을 넘나들며 연구를 해온 강남순 교수가 ‘용서’라는 하나의 주제를 철학적으로 성찰한 책이다. ‘용서’라는 주제가 지금까지 주로 신학적 영역에서 많이 다루어져 왔고, 철학 분야에 있어서도 자크 데리다나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한나 아렌트 등의 단편적인 글을 통해 용서를 성찰한 사례는 있지만, 이렇게 하나의 주제로서 용서의 의미와 이해를 총체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깊다.

이 책은 현대사회에서 심각하게 논의되는 주제인 ‘용서와 화해’의 의미를 정치적·철학적·종교적으로 예리하게 탐색한다. 이 책은 단순히 철학적 의미로서의 용서를 넘어서 윤리적·철학적·정치적으로 그 의미를 확장시킨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 나치의 유대인 학살,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는 위안부 문제 등 폭력과 살상으로 점철된 어두운 역사 속에서 용서의 의미를 논의한다. 저자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두 질문을 들려준다.

“용서란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프랑스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가 홀로코스트를 두고 한 말이다. 한나 아렌트 역시 처벌이 용서의 공통적 조건이며, ‘용서의 가능성’은 ‘처벌의 가능성’이 전제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장켈레비치의 입장에 섰다. 반면, “용서란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는 자크 데리다가 한 말인데, 이는 무조건적 용서를 의미한다. 이 무조건적 순수성의 용서는 칸트적 의미에서 ‘도덕적 법률’이며, 레비나스적인 의미에서는 ‘무한한 책임성’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 그리고 화해할 수 없는 것과 화해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 무조건적 용서의 정언명령이다. 이러한 점에서 무조건적 용서와 조건적 용서는 용서의 두 축을 이룬다고 저자는 말한다.

출판사 책 소개

왜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에 전제조건이 있는가?
”도대체 용서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2015년 1월 10일 새벽에 일어난 일명 ‘크림빵 뺑소니’ 사건은, 임신한 아내에게 줄 크림빵을 사들고 귀가하던 한 남자가 차에 치여 사망했던 일을 말한다. 남자를 친 운전자는 그대로 도주했으나, 결국 자수했고 피해자의 아버지는 오랜 고민 끝에 아들을 죽인 뺑소니차 운전자를 용서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그 운전자를 만난 다음 날, 그 용서를 번복하며 분노했다. 이유는 뺑소니차의 운전자가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고 태도에서도 진정성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가해자의 뉘우침을 용서의 전제조건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용서란 무엇인가. 저자는 이 사건을 보며 용서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담은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이 크림빵 뺑소니 사건을 보며 저자는 ‘용서’에 대해 수수께끼 같은 물음을 던진다. 크림빵 사건의 직접적 피해자는 이미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직접적 피해자가 이미 존재하지 않을 경우,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누구에게 진정으로 ‘용서할 자격’이 있을까. 피해자의 부인인가, 그를 낳은 어머니인가. 직접적 피해자가 아니라 간접적 피해자인 아버지가. 과연 “나는 용서한다”라며 용서의 행위를 할 수 있는가. 또한 용서를 하지 않는 것과 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왜’ 우리는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하면 피해자가 분노나 복수의 마음에서 해방되기 때문인가. 아니면 가해자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인가. 용서는 ‘언제’ 해야 적절한가. 예를 들면 가해자가 용서를 요청한 후인가, 아니면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는 것과 상관없이 아무 때나할 수 있는가. 또한 용서에는 반드시 전제조건이 있는가. 즉 용서를 하기 전에 잘못을 저지른 가해자가 뉘우치거나 회개해야만 비로소 용서가 가능한가. 이러한 물음들은 용서의 지평이 얼마나 복잡한지 보여준다. 이 책은 그 물음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사소한 일상의 문제부터, 위안부 문제와 같은 정치적 의미까지,
총체적으로 용서에 대한 이해와 의미를 들여다보는 책

이 책은 정치·철학·종교·심리학 등 다양한 인문학 영역을 넘나들며 연구를 해온 강남순 교수가 ‘용서’라는 하나의 주제를 철학적으로 성찰한 책이다. ‘용서’라는 주제가 지금까지 주로 신학적 영역에서 많이 다루어져 왔고, 철학 분야에 있어서도 자크 데리다나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한나 아렌트 등의 단편적인 글을 통해 용서를 성찰한 사례는 있지만, 이렇게 하나의 주제로서 용서의 의미와 이해를 총체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깊다. 저자가 용서의 개념에 대해 학문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글 <용서에 관하여(On Forgiveness)>를 읽고 난 후부터였고, 그 글을 보면서 “내가 용서를 얼마나 상투적으로만 생각했는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현대사회에서 심각하게 논의되는 주제인 ‘용서와 화해’의 의미를 정치적·철학적·종교적으로 예리하게 탐색한다. 이 책은 단순히 철학적 의미로서의 용서를 넘어서 윤리적·철학적·정치적으로 그 의미를 확장시킨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 나치의 유대인 학살,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는 위안부 문제 등 폭력과 살상으로 점철된 어두운 역사 속에서 용서의 의미를 논의한다. 저자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두 질문을 들려준다. “용서란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프랑스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가 홀로코스트를 두고 한 말이다. 한나 아렌트 역시 처벌이 용서의 공통적 조건이며, ‘용서의 가능성’은 ‘처벌의 가능성’이 전제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장켈레비치의 입장에 섰다. 반면, “용서란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는 자크 데리다가 한 말인데, 이는 무조건적 용서를 의미한다. 이 무조건적 순수성의 용서는 칸트적 의미에서 ‘도덕적 법률’이며, 레비나스적인 의미에서는 ‘무한한 책임성’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 그리고 화해할 수 없는 것과 화해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 무조건적 용서의 정언명령이다. 이러한 점에서 무조건적 용서와 조건적 용서는 용서의 두 축을 이룬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두 축은 분리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어느 한쪽으로 환원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다만 구체적 현실에서 책임 있는 정치적 행동과 결정을 하려면 무조건적 용서는 두 축 사이에서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절충하면서 영원한 참고의 축을 이루어야 한다고 이 책은 강조한다.

용서를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은 물음’을 던져라!
용서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물음을 갖게 되는 책

저자는 이 책을 읽는 이들이 용서에 대한 ‘해답’을 구할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정황에서 용서에 대한 새로운 ‘물음’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좋은 물음’이야말로 용서에서 가장 중요한 첫 단계라는 점도 강조한다. ‘좋은’ 물음은, 질문받는 사람이 이전에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에 대한 생각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예/아니요’라는 답만을 전제하는 물음은 ‘나쁜’ 물음이다. 그런 맥락에서 용서에 관한 ‘좋은’ 물음은 왜곡된 용서나 용서의 남용을 최소화하게 하며, 새로운 사유의 세계로 인도하는 초청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좋은 물음’을 묻는 법을 배우고 치열하게 그 물음을 던짐으로써, 한 개인이나 사회는 ‘냉소적 방관자’가 아닌 ‘비판적 개입자’ 역할을 하게 되며 삶에서 자신을 더욱 새로운 변화의 주체로 만들어나갈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좋은 물음’이란 냉소적 물음이 아닌,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물음이다. 비판적 물음은 우리를 용서의 상투성에서 끄집어내어 용서의 복합성과 필요성, 다층적 딜레마들과 마주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용서의 세계에 한 걸음 들여놓게 한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구체적 ‘지침서’가 아니다. 또한 독자들에게 ‘무엇을 해야만 한다’며 교훈을 주려는 ‘교훈서’도 아니다. 저자의 의도는 용서라는 자명해 보이는 개념에 다양한 측면에서 어떻게 접근할 수 있으며, 그 개념의 구조가 얼마나 복합적인지 보여주려는 것이다. 용서가 필요한 상황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모든 용서가 서로 유사해 보일지라도 구체적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용서에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모든 상황에 들어맞는 ‘용서-일반’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용서에 대한 이해와 실천은 각자가 처한 정황에 따라 매번 새롭게 생각해야 할 과제다. 이 책을 통해서 나눌 대화는 저자와의 대화이기도 하고, 독자 자신과의 대화이기도 하며, 또한 이 책 너머에 존재하는 다양한 타자들과의 대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폭력이 난무하는 이 잔혹한 시대에서 용서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진정한 정의’를 향한 여정으로서의 책

21세기 들어 세상 곳곳에서 개인적 차원이나 정치적 차원의 다양한 폭력과 잘못된 일들이 벌어진다. 지구촌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으며, 유럽의 시리아 난민들은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일상적 삶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세계적인 정황에서 국가 간의 관계뿐 아니라, 개인들의 관계 속에서도 다양한 얼굴을 한 폭력과 상호 증오가 난무한다. 이 잔혹한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고 반응해야 하는가. 어쩌면 용서와 화해는 잔혹한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용서에 대한 이 책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 삶에서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내는 갖가지 양태의 잘못된 일들을 넘어서서, 모두가 살아갈 만한 세계를 추구하고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용서가 없다면 삶은 어떻게 될까. 한나 아렌트는 용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을 열어주는 행동이라고 본다. 인간은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이러한 불완전성으로 인해, 인간은 수많은 잘못을 저질러 타자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스스로가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인간 삶의 조건에 용서가 없다면 우리 모두는 자신을, 또는 타자를 ‘잘못의 감옥’에 가두고 현재나 미래의 부재 속에 ‘과거의 존재’로만 살아갈 것이다. 또한 인간은 새로운 현재와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이 부재한 삶을 살아갈 운명에 놓인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인간과 그 인간이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에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참으로 중요한 행동이자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의미에서의 용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전이하게 한다.
저자는 용서에는 완결점이 없다고 말한다. 진정한 사랑에 완결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진정한 용서란 한 발자국씩 발걸음을 떼어놓는 여정이라는 소박한 결론으로 책을 마무리 짓는다. 모든 인간이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가 지향하고 실천하려는 가치들을 ‘완전히’ 또는 ‘온전히’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의·사랑·평화·평등·연대·우정 그리고 용서 같은 인류 보편 가치의 완전한 실현은 언제든지 다가올 일이다. 용서는 언제나 용서의 여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정으로서의 용서는 끊임없이 더욱 완전한 용서, 더욱 무조건성에 가까운 용서를 생각하고 그것을 향해서 나아갈 것을 상기시킨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을 포용하고 용서하는 발걸음을 한 걸음씩 떼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용서가 언제나 여정인 이유이며, 그 여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용서의 실천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결론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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