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기독교부문 1위. 팀 켈러가 말하는 기도. 기도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기도를 기도답게 하는 법을 안내해 주는 수많은 책을 섭렵하면서, 저자는 자신에게 가장 도전을 주었던 기도 안내자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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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팀 켈러의 기도 (의무를 지나 기쁨에 이르는 길 찾기,PRAYER) 내용 요약 📖
팀 켈러 목사의 저서인 이 책은 기도를 단순히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청하는 도구로 여기는 수준을 넘어,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교제와 친밀함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합니다. 저자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의무감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숙제처럼 느끼는 현실을 지적하며, 기도가 어떻게 삶의 가장 큰 기쁨이자 동력이 될 수 있는지 성경적 원리를 바탕으로 설명합니다. ⛪️
토저의 기도(http://blog.naver.com/neobarabbas/221865406298)에서는 기도라는 주제로 바로 다이빙을 하는 반면, 팀 켈러의 기도에서는 기도를 정의하려고 노력하며, 여러 종교에서 사용하는 기도들을 알아보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들에 대해 Bench Marking을 하며, 형식이 있음을 알아본다. 그리고 올바르게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기본 원리원칙 제시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열심을 낼수록 나의 내면과 실생활이 풍성해지며, 게을리할수록 내 삶은 빈궁을 경험하게 된다.
별점: ★★★★★
J.I 패커와 캐롤린 나이스트롬이 쓴 기도에 관한 책에는 이 모든 내용을 멋지게 함축하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의무를 지나 기쁨에 이르는 길 찾기." 기도란 그런 여정이다.
기도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하나님과 이웃보다 성공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은 심령에 각질을 입혀 감정과 감각을 떨어트린다.
기도는 또 다른 존재와 함께일 때만 가능하다. 그 존재는 하나님이시며 대단히 독특한 분이다. 그분께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증해 준다.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높으신 하나님을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로 믿고 다가가 부르짖게 한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 영과 나란히 동행하면서 더 많은 증거들을 더하여 보여주신다.
크리스천은 주님과 실감 나는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경험할 수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벧전 1: 8, 새번역)"
그러므로 기도를 배워야 한다. 우선, 몇 달에 걸쳐 시편을 통독하면서 한 편 한 편 요약하고 정리했다.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내 마음과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끽하는 평온한 경험뿐 아니라 악을 밟아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기 위한 힘겨운 씨름도 있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도만큼 위대한 것은 없다
에베소서 1장 15-19절에 있는 기도를 빌립보서 1장과 골로새서 1장, 그리고 에베소서 3장의 간구와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바울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장면을 금방 포착할 수 있다.
디모데전서 2장에 바울은 독자들에게 평화를 위해, 선량한 정부를 위해, 도움이 필요한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예수님과 달리 보편적인 기도 모델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스스로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동료 크리스천들에게 주실 수 있는 더없이 소중한 한 가지를 끊임없이 구했다.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주님을 더 잘 아는 것'이었다. 바울은 크리스천이 반드시 얻어야 할 결정적인 응답은 환경의 변화보다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지식이라고 말한다.
대다수 현대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이나 상황에 토대를 두고 내면생활을 가꿔 간다. 남들의 평가, 사회적 지위, 물리적인 번영, 성과 등에서 내면의 평안을 찾는다. 크리스천도 주님을 믿지 않는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딛고 서지 않으면 크리스천들 역시 "세상이 그렇다고 장담하는 이러저러한 요소들을 성공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행복과 불행은 물론이고 스스로의 정체성까지 시대가 제시하는 견적에 맞출 게 틀림없다.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기 직전,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5-6절을 비롯해 몇 가지 사전 아이디어를 주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데서 이뤄지는 개인적인 기도 생활이야말로 영적 상태를 족집게처럼 진단해내는 영적 시험지다.
사사로운 기도 생활을 풍성하게 가꾸지 않아도 공적으로는 현란하며 신학적으로 견실하고 열성적인 기도를 드리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분과 더불어 대화하는 상황에서 어김없이 나타나는 특징만큼 흉내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은밀히 드리는 개인적인 기도와 공적인 기도는 나란히 깊이를 더해 가게 마련이다.
기도가 위대한 것은 곧 인간의 삶 가운데 미치는 하나님의 손길과 영광이 크고 넓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성경은 일관되게 이 진리를 증언하는 길고 긴 간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기도로 백성들을 고쳤으며,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변질되고 타락했음을 통렬히 비판하는가 하면, 오로지 기도로만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주님은 시시때때로 자주 뜨겁게 부르짖으며 눈물로(히 5:7) 기도하셨으며 더러는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셨다. 성령이 내리고 임한 것도(눅 3:21-22),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용모가 변한 것도(눅 9:29) 모두 기도하실 때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더없이 큰 위기 앞에서도 주님은 기도하셨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는 제자들과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고(요 17:1-26)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몹시 고통스러워하며 아버지께 간구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하며 숨을 거두셨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기도는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님이 마음에 들어오셨음을 보여 주는 주요 지표 가운데 하나였다.
기도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다
신앙이나 기도가 완전히 배제된 문화를 찾아보려 안간힘을 써 본들 백발백중 허사로 돌아갈 따름이다. 아주 외전 곳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는 부족들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 사이의 소통"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어떤 형태로든 상존하게 마련이다. 인간의 내면에 기도하고자 하는 본능이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것을 '하나님을 향한 불치의 향수병'이라고 불렀다.
북미 원주민 샤먼은 의식 중에 곧잘 황홀경에 빠지고,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찬트를 음송하며, 맨하튼 사무실에서는 수행자들이 요가에 열을 올리고, 17세기 청교도 사역자들은 몇 시간씩 목회기도를 드렸으며,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에게서는 방언기도를 흔히 볼 수 있고, 무슬림들은 이마와 양손, 두 무릎과 두 다리를 땅에 대고 메카 방향으로 엎드려 수주드를 행하며, 하시딤은 몸을 앞뒤로 흔들고 절하며 간구하고, 성공회 사제는 공동기도서를 낭송한다.
신비적인 기도에는 "신이 보이는 높이까지 오르고 또 올라서 마침내 그 거룩한 존재와 하나가 되는" 길고 긴 '정화' 절차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예배자가 순수한 사랑에 도달해서 신 앞에 나서기에 적합한 자격을 얻는 과정인 셈인다. 그러나 예언자들과 시편 기자들의 경우, 기도는 자신을 정화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방법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주님의 은혜에 기대는 일이었다. 인류가 찾아내거나 이뤄 낸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내면에서 행하시는 역사라는 뜻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은 간혹 믿지 않는 이들의 기도에도 흔쾌히 응답하신다"라고 했다. 니느웨 사람들(요나서 3장)은 두말할 것도 없고 사악한 왕 아합(왕상 21:27-28)의 부르짖음에까지 귀를 기울이셨던 사례만 보더라도 주님께 그래야 할 무슨 의무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니라 백 퍼센트 그분의 '긍휼'과 '주권적인 자비'에서 비롯된 일이다. 이런 점들ㅇ르 종합해 보면, 기도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인격적으로 소통하는 반응'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비록 허공에 대고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몸짓에 그치더라도, 기도는 바로 그 존재와 실재에 닿고 또 반응하기를 추가하는 행위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반응'으로 기도를 규정하는 한, 그 지식의 진량과 순도에 다라 기도는 변화무쌍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님을 통해 거듭나는 순간(요 1:12-13, 3:5), 주님은 우리에게 그저 하나님의 피조물에 그치지 않고 자녀의 신분이 되었으며 하늘 아버지와 대화할 수 있음을 알려 주신다(갈 4:5-6).
크리스천들은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된 성경과 그 중심 메시지인 복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공급받는다.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인 성경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로 반응(그저 ‘반응’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기는 하지만) 할 수 있다. 성경 말씀과 성령님 덕에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답변’이 될 수 있다. 온전한 대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가장 온전한 의미의 기도란 어떤 것일까? 기도란 하나님이 거룩한 말씀과 은혜로 시작하신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가서 마침내 주님과 온전히 만나는 단계에 이르는 일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실해질수록 기도는 더 풍성해졌으며 변화의 폭이 인생 전반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기도의 능력은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 또는 기교가 아니라 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달렸음을 알 수 있다.
소견대로 하는 기도는 비극이다
성령님의 선물로서의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대화로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대화가 진전되고 무르익으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발전한다. 일생 속에 하늘나라가 이뤄지는 셈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기도 패턴에는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시 86:11-12)라는 고백과 함께 온몸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반응하기까지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과정이 어김없이 따라다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인가? 성경을 통해서다. 성경은 기록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하나님의 말씀이다.
기도를 하려면 먼저 성경을 펴고 그 간구를 들으신 분에 관해 배워야 한다. 성경을 읽으며 깨달을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게 된다.
하나님이 초점임을 아는 이들이 드리는 기도가 가능하려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뿐만 아니라 … 그분에 대한 교리와 개념이 반드시 필요하다.
기도는 하나님 말씀을 읽는 일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다. 성경과 기도는 한 덩이가 되어 크리스천을 참하나님과 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 준다.
마르틴 루터는 누구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가선’ 안 되며 그랬다간 기도를 하면서도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는지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고 못 박아 말한다.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성령님이 마음에 역사하신다. 미리 뜻하신 이들의 마음에 미리 뜻하신 방식으로 역사하시지만 말씀 없이는 결코 일하지 않으신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제각기 느끼는 감정을 드러내고 전달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 경이로움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말과 감탄사를 찾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패커는 말한다. “침묵기도는 기도의 정점이 아니라 … 말로 드리는 간구 사이사이에 찍힌 쉼표와 같다.
크리스천이 드리는 기도라 할지라도,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게 아니라면 결국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기도하면서 알아 가고 싶은 미지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이스라엘의 역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시는 잘 알려진 하나님께 아뢰는 것 사이에는 또렷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제 입맛대로 신앙적인 성취를 탐닉하지만, 후자는 순종하는 믿음을 행동에 옮긴다. 기도의 핵심은 자기표현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답하는 법을 체득하는 데 있다.
성경을 읽지 않고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걸 확인할 길이 없다.
그들은 믿는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집’, 즉 ‘살아 있는 돌들로 지은 성령님이 머무시는 성전(벧전 2:4-5, 엡 2:20-22)’이 된다.
다윗은 왕좌에 앉히고 집을 지어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받고 나서 기도할 마음을 찾았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그보다 무한정 더 크고 위대한 약속을 이미 받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그저 집을 세우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을 좇는 이들 하나하나로 그분의 집을 삼겠다고 말씀하신다. 거룩한 임재와 아름다움, 영광으로 우리를 가득 채우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기억할 때마다 크리스천의 가슴에는 그 엄청난 약속의 말씀이 사무치고 번번이 기도할 마음을 찾을 것이다.
기도는 결코 주문이 아니다
티머시 워드는 선지자와 사도들에게 주셨던 말씀, 곧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주님을 만나는 으뜸가는 길임을 강조한다.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법적으로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하나님으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공급받는 관계에 들어간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따라서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서슴없이 아버지 품으로 달려갈 수 있다. 기도는 이처럼 친밀한 관계와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껏 느끼고 누리는 방법인 동시에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확신을 토대로 평안하고 기운찬 삶을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4-16).
기도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하나님이 원만하게 이끌고 계시며, 나쁜 일들도 결국은 유익한 열매를 맺으며, 좋은 선물들을 결코 가둬 가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멋진 미래가 찾아오리라는 점을 또렷이 확인 시켜 주는 중요한 도구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중보자가 되신다(딤전 2:5, 히 8:6, 12:24). 이제 크리스천들에게는 궁극적인 중보자요 지극히 높으신 대제사장이 생겼다(히 4:14-15). 커다란 간격을 없애서 주님과 친구처럼 사귈 수 있게 하신 것이다(출 33:11 비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요 14:13-14), 15:16, 16:23-24).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건 … 그분만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이며 … 창조주와 소통하는 외길임을 인정하고 간구한다는 뜻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화해시키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하셨다.
인생만사가 순조롭게 심중에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안전하다 싶으면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것저것 해 달라고 간청하는 데 큰 몫의 시간을 할애하고 가물에 콩 나듯(뭔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 때) 죄를 고백한다. 오랜 시간 차분히 앉아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경우는 드물거나 전혀 없다. 어째서 그런가?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 계시다는 걸 알지만 무언가를 얻어 내거나 행복해지는 수단쯤으로 여기는 탓이다. 대부분은 그분을 행보 그 자체로 삼지 않는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감수하신 크고도 놀라운 희생을 깨닫고, 소망의 대상을 물질에서 그리스도로 바꾸며, 예수님께 기대어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구하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유익과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지 감이 오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섬기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지 않는 한, 하나님을 아는 참되고 거룩한 지식을 갖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제대로 된 아빠 엄마 밑에서 자랐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중얼거리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엄연하게 말해서 ‘제대로 된’ 부모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거스틴과 루터, 기도를 말하다
어거스틴은 무얼 어떻게 기도할까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어떤 부류의 인간이 되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첫 번째 원리로 내세운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요소들이 엉클어져 ‘뒤죽박죽’이 되지 않았는지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장 큰 사랑을 드리는 게 마땅하지만 주님을 막연히 의식하기만 할 뿐, 실질적으로는 그분의 은혜와 임재를 지상에서 누리는 번영과 성공, 지위, 애정, 또는 쾌락만큼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어거스틴은 마음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내가 그리스도와 동떨어져 황폐해진 상태임을 받아들이면 그때 비로소 기도를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이 제시하는 첫 번째 기도 원리를 받아들였다면, 세상이 주는 안락함과 보상이나 쾌락 따위는 본질적으로 일시적인 기쁨을 줄 따름이며, 거기에 마음을 둬 봐야 그 행복감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또렷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구하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하나님을 으뜸으로 사랑하며 그분을 알고 흡족하게 해 드리는 일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긴다면, 기도하는 제목과 방법은 두루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거스틴은 잠언 30장 8-9절 말씀을 본보기로 내놓는다.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어거스틴이 내놓는 세 번째 지침은 주기도문을 연구하며 구체적인 기도 방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네 번째 원리는 암흑기에 드리는 기도에 관한 것이다. “고난은 … 큰 유익을 끼칠 수 있다. … 하지만 고되고 아파서 … 시련을 거두시길 간청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건을 바꿔 주시길 구해야 할까, 아니면 견뎌 낼 힘을 청해야 할까? 어거스틴은 솔직한 소망(“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과 하나님을 향한 순종(“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가리킨다. 어거스틴은 마음의 소원을 쏟아 놓는 중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기억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루터는 규칙적인 훈련으로 기도를 몸에 배게 하라고 조언했다. 하루에 두 번식 하나님과 만나기를 권했다.
크리스천은 감정을 떠나 반드시 기도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마음을 들어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므로(에 3:41) 자발적으로 기꺼이 간구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십계명이나 그리스도의 말씀 같은” 성경 본문을 혼자 읊조리는 이른바 ‘음송’을 추천한다. 루터는 이런 훈련을 통해 “마음을 움직이고 이끌리며 … 기도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생기길 바란다"라고 했다.
묵상을 권유하면서 루터는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한다. 첫째는, 명령을 하나하나 깊이 생각하며 가르침, 즉 그 말씀을 주신 참뜻이 무엇인지 살펴 하나님이 무얼 요구하시는지 진지하게 고찰한다. 둘째는 그 깨달음을 감사로, 세 번째는 고백으로, 네 번째는 기도로 연결시킨다.
루터는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자유로운 형식으로 기도하기 전에, 주기도문의 간구를 한 구절 한 구절 끌어내어 기도하기를 권한다. 주기도문에 맞춰 저마다의 필요와 관심사를 다른 말로 표현하거나 개인적으로 적용하라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바탕에 깔고 기도하는 연습은 정신세계를 철저히 장악하게 해 주며 하나님께만 온 신경을 쓰는 과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나라가 임하오시며”에 기대면 공동체와 사회, 인간관계 가운데 복음이 들어가 퍼지길 기도하게 된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는 최근에 저지른 죄와 실수를 열거한 목록에 눈길을 돌리게 이끈다.
“말씀을 묵상하거나 기도를 하다가 선한 생각들이 샘솟는다면 다른 기도 제목들은 잠시 미뤄 두고 그런 생각이 마음에 깃들일 여지를 확보하라. 침묵 가운데 귀를 기울이고,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성령님이 친히 말씀을 선포하시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보통 크리스천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믿었다. 루터는 내면의 느낌을 하나님의 계시로 여겼던 조지 휫필드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뜻을 전하신다.
칼뱅, 기도의 원칙을 논하다
칼뱅이 내놓는 첫 번째 기도 원칙은 ‘경외’ 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기도란 우주를 다스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독대하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하나님과 관해 무얼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인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상대에게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얘기를 불쑥 내뱉을까 봐 진심으로 염려하고 겁을 내는 것이다. 경외하는 마음이 깊은 까닭에 엉망진창이 되지 않으려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아무 자격 없이 영원토록 한결같은 은혜를 받는 수혜자가 되었음을 믿는 크리스천들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스럽고 행복한 두려움이 갈수록 깊어지게 마련이다. 주님 마음을 슬프게 하지 않을까 몹시 걱정스러워한다. 칼뱅은 이 경외감이야말로 기도의 핵심부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 기도 원칙은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의식은 허구를 몰아낸다”는 것이다. 열매 맺는 기도를 드리려면 스스로의 허물과 연약함에 무자비하리만치 정직해야 한다. 얼굴에 가면을 뒤집어쓰는 ‘허구’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알고 회의와 두려움, 허무 따위를 솔직히 인정하며 그분 앞에 나와야 한다. ‘거지와 같은 성향’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야 한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허구’를 벗어 버릴수록 기도 생활이 그만큼 풍성하고 깊어질 것이다.
세 번째 원칙은 겸손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 원칙은 크리스천은 확신과 소망을 품고 기도해야 한다. 확신과 소망을 품고 구하라. 그릇된 청을 드리게 될까 두려워할 필요 없다. 당연히 그런 경우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지혜로 그 결과를 조절하신다. 응답이 없거나 기대했던 답이 아니더라도 기도로 그의 큰 뜻 안에서 평안을 갖도록 하라.
다섯 번째 원리는 ‘원리’라는 단어의 한정적인 면을 설명하고 있다. 칼뱅은 말한다. “제대로 기도하는 데 필요한 네 가지 원칙에 관해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들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지켜야 할 철칙이어서 완벽한 믿음과 회개가 없거나 열성이 부족하고 간구하는 내용이 올바르지 않으면 하나님이 단박에 물리쳐 버리시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점 흠 없이 올바르게 기도했던 이는 어디에도 없다. … 이러한 자비가 없다면 누구도 마음 놓고 기도할 수 없을 것이다.” 다섯 번째 원칙은 은혜의 원칙이다. 칼뱅은 크리스천들에게 원칙을 잘 따르면 응답받을 만한 가치를 얻는다는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고 말한다. 어떤 말과 행동으로도 하나님께 나갈 자격을 얻을 수 없다. 오직 은혜로만 가능하다.
기도는 은혜로, 은혜를 좇아 빚어져야 한다.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선물로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을 얻었기에 행복한 두려움을 누리거나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원칙은 크리스천이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의 속성(값 없이 은혜를 베푸시는)에 맞추어 조절하고 그리하여 주님과 점점 하나가 되게 만드는 수단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건 요술 주문 같은 게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든, 심지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의 간구도 듣고 응답하실 수 있다. 짓눌려 사는 가난한 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반응하시는 경우도 흔하다. 무엇보다 그분은 자비로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기도하는 가운데 자기 능력이나 경력에 의존하지 않고 구원을 베푸시고 용납해 주신 그리스도를 의식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발상을 버려야 합니다.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엄청난 권한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의 선한 행실에 기댈 게 아니라 주님의 청구권에 의지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기도 중의 기도, 주기도문을 말하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크리스천이라면 존귀한 이름을 품은 존재로서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표하므로, 부름을 받은 그 호칭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선하고 거룩해질 힘을 주시도록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서 주님을 드높여 드리고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게 되길 요청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그저 착하게 사는 차원을 넘어 늘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더 나아가 그 아름다움에 경이감을 품는다는 뜻이다.
“나라가 임하오시며”
왕이신 하나님이 감정과 욕구, 사상과 헌신을 비롯한 삶의 모든 영역에 왕권을 펼쳐 주시길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온전히 다스려 주셔서 온 마음을 다해 기쁨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생각이 가득하길 구하는 것이다.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서 시작하신 나라의 완결과 완성”을 구하는 것이다.
“뜻이 이루어지이다”
루터는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셔서 온갖 질병과 가난, 수치와 고통, 역경을 기꺼이 견디며 주님의 거룩한 뜻이 그 가운데서 우리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음을 알게 해 주소서”라고 풀이했다.
칼뱅은 어떤 환경이 닥치든 낙담하거나, 쓰라린 아픔에 시달리거나, 냉담하지 않도록 제 의지뿐 아니라 감정까지도 하나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어거스틴이 여기서 말하는 ‘일용할 양식’은 사치품이 아니라 생필품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칼뱅은 일용할 양식에 관해 언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는 게 아니라 …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방편이 되는 것들을 구하라”고 강조하며 어거스틴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그분만을 신뢰하는 마음가짐이 전제되어야 한다. 루터는 사업과 거래, 노동 시장에서 ‘가난한 이들을 짓밟고 하루하루 끼닛거리를 앗아 가는 악의적인 착취’에 대적하는 기도다. 루터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가 번영과 공정한 사회 질서를 갈구하는 간구였던 것이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루터는 날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 간구를 교만에 도전일 뿐 아니라, 영적인 실상에 대한 검증으로 규정했다.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는 쓰라린 상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신호다. 원한을 그대로 품고 있다면 스스로는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죄만큼은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구하는 위선과 마주칠 따름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어거스틴은 이 간구를 두고 “이는 시험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시험에 끌려들어 가서는 안 된다는 기도다”라고 구분 지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험에 들지 않게”(마 26:41)는 죄에 굴복할 가능성이란 개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원문은 “악마(사탄)에게서 구하시옵소서”로도 번역할 수 있다. 루터는 이를 두고 “악한 나라에서 뿜어 나오는 구체적인 폐해 … 가난, 수치, 죽음 … 한마디로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는 기도”라고 썼다. 어거스틴은 곧 세상의 사악한 세력, 특히 호시탐탐 해칠 기회를 노리는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길 구하는 기도라고 해석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초기 성경 문서나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성경에선 찾아볼 수 없는 구절이다. 칼뱅은 세상의 그 무엇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사랑이 많으신 하늘 아버지의 손에서 낚아챌 수 없음을 기억하고 ‘평온한 안식’으로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
기도의 시금석을 따르라
성경 말씀은 구절구절, 올바르게 기도하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요 16:24-26)과 믿음(약 1:6)에 기대어 구하지 않고, 이기적인 동기(약 4:3)를 가지고 간구한다면 삶의 어느 영역에서든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가운데 부르짖는다면(시 66:18) 기도는 ‘큰 효력’을 내지 못할 것이다(약 5:16).
1 기도는 의무이자 훈련이다
기도는 좋든 싫든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규칙적으로, 꾸준히, 작심하고, 끈덕지게 드려야 한다. 설령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해도 기도를 멈춰 선 안 된다.
2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다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드리는 기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나누었던 더없이 소중한 경험, 즉 거리낌 없는 대화를 되살리는 일이다. 기도를 대화로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마음속에 주관적으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것을 기도로 보는 방식과 하나님이 주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보는 방식이 있다. 루터의 경우에서 보듯, 성경을 읽을 때마다 확신과 깨달음이 드는데 거기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따라야 할 바른 방향은 후자 쪽이라는 예기는 이 책의 전반에서 이미 나누었다.
패커는 습관적으로 “기도에 들어가기 전에 성경을 읽고, 본문이 하나님에 대해 무얼 알려 주는지 깊이 생각하며 거기서 얻은 깨달음을 찬양으로 이어 간다”면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이만큼 중요한 도구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3 기도는 찬양과 고백과 간구가 어우러진 상호작용
주기도문은 찬양과 경배로 시작해서, 필요를 채워 주시길 요청하고, 죄를 고백하고 내면의 변화를 간구한 뒤에, 베풀어 주신 은총은 물론이고 역경에 대해서까지 감사하는 쪽으로 넘어간다. 성경의 기도서 등을 보면 이런 기도 ‘문법’, 또는 차원들이 하나같이 중요한 쓰임새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도 형식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하다. 주께 간구할 때마다 이런 기도 방식들이 빠짐없이 드러나고 서로 어울리며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4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드려야 한다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참 아들이신 예수님이 헤아릴 수 없이 큰 희생을 치르셨고, 성령님이 거룩한 자녀의 신분을 내면에서 규정하신 덕분에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임을 가슴 깊이 인식하고 감사하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은 주님의 거룩한 인격과 구원사역을 압축해 놓은 일종의 속기록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궁금증이 생긴다. 성자나 성령님은 안 되고 오로지 성부 하나님께만 기도드려야 하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요 14:13-14, 마 11:28). 그렇지만 주기도문에서는 아버지께 간구하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이나 성령님께 구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예기는 전혀 아니지만, 통상적으로 기도는 아들에게 감사하고 성령님께 의지하는 마음으로 하늘 아버지께 드린다.
5 기도는 애정과 경외감이 공존하는 마음가짐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기도할 때는 온 마음을 다해야 한다. 여태까지 나온 기도와 관련한 훌륭한 서적들 가운데는 기도와 묵상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얼마나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짚어 보라고 권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면에서 기도는 그저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연약하며, 백 퍼센트 의존적인 인간과 예수님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일 뿐이다. 너무나도 무력해서 무얼 기도해야 좋을지도 모를 때 성령님이 도우신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이를 강력히 뒷받침한다(롬 8:26). 무얼 하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하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주께 갈 수 없다(요 6:44). 극도의 무력감을 느낄수록 주님이 함께하시며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신다는 사실을 더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7 기도는 하나님 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한다
기도는 형식과 관계없이(찬양, 고백, 감사, 간구 등) 세상 만물과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으며 실제로는 아무 탈도 없음을 알게 된다. 정반대로 허상을 무너뜨리고 영적인 상태가 생각보다 더 위태로움을 일깨운다. 이처럼 기도는 자아를 요란하게 흔들며 소리친다.
8 기도는 하나님과 영적인 연합이다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사랑, 성령님이 약속하신 내주하심, 용서를 받았다는 인식, 주님의 임재 앞에 나가는 특권, 죄스러운 습관을 이겨 내는 능력 등은 마음으로 받아서 실생활에 활용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하나같이 추상적인 개념에 그치고 만다.
기도란 그리스도가 이루셨으며 크리스천이 믿고 있는 모든 사실들을 우리의 능력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진리가 마음에 작용해서 새로운 본성과 반응, 기질을 만들어내는 외길이기도 하다.
9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려는 노력이다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인 지식은 기도를 통해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이슈가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믿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의 위대하심을 감각적으로 감지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게 아니라 마음에 거룩한 사랑이 흘러넘치는 걸 느끼게 된다.
10 기도는 정직한 자기 인식
기도는 단순히 부족하다는 느낌을 넘어 자신과 극도로 솔직하게 마주 서는 단계까지 이끌어 가야 한다.
11 기도는 철저하게 신뢰하는 마음가짐
어떤 기도를 드리든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손수 보내 주시는 선물을 따지거나 가리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도록 도와주시길 구하는 간구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루터는 무모하리만치 끈덕지게 조르며 기도하는 걸 일컬어 ‘하나님 공략’이라고 했다. 기도는 수동적이고, 차분하며, 조용한 행위가 아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을 인정하는 자세에 토대를 두지 않고 그저 ‘끈기’와 강청하는 기도만 강조하면, 원하는 응답을 받아내지 못할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성숙한 크리스천들일수록 끝이 보이지 않는 지긋지긋한 상황을 견뎌내는 게 풍성한 생활에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끈기와 순종이 기도 안에 조화를 이루게 해야 한다.
12 기도는 온 삶을 하나님 사랑에 굴복시키는 마음가짐
주님께 온전히 충성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있는 상태라면, 그저 기도를 이미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요소들을 더 얻어 내기 위해 동원하는 이기적인 방편으로 사용할 공산이 크다. 바로 이런 진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람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라는 말씀 이면에 깔린 진리다. 핵심은 세상에서 갖고 싶어 하고 소중히 여기는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소망하고 애지중지하는 자세에 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이것저것을 요구하는 기도를 시작해선 안 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내게 꼭 필요한 건 하나님뿐임을 절감하지 못한다면 온갖 간구와 간청은 그저 또 다른 형태의 걱정과 욕심으로 변질될 수 있다.
말씀을 묵상하라
기도가 참으로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가 되려면 규칙적으로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그분의 거룩한 음성을 듣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깊이 체험하는 길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지만, 영적으로 더 깊이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상적인 경로는 바로 말씀 묵상이다. 시편 1편을 찬찬히 짚어 보면, 적어도 묵상의 세 가지 유익을 약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안정이다. 둘째로, 묵상은 속사람 또는 성품의 변화를 약속한다. 셋째로, 묵상은 복을 부른다.
성경 어느 본문을 묵상한다는 말에는 미리 치열한 연구와 해석을 거쳐 그 뜻을 파악한 상태라는 전재가 깔려 있다. 성경적인 묵상은 성경을 깊이 있게 해석하고 공부한 결과를 토대로 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묵상은 이성적인 사고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작업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라 … 스스로 신이 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을 묵상하는 갖가지 구체적인 방법들이 있지만, 영국의 신학자 존 오웬은 세 가지 기본적인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일단 성경 공부와 기도, 그리고 묵상을 구별하는 데서 출발한다.
묵상은 진리를 공부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선포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삼는 말씀 공부와 다르다. 또한 하나님 자신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상정하는 기도와도 차이가 있다. 하지만 … 묵상은 … 사랑과 기쁨, 그리고 겸손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첫 번째 단계는 성경의 진리를 바라보는 명료한 시각을 선택하고 확보하는 이른바 ‘생각의 초점’을 잡는 과정이다.
말씀을 묵상하는 으뜸가는 방법은 암송이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눈앞에 벌어진 이러저러한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할 때 암송했던 말씀이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오웬은 생각을 가다듬었으면 이제 묵상의 두 번째 단계인 ‘마음 쏟기’로 넘어가라고 말한다. 생각을 정리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구원과 영원, 인간의 상태 따위에 관해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정확히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면 더욱 온전하게 거기에 소망을 두고 만족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어떻게 성경의 진리에 기대어 삶을 바꿔 가야 할지 가늠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깨달음을 주시는 시점을 헤아리는 노력이다. 하나님이 하필 오늘 그 말씀을 보여 주신 까닭은 무엇일까?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큰 감동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유쾌하고 즐겁기만 한 건 아니다. 진리를 깊이 파고들다 보면 허물을 지적받고, 낮아지며, 곤란한 처지에 몰리거나, 평안과 위로를 찾는다든지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감격과 기쁨을 맛본다. 묵상은 이 지점, 이런 마음자리를 목표로 한다.
세 번째 단계는 무엇인가? 오웬은 하나님의 임재와 주님이 베푸신 구원의 실상을 알고 감격하고 있다면 그 자리에 머물며 마음껏 누리라고 권한다. 고상한 풍미에 젖은 이들은 경험적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 포도주보다 더 달콤한 그리스도의 사랑, 그밖에 무엇이 됐든 짜릿하게 미각을 자극하는 더없이 상쾌한 향취를 맛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크리스천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벧전 1:8) 하는 타당한 근거가 된다.
묵상을 할수록 “스스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절감하는 겸허한 자각”만 돌아온다손 치더라도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그런 경험은 영적인 실상과 마주할 수 있는 더 큰 기회로 이끌어 간다.
오웬에 따르자면, 묵상은 정신으로 진리를 분석하고 그 결과를 감정과 태도, 마음을 쏟는 자리 등 삶의 온갖 영역에 반영하며, 성령님이 주시는 깨달음과 영적인 현실을 좇아 반응하는 걸 가리킨다. 그러므로 기도를 위한 묵상은 생각하고, 마음을 돌리며,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거나 주님의 부재를 인정하고 거룩한 자비와 도우심을 구하는 세 가지 요소로 이뤄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다 안다"라고 말하는 것과 그 사랑이 얼마나 넓고, 크고, 높고, 깊은지 절감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실제로는 갑부였는데 쪼들리며 살았다니! 바울은 크리스천들에게 그것만은 피하라고 당부한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만나야만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오웬은 “하나님을 직접 뵙는 환상을 품고 묵상하는 습관이야말로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길러야 할 중요한 소양”이라고 끈질기고도 단호하게 주장했다. “크리스천의 삶과 생각은 하늘의 복을 바라보며 소망을 품는 쪽으로 흘러가야 하며, 지금 여기서 맛보기들을 경험하며 빚어져 가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는 말은 주님의 성품과 말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이 중심으로부터 만족스럽고, 즐겁고, 위로와 힘이 되는 걸 가리킨다.
오웬은 시시때때로 하나님 안에서 희열을 맛보며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주님의 손길을 체감하는 경험만이 세상의 가짜 하나님이 주는 질 낮고 부분적인 위안에 넋을 빼앗기며 격정과 욕망의 노예가 되는 비극을 피할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크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다른 이들의 손가락질이나 고난,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감정적인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오웬은 침묵기도가 가끔은 괜찮지만 그런 방식으로 간구하도록 주문하거나 이상적인 형태로 보아서는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한다.
감사와 찬양이 먼저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다시 말해 주기도문에는 찬양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과 올바르게 교통하는 데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며 다른 종류의 기도를 이끌어 내는 자극제다. 곧장 간구나 고백에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기도 생활 전반에 걸쳐 찬양과 경배가 으뜸가는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얘기일 따름이다.
찬양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해로운 부분들을 바로잡고 영적으로 건강한 내면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악조건이 아니라면, 대체로 찬양은 내면의 건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드러내는 지표가 되는 듯하다.
어거스틴은 인간이란 너나없이 행복을 추구하며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무언가에 집착하는 법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바로 그 집착을 사랑으로 인식하고 경험한다.
인간이 마주한 비참한 현실은 하나님을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보다 자녀와 배우자의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배우자가 기대만큼 지지와 애정을 보여 주지 않을 때마다 폭발적으로 분통을 터트리거나 깊은 좌절에 빠지기 십상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을 으뜸으로 소중하게 여기면 배우자를 제대로 사랑할 여유가 생긴다.
인간 됨됨이의 뼈대를 다시 짤 수 있을까? 어떻게 건강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섬기고 높여야 한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한다. 찬양과 경배 말고는 그런 마음을 키울 방도가 없다.
불행한 사건들이 간구와 간청을 불러일으킨다면 행복한 일이 생기면 감사하고 찬양하고자 하는 마음이 솟는 게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로마서 1장 18-21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죄가 지닌 특성을 지적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 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 커녕”(새번역)이라고 꼬집는다.
루이스는 거의 반사적으로 “어던 하나님이 이를 지으시고 내게 주셨을까?”를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면서, 항상 그럴 수는 없을지라도 그런 훈련은 일상생활 가운데 더 풍성한 기쁨을 찾고 밀도 높은 기도 시간을 갖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단언한다. 아울러 “가장 낮아졌을 때 경배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하면 지극히 높아진 상황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는 몹시 어렵다"라고 조언한다.
위대한 종교 개혁가로 처음으로 공동기도서를 펴냈던 토머스 그랜머는 다음과 같은 일반 원칙을 따랐다.
1 찬양 - 하나님의 이름
2 신조 - 기도의 토대가 되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진리
3 간구 - 구하고자 하는 일들
4 염원 - 요청을 들어주셨을 때 찾아올 선한 결과
5 예수님의 이름으로 - 예수님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기억
그랜머가 쓴 유명한 성만찬 개회 기도회에서도 이와 같은 구조를 볼 수 있다.
1 전능하신 하나님,
2 주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소원을 다 아시며, 은밀한 것이라도 모르시는 바 없사오니,
3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우리 마음의 온갖 생각을 정결케 하시어,
4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공경하여 찬송케 하소서.
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스코틀랜드 대요리문답은 “인간의 가장 큰 존재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주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백과 회개는 필수다
죄의 대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치르셨다. 죄를 뉘우치고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죄의 저주가 미치지 못한다(롬 8:1). 이를 잊으면 고백이 복음적인 회개가 아니라 스스로를 가혹하게 자책하는 식의 참회에 가까워진다.
스토트는 죄를 고백한다는 말은 곧 죄를 등지고 결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백과 결별은 결코 분리되면 안 될 요소들이지만, 크리스천 중 열에 아홉은 고백과 동시에 죄와 절연하고 마음을 돌이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가능성을 차단하거나 약화시키는 결단 없이 죄와 허물을 털어놓는데 그친다. 그러므로 스토트는 참다운 회개는 인정과 거부라는 두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오웬은 오로지 율법의 정죄, 곧 스스로 공덕을 쌓아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관념에서 출발한 멸살은 죄에 물든 심령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인정과 칭찬을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소중히 여겨선 안 된다. 주님의 은혜에 잠기면 다른 이의 눈에 괜찮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욕구를 떨쳐 버릴 수 있다.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데다 무겁기까지 한 짐이다. 감사가 넘치고 불안감이 걷힌 순전한 기쁨을 맛보기까지 값없이 주신 은혜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자.
남에게 무정한 말을 하거나 고약한 생각을 한 적이 있는가? 속으로 누군가를 희화화함으로써 자신을 합리화하지는 않았는가? 내게 쏟아 주신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생각하며 냉정하고 불친절한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나를 참아 주신 주님의 인내를 기억하며 짜증을 내지 않을 때까지, 냉담함이 없어질 때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무한한 관심을 내게 보이셨는지 돌아보며 온정과 애정이 느껴질 때까지 값없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자.
하나님 뜻대로 간구하다
최상의 결과를 기대하되 하나님께서 다른 일들을 행하신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따름이다. J.I 패커는 여기에 적어도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먼저 하나님께 간구할 때, “우리가 구하는 제목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을 기도에 반드시 포함시켜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이는 대단히 명철하고 현실적인 생각이다. 필요를 고할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간구와) 다른 뜻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편이 더 선하며 (우리가 최선이라고 여기는 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계획하신 대로 이뤄지길 진심으로 바란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사례들을 볼 때, 간구에는 요청하고, 불평하고, 조르는 등 대략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로, 자신과 남들의 필요를 아뢰는 통상적인 기도가 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와 세상을 향한 기도’를 보통 중보라고 부른다. 간구의 두 번째 범주는 성경 전반에 걸쳐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특히 시편에 나타난 이런 형식의 기도를 전통적으로 ‘애가’라고 부른다. 고통과 환난을 겪으며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힘겨운 씨름을 벌이면서 주님이 역사하는 방식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는 한편, 거룩한 속내를 깨달아 알고 현실을 견뎌 내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이들의 기도다. 간구의 세 번째, 그리고 가장 광범위한 범주는 이른바 ‘하나님께 조르는 기도’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을 품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의 때를 끈덕지게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받아야 할 ‘고난의 잔’을 옮겨 주시길 기도했지만 간곡한 요청은 기각되었다. 어째서 그랬을까? 하나님은 우리에게나 합당한 처분을 예수님께 내리셨다 인류가 받아야 할 형벌을 주님께 대신 내리셨다. 덕분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성자에게나 합당한 대우를 우리에게 해주신다(고후 5:21).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치시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셨기에 하늘 아버지는 우리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응답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크리스천은 하나님께 담대하고 구체적이며 열심히, 정직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소원을 아뢰어야 한다. 하지만 그와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지혜로운 사랑을 인정하고 끈질기게 순종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 덕분이며, 그러기에 무엇이든 그분의 이름으로 구해야 한다.
매일 기도하라
통상적으로 하루에 한 번 갖는 경건의 시간에 만족할 게 아니라 더 자주 기도할 필요가 있다. 루터는 하루에 두 번 기도하길 권했고 칼뱅은 간단하게 자주 드려야 한다는 쪽이다. 하루의 틀을 잡을 때, 24시간을 보내는 동안 한 번 이상 시간을 정해서 온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모든 크리스천들이 공감하는 것처럼 보인다.
14세기에 활동했던 아프리카의 신학자 아타나시우스는 적었다. “무슨 필요나 어려움이 됐든지 간에, 같은 책(시편)에서 거기에 맞춤한 말씀을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 병을 고칠 방도를 알게 되는 겁니다.” 이어서 시편은 그때그때 ‘합당한’ 말씀을 제시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죄를 회개하며, 감사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결론지었다. “인생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이 거룩한 노래들은 우리 자신과 잘 들어맞으며 굽이굽이마다 영혼의 필요를 채워 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첫 번째는 원문 그대로 기도하는 방법이 있다. 시편 90편은 그런 식으로 기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두 번째는 주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시편을 자신의 말로 바꾸어 개인화하는 기도 방법이다. 시편으로 드리는 세 번째 기본적인 형태는 ‘반응하며 기도하기’라고도 불린다. 전문이 아니라 주제나 주장만 가져다가 찬양과 고백, 간구의 실마리로 삼는 방식이다.
시편에는 그리스도를 대단히 선명하게 드러내는 시편이 많아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한다. 2편과 110편은 보좌에 앉으신 메시아를, 118편은 거절당한 메시아를, 63편과 109편은 배반당한 메시아를, 22편과 16편은 죽고 부활하신 메시아를, 45편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하늘의 신랑이 되시는 메시아를, 68편과 72편은 승리하신 메시아를 보여 준다. 이런 시편들은 예수님의 뛰어나심과 아름다움을 묵상하고 찬양하며 그 안에서 쉼을 누릴 기회를 준다.
조지 허버트는 기도를 ‘교회들의 잔치’라고 불렀다. 드와이트 무디 또한 어느 날 기도를 마치고 나서 “하나님이 내게 오셨다. 얼마나 강렬한 사랑을 경험했는지 제발 주님의 손안에 머물게 해 달라고 간청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