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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인 책
출간일
2011.11.14
페이지
236쪽
상세 정보
이순구의 역사 에세이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은 사연을 담은 책이다. 부인을 세 명이나 잃고 끝내 소실을 들여야 했던 권상일, 재산을 두고 올케 네와 주먹다짐을 한 안씨 부인, 아들 영창대군을 버리고 친정 집안을 선택한 인목대비, 족보에서 '서(庶)' 자를 빼기 위해 부도덕한 일도 서슴지 않았던 서자 노수, 첩과 서얼과 기생이었던 마이너리티 가족들 그리고 종손의 그 묵직한 책임감.
조선시대 이 사연들은 모두 가족과 연관하여 생겨났다. 조선에서 사람들은 개인이 아닌 가족의 일원으로 살았다. 심지어 조선 말기에는 국가는 없고 가족만 있을 정도였다. 그들의 사연은 가족을 매개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족의 중심에 여자가 있었다.
여성사와 가족사를 전공하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으로 재직 중인 저자는 조선시대에 중국과 같은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 시행은 결국 실패했다고 간주하며 "조선의 여자들은 오랜 기간 남자와 동등한 재산권을 통해 특별한 경제 능력을 보유했으며 이는 세계 어디에도 흔치 않은 일"이라 지적한다.
책에는 적처와 적자, 종부, 종손, 양자, 서얼, 첩, 기생 등 다양한 가족들이 등장한다. 여기 사연의 주인공들 중에는 이른바 좀 성공한 사람도 있고 영 일이 잘 안 풀린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 자신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대처 방식을 찾고 또 그것을 적용하려고 애썼다. 조선시대 가족, 그 안과 밖의 사연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너머의 역사책'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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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ya
@vqbtgsh7kx8l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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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 Hong
@aygofxrfai21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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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이순구의 역사 에세이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은 사연을 담은 책이다. 부인을 세 명이나 잃고 끝내 소실을 들여야 했던 권상일, 재산을 두고 올케 네와 주먹다짐을 한 안씨 부인, 아들 영창대군을 버리고 친정 집안을 선택한 인목대비, 족보에서 '서(庶)' 자를 빼기 위해 부도덕한 일도 서슴지 않았던 서자 노수, 첩과 서얼과 기생이었던 마이너리티 가족들 그리고 종손의 그 묵직한 책임감.
조선시대 이 사연들은 모두 가족과 연관하여 생겨났다. 조선에서 사람들은 개인이 아닌 가족의 일원으로 살았다. 심지어 조선 말기에는 국가는 없고 가족만 있을 정도였다. 그들의 사연은 가족을 매개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족의 중심에 여자가 있었다.
여성사와 가족사를 전공하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으로 재직 중인 저자는 조선시대에 중국과 같은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 시행은 결국 실패했다고 간주하며 "조선의 여자들은 오랜 기간 남자와 동등한 재산권을 통해 특별한 경제 능력을 보유했으며 이는 세계 어디에도 흔치 않은 일"이라 지적한다.
책에는 적처와 적자, 종부, 종손, 양자, 서얼, 첩, 기생 등 다양한 가족들이 등장한다. 여기 사연의 주인공들 중에는 이른바 좀 성공한 사람도 있고 영 일이 잘 안 풀린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 자신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대처 방식을 찾고 또 그것을 적용하려고 애썼다. 조선시대 가족, 그 안과 밖의 사연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너머의 역사책' 5권.
출판사 책 소개
이순구의 역사 에세이
조선시대 가족, 그 안과 밖의 사연을 만나다
이순구의 역사 에세이『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은 사연을 담은 책이다. 부인을 세 명이나 잃고 끝내 소실을 들여야 했던 권상일, 재산을 두고 올케 네와 주먹다짐을 한 안씨 부인, 아들 영창대군을 버리고 친정 집안을 선택한 인목대비, 족보에서 ‘서(庶)’ 자를 빼기 위해 부도덕한 일도 서슴지 않았던 서자 노수, 예순 살이 다 된 남편을 질투하느라 속이 타는 이문건 부인, 첩과 서얼과 기생이었던 마이너리티 가족들 그리고 종손의 그 묵직한 책임감.
조선시대 이 사연들은 모두 가족과 연관하여 생겨났다. 조선에서 사람들은 개인이 아닌 가족의 일원으로 살았다. 심지어 조선 말기에는 국가는 없고 가족만 있을 정도였다. 그들의 사연은 가족을 매개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족의 중심에 여자가 있었다.
여성사와 가족사를 전공하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으로 재직 중인 저자는 조선시대에 중국과 같은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 시행은 결국 실패했다고 간주하며 “조선의 여자들은 오랜 기간 남자와 동등한 재산권을 통해 특별한 경제 능력을 보유했으며 이는 세계 어디에도 흔치 않은 일”이라 지적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자들이 통장관리를 하는 재산 관리 감각이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에는 적처와 적자, 종부, 종손, 양자, 서얼, 첩, 기생 등 다양한 가족들이 등장한다. 여기 사연의 주인공들 중에는 이른바 좀 성공한 사람도 있고 영 일이 잘 안 풀린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 자신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대처 방식을 찾고 또 그것을 적용하려고 애썼다. 그것만큼은 잘나가던 사람이든 못나가던 사람이든 서로 다르지 않았다. 사연들은 애틋하다. 그런데 그 사연들은 어쩐지 현재 우리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일종의 공감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교훈이나 메시지보다도 감동적이다.
- 자네 언제 장가가니?, 남자가 움직이는 혼인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조선 사림파의 종장 김종직(1431~1492)은 아버지 김숙자의 고향이 경북 선산이었지만 외가인 밀양에서 나고 자랐다. 혼인 후에는 밀양을 떠나 부인 조씨의 고향인 김산(경북 김천)에서 생활했다. 왜 그랬을까? 조선시대에는 여자 집에서 혼인식을 하고 대개 여자는 친정에 머물고 남자가 자신의 집과 처가를 오가거나 아니면 처가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신사임당(1504~1551)이 혼인 후 20년 가까이 친정인 강릉과 그 주변에 살면서 율곡을 낳고 길렀던 것, 유희춘(1513~1577)의 손자 광선이 혼인 후 처가살이 떠날 때 가족들이 다시 못 볼 사람처럼 울며 아쉬워한 것, 권상일(1679~1759)이 며느리를 혼인한 지 2년 5개월 만에 맞이한 것은 모두 남자가 움직이는 혼인 형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장가를 드는’ 것이었다.
이른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관습은 18세기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여자가 혼인 후 친정에 머무는 기간만 짧아졌을 뿐이다. 20세기 초까지도 이른바 ‘해묵이’라고 해서 신부가 1, 2년 친정에 있는 것은 예사였다. 지금도 어른들이 총각들에게 ‘언제 장가가냐’고 묻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제도는 조선 가족에 여러 가지 독특한 특성을 부여했다. 아들과 딸의 권리와 의무가 자연스럽게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즉 재산을 상속받는 권리에 있어서 아들과 딸의 구분이 없었으며 제사를 지내는 의무도 아들과 딸이 비교적 균등하게 나누어 가졌다.
“율곡 집안 남매들 재산 분할 문서의 서문이다. 우선 부모 양쪽의 재산을 나이순으로 차례대로 『경국대전』에 따라 나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자녀 균분 상속을 말한다.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의 재산만이 아니라 어머니 신사임당의 재산까지 율곡과 그 남매들에게 똑같이 분배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각각의 분재 몫을 보면, 토지는 20~40복(卜)으로 차등이 있으나 노비는 대개 15~16구로 균등하게 분배했다. 토지 상속분에 차이가 있는 것은 땅의 비옥도나 집안 형편 등을 따른 것으로 보일 뿐, 특별히 아들딸에 대한 차등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즉, 같은 딸이라도 둘째 딸에게는 많이, 셋째 딸에게는 적게, 또 율곡에게는 많이 막내 위(瑋)에게는 좀 작게 분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녀 균분 상속은 16세기 당시 율곡 집안에서만 행한 일은 아니다. 16세기 대부분의 분재기(分財記)는 이처럼 정확한 균분 상속을 부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상속받은 재신을 여자들이 결혼한 뒤에도 자기 것으로 관리할 수 있었을까? 남편이나 시가의 재산과 섞여버리는 것은 아니었을까?” -본문 64~65쪽
지금의 통념과는 달리 왜 이렇게 딸에게도 재산을 똑같이 나눠줬을까? 남자는 혼인하면 여자 집을 왔다 갔다 하거나 아예 눌러 사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여자 집의 영향력이 컸다. 이런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딸들에게 재산을 줄 필요가 있었던 게 아닐까?
제사 또한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 지냈다. 조선중기까지 전문용어로 윤회봉사, 분할봉사니 해서 딸이 친정 부모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가령 아버지 제사를 올해는 큰아들이 지내고 내년에는 작은아들이 지내는 것은 윤회이고, 아버지 제사는 아들이 어머니 제사는 딸이 맡으면 그건 분할이다. 물론 남귀여가혼의 영향이다. 혼인해서 남자가 여자 집에 오래 거주하는 형태였기에, 딸과 사위가 제사에서 일정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시대 여자들의 제사에 대한 느낌은 오늘날 여성들의 그것과 크게 달랐을 것이다. 친정어머니 제사를 지내면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을 것 같다.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은 요즘처럼 직장여성의 육아 대부분을 친정이 감당하는 데 비해, 제사는 여전히 남자 집안 중심이란 점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지, 우리의 외가 친연성이 특별할 뿐만 아니라 그 연원의 깊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저자 이순구 박사는 “현재 여자들이 명절 제사에 부담감을 느끼는 것은 몸이 고단하기 때문만은 아니라 ‘내가 주인이다’라는 생각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며 제사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선후기 이전처럼 여자 집 제사도 지내든지 아니면 돌아가면서 하든지 아니면 없어지든지...
- 조선후기 여성들, 친정의 딸에서 시집의 며느리로 정체성의 변화
조선후기가 되면 이러한 시스템에 변화가 온다. 한쪽 집안, 즉 부계 쪽이 주도권을 갖게 된다. 즉, 여자들이 시집을 가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제사나 재산 상속에도 변화가 일어나서 남자 위주, 적장자 중심이 된다. 장남(종손)과 맏며느리(종부)는 가문의 핵심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시기 조선의 여성들은 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한다. 즉 딸에서 며느리로 주된 정체성이 바뀐 것이다. 부계성의 강화에 따라 여성들은 ‘시잡살이’를 하게 되었고, 따라서 자신을 친정의 딸보다는 시집의 며느리로 더 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딸로서의 권리를 잃어갔지만, 반면 며느리나 적처로서의 권리와 위치는 더 강하게 보장받기도 했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칠거지악’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실제로 이 때문에 부인이 쫓겨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칠거지악의 악조건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가령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 양자제도가 그 대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양자 들이기가 중국보다 심했던 이유에 대해 저자는 “남자들의 의리, 명분론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적처와 총부(남편이 죽고 없는 맏며느리)들의 의지가 중요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제사권을 유지하기 위해 양자들이기에 적극적이었고, 가능한 한 먼 친척에서 양자를 데려오려 했다. 바로 밑 시동생에게서 데려오면 생부인 시동생의 영향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조선의 총부는 중국과 달리 권한이 강했다. 남편 사후 제사를 계속 받들 수가 있었으며, 아들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아들이 없는 경우라도 양자를 들여 제사를 상속받을 수 있었다. 즉 가계계승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였다.
“오랫동안 조선의 가족 제도 안에서 강력한 힘을 가졌던 맏며느리들의 저력은 그냥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을까? 오랜 경험에서 축적된 능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DNA에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집에서든 밖에서든 적극적인 생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이 맏며느리의 DNA에 얼마간 힘입고 있다고 보면 지나친 생각일까?” - 본문 81쪽
- 남자에게 여자는 단순히 여자가 아니었다, 가문이라는 든든한 뒷배
조선의 여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받는 것은 자신의 집안, 즉 친정을 통해서였다. 조선에서는 혼인할 때 남자 집안과 여자 집안이 비교적 대등하게 결합했기 때문에 남자의 여자 집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남자에게 여자는 단순히 여자가 아니었다. 여자 집안의 대표자였다. 조선에서 여자들이 혼인 후에도 자신의 성(姓)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여자 집안의 대표자라는 표시였다. 남자들은 부인의 위치를 잘 보존해줘야만 여자 집안으로부터 지원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여자들은 집안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조선의 여자들은 성적 이미지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조선 시대 여자들은 중국과 달리 성적 파트너보다는 집안 공동 운영자의 이미지가 더 강했다.
왕실로 시집온 여자들 역시 친정의 대표자라는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계축일기』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을 말해준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에게 아들 영창대군을 내놓을 테니 친정집을 보호해달라고 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제안을 할 수 있을까? 인목대비가 살던 17세기는 남귀여가혼이 점차 줄어드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여자들의 의식 속에는 친정에 대한 소속감, 딸로서의 정체성이 남아 있었다.
- 조선 가족의 마이너리티, “서자 노수 족보에서 ‘서’ 자를 빼다”
조선시대 가문은 하나의 기업과 같았다. 가문을 통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조선이 망할 때쯤에는 국가는 없고 가문만 있을 정도였다. 기업과도 같은 가문은 종손이라는 CEO 외에 실무진이 필요했다. 이들은 꾸준히 집안일을 하면서 실질적인 권한을 키워갔다. 특히 경제력을 확보했다. 이는 ‘서얼허통’ 운동과는 또 다르게 서얼의 신분과 지위를 높여주었다. 드러난 운동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 나오는 조씨 무인의 천남, 권상일의 서아, 노상추의 승엽 등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면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서얼의 삶은 결코 만만히 볼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1766년 11월 2일, 집안 제사가 있는 자리에서 노수는 처음으로 족보에서 ‘서’ 자를 빼달라고 요구한다. 노상추는 종중(宗中)을 모욕하는 처사라며 말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노수는 포기하지 않고 틈만 나면 다시 요구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1771년 족보에서 ‘서’ 자를 빼는 데 성공한다. 종중은 노수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어 종회를 소집했고, 노상추 동네 사람들도 몇몇 종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노상추는 가지 않는다. 특별히 바쁜 일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참석하지 않았다. 당일 저녁, 회의에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서’ 자를 빼기로 결정했으며 곧 새 족보를 발행하게 될 거라고 하자, 노상추는 분개한다.
“이런 일은 한두 사람이 결정할 일이 아닌데, 끝내 이렇게 돼버리고 말았구나. 아, 우리 집안이 망하는 것은 하루를 기다릴 것도 없겠다. 일개 서얼의 말을 이렇게 좇아가다니 오호 통재라, 오호 통재라.” - 본문 177쪽
서자 노수는 경제력을 키우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냈다. 노수가 족보에서 ‘서’ 자를 제거하고 문중에서 위치를 확보해가는 과정은 조선후기 서얼들의 신분 상승을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조선 사회 내의 조용한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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