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의 걸작 '25시'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비극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기계 문명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인간 존엄성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 이 소설은 루마니아의 순박한 농부였던 '요한 모리츠'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는 특별한 정치적 신념이나 야망이 없는 평범한 가장이었지만, 시대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오직 '유대인'이라는 잘못된 낙인이 찍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혹한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
25시를 읽고 나니 오래전 읽었던 조정래의 오 하느님이 생각났다.
주인공은 영문을 모른채 온갖 고생을 당하는데, 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에 따른 것이었다.
조정래의 오 하느님 주인공은 살기위하여 무던한 노력을 하지만 개고생하다 결국 허망하게 죽는 것으로 끝이 나고(너무나 억울하여 욕이 절로 나온다), 25시는 13년 동안 약100군데의 수용소를 전전하다 잡힐 때와 마찬가지로 이유 없이 풀려나 18시간 동안 자유인이 되었다가 선택의 여지 없이 결국 온 가족이 지원병으로 참전하기를 원하며 끝이 난다.
두 주인공 모두 시대의 격류에 휩쓸려 이유 모를 고난을 당한다는 설정은 같지만,
C.V.게오르규는 그 이유를 기계문명에 몰려 비인간화의 과정을 겪는 현대인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새롭다.
그는 끊임없이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비인간화의 과정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라 그런지 씁쓸하다.
p55 “그만 빈정거리라고, 조르주! 우리들 주변에서 지금 막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네. 그것이 어디서 터져 언제 시작되고, 또 얼마나 오래 계속될는지는 나도 모르겠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은 느끼고 있네. 우리는 그 폭풍우에 휩쓸리고 있네. 그 폭풍우가 우리의 살을 찢고 뼈를 하나하나 부러뜨리고 말 거야. 나는 오직 침몰하려는 배에서 재빨리 도망치는 쥐만이 갖는 예감을 가지고 이 사건을 느끼고 있단 말이야. 그 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거야. 이 세상 어디를 돌아봐도 우리를 위한 피난처는 없다네” 트라이안이 말했다.
“자넨 대체 어떤 사건을 암시하려는 건가?”
“자네가 혁명이라고 불러도 좋아.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의 혁명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전 인류가 그 희생자이고.”
“그런데 그것이 언제 폭발한다는 거야?” 검사는 여전히 트라이안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이렇게 물었다.
“글쎄, 혁명은 이미 터졌다니까. 자네의 그 회의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이미 시작되고 말았네. 아버지, 어머니, 자네, 나 그리고 사람들 모두 차차 위험을 느끼고 도망치거나 혹은 숨으려고 할 걸세. 더러는 벌써 마치 폭풍우가 올 것을 예감한 야생동물처럼 숨기 시작했다네. 그래서 나는 시골로 내려와 살겠다고 한 거네. 공산당들은 그 위험의 책임이 파시스트들에게 있고, 그 위험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처치해버리는 거라고 주장하고 있지. 또 나치스들은 유대인을 죽임으로써 자기들 신변을 보호하려고 하고 있어. 그러나 바로 그러한 것이 전 인류가 위험 앞에서 느끼는 공포의 징조인 거야. 그 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만 차이가 있을 뿐 그 위험은 어딜 가나 있다네.”
“그런데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그 큰 위험이 도대체 뭔가?”
“그건 기계 노예라는 거야!” 트라이안 코르가는 계속 말했다. “조르주, 자네도 알다시피 기계 노예란, 그것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우리에게 수많은 봉사를 해주는 하인이야.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고, 빛을 주고, 세수할 물을 보내주고, 마사지를 해주고, 다이얼을 돌리면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고, 길을 만들어주고, 산을 헐어주고 있지.”
“나에게는 자네 말이 시적 비유로만 들리는군.”
“비유가 아냐, 조르주! 기계 노예는 현실 그 자체야. 아무도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거든.”
“그 존재를 부정하는 건 아냐. 하지만 왜 하필이면 ‘기계노예’라고 부르냔 말이야. 단순히 기계의 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검사가 즉시 대꾸했다.
“현대사회의 기계 노예의 동지인 옛날의 인간 노예도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의 눈으로 보면 하나의 맹목적인 힘, 생명이 없는 사물로 보일거야. 그 노예들을 팔거나 사거나 선물로 주거나 죽여도 상관없는 존재였으니까. 그들은 오로지 체력과 노동력에 따라 평가되어왔던 거야. 오늘날 기계 노예에 대한 평가의 기준도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차이는 매우 크지! 인간 노예를 기계 노예로 바꿔놓을 수는 없으니까.” 검사가 반박했다.
“천만에, 바로 그렇게 바뀌어가고 있다네! 기계 노예는 인간 노예와 대치되기 시작했단 말일세. 현대의 기선은 갤리선의 자리를 빼앗았지. 지금은 배가 갤리선처럼 노예들의 힘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 노예의 힘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어. 노예를 가질 수 있는 현대의 부호는 이제 저녁이 되면 로마나 아테네의 자기 선조가 했듯이 손뼉을 쳐서 노에가 불을 들고 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단추만 누르면 돼.
p63 인간을 희생물로 바치는 일은 예사롭게 행해지고 있어.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희생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일로 간주되고 있지. 인간의 생명은 에너지의 원천으로밖엔 가치가 없단 말이야. 그 가치야말로 순수한 과학적 기준에 의한 것이지. 이것이 우리 기술의 암흑적 야만의 법칙이거든. 기계 노예가 전면적인 승리를 거둔 후에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거란 말이야.“
“그런데 자네가 예언하는 그 혁명은 언제 일어난단 말인가?” 검사가 반문했다.
“벌써 시작되었지! 우리는 이미 그 진행 과정에 말려들어간 것이고, 우리들 대부분은 거기서 살아남지 못할 걸세.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끝내지 못하고 죽을까 봐 걱정이야. 나도 또한 사라져버릴 테니까.”
“자네는 너무 지나친 염세주의에 바진 것 같군.” 검사가 말했다.
“난 시인이야, 조르주. 나는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미래를 예측해 볼 수 있는 감각을 갖고 있어. 시인은 곧 예언자이니까. 나는 이런 슬픈 일을 예언해야 하는 최초의 시인이 된 것이 괴롭지만, 시인이라는 나의 천직 때문에 할 수 없이 말하는 걸세. 비록 그것이 불쾌한 일일지라도 나는 힘차게 부르짖지 않을 수 없네.”
p67 “시민이란 인생에서 사회적 가치만을 인정하는 인간을 말하는 거야. 마치 기계의 피스톤처럼 하나의 동작만 영원히 반복하는 인간 말이야. 하지만 피스톤과 다른 점은, 시민은 자기의 활동을 상징으로 만들어놓고 그것을 세상 전체에 표본으로 세워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모방하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점이지. 시민이란 인간이 기계 노예와 교섭을 맺은 이후에 지구상에 나타난 가장 위험한 동물이거든. 그는 인간고 짐승이 갖는 잔인성과 기계가 가진 냉철한 무관심을 겸비하고 있다네. 러시아 사람이 가장 완벽한 그 전형을 만들어냈지, 그게 바로 ‘인민위원’이야.”
p 70 ‘비록 내가 실제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또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런 행동은 내 주변에 있는 사람과 괴로움을 나누어 갖는 데 필요한 거야.’ 자기의 행동을 분석해보면서, 트라이안은 앞으로도 이와 같은 환경에 놓이게 되면 현재와 같은 행동을 취하게 될거라고 생각했다.
사제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도 역시 젖어 있었다. 이마에서, 뺨에서, 수염에서 빗물이 흘러내렸다. 그도 자기 아들처럼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빗속에서 요한 모리츠를 따라다녔던 것이다. ‘하느님도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와 같은 헛수고를 하셨으리라’ 하고 트라이안은 생각했다. ‘하느님은 실제로 유용하지 않은 많은 사물들을 창조하셨어. 하지만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야. 인간도 하나의 무용한 창조물이다. 그것은 지금의 나의 행동과 아버지의 행동처럼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다. 하지만 그 성의는 훌륭하다. 그건 헛수고이긴 해도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해.’
p147 “인간은 죽을 때가 아니면 축복받을 권리가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냉정히 생각해보면 당신도 잘 알게 될 거예요. 그러나 일단 죽고 나면 인간은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유감스런 일이죠. 인간은 정말 축복받아야 할 유일한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겁니다.”
노인은 의자에 도로 주저앉았다.
“난 당신이 애정 때문에 결혼을 하셨다고 생각했는데요.”
“내가 연애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세요? 당신과 같이 아는 것이 많으신 분이 왜 그렇게 알아듣지 못하시는 거예요?” 그녀는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십니까? 지금 울고 계신 것 같은데.”
“몹시 피곤하신 모양이군요, 슈타인 씨.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당신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유대인답지 않아요. 난 트라이안 코루가를 사랑해요. 또 그는 내가 사랑한 첫 남자입니다. 벌써 몇 년 전부터 나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이를 사랑해 왔어요. 그러나 나는 사랑 때문에 결혼한 것은 아니에요. 새 인종법 때문에 결혼을 했지요. 신문사를 살리기 위해서, 또 내 생활을 구하기 위해서예요. 이제 내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레오폴드 슈타인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엘로오노라 베스트의 손에 키스를 하고 문은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그를 다시 불렀다.
“이번 주말에 나는 시골에 있는 시댁으로 가요. 트라이안의 부친은 그리스정교회의 사제입니다. 며칠간 거기서 묵을 예정이에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신문사를 포함한 내 동산과 부동산 전부를 트라이안 코루가의 명의로 바꾸는 증여 증서를 만들어주세요. 증여하는 데 있어서 무슨 곤란한 점이 있으면 매매 증서를 만들어도 좋아요. 요컨대 법적으로 가장 유효하고도 유리한 해결 방법을 강구해보세요. 곧 일을 착수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청말 총명하십니다.” 노인이 말했다.
“총명한 게 아니에요. 나는 단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모든 힘과 본능과 투시력을 총동원하여 싸우는 한 여성일 뿐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슈타인씨.”
p150 “진정으로 누구를 사랑하려면 미래를 믿을 수 있어야 하고, 행복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보다 더 아이로니컬한 것은, 특히 이 행복이 영원한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것을 믿기에는 너무 총명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이런 말은 실례가 되겠지만, 당신은 애정 때문에 결혼한 것은 아니라는 증거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녀가 물었다.
“애정도 아니고 타산도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공포지요. 공포에 빠져 절만한 자의 행동은 놀랄 만큼 신속하답니다.”
“그렇다면 애정은 아무 작용도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엘레오노라 베스트가 물었다.
“애정도 어느 정도는 작용을 했죠. 그러나 당신의 사랑은 인간이 아직 숲 속에 살고 있을 때, 즉 밤낮으로 야수들에게 습격 받을 위험이 있었을 때 여성이 느끼던 사랑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그럴 때에만 여성들은 절망적으로 남성의 무릎에 매달려, 그의 보호와 사랑과 안전을 요구하며, 모든 것을 그런 열렬한 정열을 가지고 바라는 것입니다.
p156 잠수함 속에는 환기를 해야 할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특수 기계가 있었는데, 옛날에는 그 기계가 없어서 대신 흰토끼들을 싣고 다녔다는 거야. 공기가 탁해져서 토끼가 죽어버리면 수부들은 앞으로 대여섯 시간밖에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거요. 그러면 함장은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 하지. 필사적인 노력을 해서 바다 표면으로 올라오든가, 아니면 그대로 바다 속에 있다가 전원이 모두 죽어버리든가 말이야. 만약 죽기로 결정을 내리면 사람들은 죽어가는 걸 보지 않으려고 서로 권총을 쏜다고 하더군. 내가 탄 잠수함에는 흰토끼는 없었지만 기계가 있었다오. 함장은 내가 산소 분량이 조금만 줄어들어도 금세 알아챈다는 걸 눈여겨보았어. 그는 처음엔 나의 감수성을 비웃었지. 그러다가 나중엔 그 기계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어. 나만 쳐다보면 알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나는 산소의 양이 부족한지 아닌지를 계량기와 조금도 틀리지 않게 정확히 그에게 알려주었소. 산소가 부족하여 호흡곤란을 일으키게될 시간을 다른 사람들보다 두 시간 먼저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즉 흰토끼와 나의 타고난 재능이었어. 그런데 나는 얼마 전부터 마치 잠수함을 탔을 때처럼 공기가 희박해져서 숨이 가빠 견딜 수 없구려.“
“어디의 공기 말이에요?” 노라가 물었다.
“현대사회가 갖고 있는 공기 말이오. 인간은 이젠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소. 관리, 군대, 정부, 국가조직, 행정 등 모든 것이 힘을 합하여 인간을 질식시키고 있소. 현대사회는 기계와 기계 노예에게 봉사하고 있거든. 마치 그것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말이야. 이렇듯 인간은 모두 질식할 운명에 놓여 있지만, 그들은 아직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지. 그들은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고집스럽게 믿고 있소. 내가 타고 있던 잠수함의 승무원이 지독히 탁한 공기 속에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그들은 토끼가 죽은 뒤 여섯 시간 동안은 살 수 있지만, 나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소.”
p319 "그들은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영원히 의식하지 못할 거요. 진보의 최후 단계에 접어든 서구 문명은 개인의 존재에는 신경도 쓰지 않게 마련이오. 그러므로 문명이 개인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한다는 건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일이라오. 이 사회는 개인이 지닌 약간의 가치밖에 인정하지 않거든. 그러므로 개인으로서의 완전한 인간은 이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거요. 죄 없이 갇혀 있는 엘레오노라 베스트 당신이나 그 밖의 많은 사람들도 이젠 그들 자신으로는 존재할 수 없단 말이오. 간단히 말하면 우리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오. 우리는 단지 하나의 카테고리의 무한히 작은 분자로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지. 예를 들면 당신은 독일 영토 내에서 체포된 한 사람의 적국 시민에 지나지 않소, 바로 이것이 서구의 기술 사회를 한결 같이 똑같은 사회로 만들 수 있는 하나의 특성이지. 또한 바로 그것이 그들 앞에 당신을 나타낼 수 있는 전부인 거요. 이 사회는 당신을 그러한 특징으로밖에 인정하지 않고, 결국에 가서는 곱셈, 나눗셈, 뺄셈, 덧셈의 법칙에 따라 당신의 소속된 그룹 전체로서의 당신을 대우하는 것뿐이오.
p324 "당신 말도 옳아.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사람들은 살 수 있지. 경우에 따라서는 서구인들보다 나은 생활을 할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우리의 판단이 믿을 만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단 말이오. 객관적인 진리는 없는 거요. 모든 것이 주관적인 것이야. 나로서는 소비에트적인 낙원에서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소. 내 고집을 어리석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 생각이 옳거든. 한 인간에게 있어서 옳은 것은 오직 자기 개인적인 견해이니까 말이오. 개인적으로 나는 볼가의 동력화한 야수들의 손에 넘어가기는 싫어. 내가 비정상적인지도 모르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정신은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삶을 원하지 않아. 예지를 가진 정신은 오직 삶만을 아낄 수는 없는 법이오. 나는 그다지 생명에 애착을 느끼진 않아. 난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 그러나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는 가장 적합한 생활 조건 하에서 살고 싶어. 내 인생관이 옳지 않다고 지적해봐야 소용이 없을 거요. 난 어떤 의견도 듣지 않을 테니까 말이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살아라, 혹은 저렇게 살아라 하고 지시를 한다든가, 또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생활 태도를 나에게 강요하는 것은 절대로 참을 수 없소. 내 생명은 내 것이야. 내 생명은 집단농장이나 공유재산제나 정치위원에게 소속된 게 아니야. 그러므로 나 자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살 권리가 있는 거야.
p339 사람은 어떤 사나운 짐승도 길들일 수 있어.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 지구상에는 새로운 종류의 동물이 나타났단 말이야. 그 동물의 이름은 시민이라고 해. 그들은 숲 속이나 밀림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살고 있지. 그런데도 그들은 밀림의 무서운 짐승들보다 훨씬 더 잔인하단 말이야. 그들은 인간과 기계가 함께 만들어낸 잡종으로서, 일종의 퇴화 족속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힘이 강한 종족이라네. 그들의 외모는 인간과 흡사해서 가끔 사람과 혼동하게 된다네. 그러나 우리는 곧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 기계와 같은 동작을 취한다는 걸 알게 된다네. 그들의 두뇌는 일종의 기계란 말일세. 그러니 그들은 기계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야. 그들의 욕망은 야수의 그것과 같거든. 그렇다고 그들의 진짜 야수는 아냐. 그게 시민이라는 거야..... 괴상한 잡종이지. 그들이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네.” 트라이안이 말했다.
요한 모리츠는 그 시민이라는 것을 상상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머리에 잘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후에 그는 마르쿠 골덴베르크를 생각했으나 트라이안이 말을 계속하는 바람에 그의 영상은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작가야. 내 생각으로는 작가란 인간을 길들이는 사람이네. 아름다움, 다시 말하면 진리를 인간에게 제시해줌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는 사람이지. 나는 시민을 길들이고 싶은 생각에서 소설을 하나 쓰기 시작했는데 이미 제4장까지 썼네. 그런데 시민들이 나를 이렇게 감금해놓아서 더 이상 못 쓰고 있어. 제5장은 아직 시작하지도 못한 형편이냐.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쓸 생각이 없어졌네. 작품 출판을 하지 않겠네. 제5장 대신에 시민을 길들이는 다른 글을 쓰고 싶어졌기 때문이야. 만일 그 일에 성공한다면, 나는 마음 편히 죽을 수 있어. 이건 소설도 아니고 희곡도 아냐. 시민들은 문학을 싫어하거든. 그들을 잘 길들이려면 시민이 좋아할 수 있는 장르로 써야 한단 말이야. 나는 ‘탄원서’를 쓰겠네. 시민들은 소설이나 희곡이나 시를 읽느라고 허비할 시간이 없거든. 그들이 읽는 건 탄원서뿐이란 말이야.” 트라인안이 말했다.
p356
어떤 공포일지라도 끝이 있고
어떤 슬픔일지라도 종말이 있으니
인생살이엔 끝없는 근심에 쓰일 시간은 없어라
그러나 이것은 삶의 테두리 밖의 것
시간을 넘어선 것
이것은 간악과 불의의 기나긴 시간이어라
씻어버릴 수 없는 오물로 더렵혀진
우리는 괴상한 독벌레와 어울렸다네
우리들, 우리가 사는 집과 도시만이 아니라네
이 세상 전체가 오염되었다네
“좀 더 큰 소리로 말해주십시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모리츠가 말했다.
“대기를 깨끗이 하라! 하늘을 말끔히 닦아라! 바람을 씻어라! 돌에서 돌을 골라내고, 팔에서 살갗을 벗겨내고, 뼈에서 근육을 발라내어 모두 씻어라! 돌멩이도 씻고, 뼈도 씻고, 머리도 씻고, 영혼도 씻어라! 그 모든 걸 씻어라! T.S 엘리엇의 말이지.”
p401 트라이안, 사람들이 그처럼 죽음을 지적하지 않는 한, 생명은 객관적인 목적을 가지지 않는 법이다. 즉 사실적이고 진실한 목적은 모두 주관적인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라. 그런데 서구의 기술 사회는 생명에 객관적인 목적을 부여하려고 하거든. 이건 생명을 멸망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말이야. 그들은 생명을 통계로 환원시켰어. 그러나 모든 통계는 유일한 경우를 인정치 않고 있지. 인류가 진화하면 할수록 개인의 특성과 유일성은 마땅히 더욱 소중히 다루어져야 하는 거야. 그런데도 기술 사회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단다. 그들은 모든 걸 일반화하고 있어. 서구 사람들이 단일한 것, 즉 개인적 존재에 대한 가치관을 상실한 것은, 모든 것을 일반화하고 일반적인 것에서만 가치를 찾으려 하기 때문이야. 여기에서 러시아적인, 또는 미국적인 집합주의의 가공할 만한 위험이 생기는 거란다.
이 사회가 붕괴될 것이라고 우리들이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거다. 어느 날 저녁 판타나에서 너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기술 문명의 사회는 개인의 생활과 양립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어. 그건 인간을 질식시키거든. 그래서 사람들이 네 소설에 나오는 흰토끼처럼 죽어가고 있지. 우리들은 그야말로 네가 그 책에서 쓰려고 했던 그대로 기계 노예와 기계와 시민 이외에는 활동할 수 없는 이 사회의 독한 분위기 속에서 전부 질식되어 죽어가고 있는 거야. 사람들은 이와 같이 중한 죄를 범하고, 하느님에 대해서도 죄를 짓고 있어. 우리는 그야말로 기를 쓰고 우리의 고유한 선인 하느님을 거역하는 행동을 하고 있단 말이다. 바로 인간 사회가 지금까지 도달해본 적이 없는 최후의 실권 단계야. 그리고 마치 유사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수없이 많은 사회가 멸명해간 것처럼 이 사회도 멸망하고 말 거야. 사람들은 이 사회를 논리적인 질서로써 구원하려고 하지만, 결국 바로 그 질서가 이 사회를 죽이고 있는 거야. 이것이 서구 기술 사회의 죄악이다. 그들은 산 사람을 죽이고, 인간을 이론과 추상과 계획의 희생물로 만들어버리지. 그것이 바로 인간을 희생물로 바치는 현대적 형태야. 화형과 화형 도구는 사무실과 통계로 바뀌어졌을 뿐이냐. 이것은 인간 희생으로 이글거리는 불꽃 속에서 생겨난 두 개의 현실적인 사회적 신화란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는 사회조직의 형식면에서는 확실히 전체주의보다 우수한 것이지만, 인간을 사회적인 차원에서만 취급한다는 점은 다를 바가 없어. 민주주의를 생명의 의미와 혼동하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고, 또 생명을 유일한 차원으로 축소시켜버리는 행위지. 바로 이것이 나치 당원과 공산당원이 함께 저지르고 있는 커다란 과오야.
인간의 생명은 그 전체 속에서 움직이고 살 때에만 의미를 가지게 돼.
생명의 궁극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예술과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기구, 즉 예술적 창조의 기구, 모든 창조의 기구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돼. 생명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함에 있어서 이성은 부수적인 역할밖에 못하는 거야.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이해함에 있어 수학이나 통계나 논리가 아무 도움도 못 되는 것처럼, 그것들도 인간 생명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거야.
그러나 서구의 기술 사회는 베토벤이나 라파엘로를 수학적인 계산에 의해서 이해하려고 기를 쓰고 있지. 또한 인안의 생활을 통계학으로 이해하고 개선하려고 열중하고 있어. 이러한 시도는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비극적인 거란다.
물론 최선의 경우, 이러한 제도에 의해서 인간은 사회적 완성의 절정에 도달할 수도 있어. 그러나 그건 인간에게 아무런 구원도 가져오지 못해. 인간의 생명은 사회적인 것과 자동적인 것, 그리고 기계의 법칙으로 환원되는 그 순간부터 존재 가치를 상실해버리고 마는 거야. 기계의 법칙은 생명에 대해 결코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으니까. 만일 생명으로부터 그것이 가진 의미-생명이 가진 독특하고도 완전무상하며, 또 논리를 초월한 유일한 의미-를 제거한다면, 그때 생명 그 자체는 사라지고 마는 거야. 생명의 의미는 전적으로 개인적이며 내적인 데 있다.
현대사회는 오래전부터 이 진리를 포기하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다른 길을 향해 돌진하는 절망적인 노력을 하고 있지. 지금 라인 강이나 다뉴브 강이나 볼가 강의 물결이 노예의 눈물로 넘치게 된 것도 이때문이란다. 머지않아 이와 같은 눈물이 유럽의 모든 강과 지구상의 모든 강에 흐르게 되고, 마침내는 모든 바라와 대양이 기술, 국가, 관료, 자본의 노예가 된 인간이 흘리는 눈물로 범람하는 날이 올 거야.
결국 하느님이-과거에도 수없이 그랬지만- 인간을 불쌍히 여겨 구원의 손길을 뻗으시겠지. 그래서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노아의 방주처럼, 그때까지 진정한 인간성을 간직하고 있던 몇몇 사람들만이 이 전체적인 큰 재앙의 물결 위로 떠오를 거다. 역사를 따라서 거듭 반복되듯이, 인류를 구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들이야.
그러나 구원은 참다운 인간, 즉 개인에게만 내려지는 거야. 이때 구원 받은 것은 카테고리는 아니란 말이다. 어떤 교회도, 어떤 국민도, 어떤 국가도, 어떤 대륙도 단체나 카테고리에 의해서 인간을 구할 수 는 없어. 오직 참다운 인간만이 종교나 인종이나 그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적·정치적 카테고리와 관계없이 개별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그가 속한 카테고리에 의해서 판단되어서는 안 되는 거야. 카테고리라는 것은 인간의 두뇌가 만들어낸 가장 야만적이고 가장 악마적인 착오야. 우리들의 적도 인간이지, 카테고리는 아니란 걸 잊어서는 안 된단다.”
“아버지, 새삼스럽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피곤하실 텐데 어서 주무세요.” 사제가 숨을 돌리기 위해 말을 멈추자 트라이안 코루가는 그 틈을 타서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대로 하마. 곧 자야지. 그러나 자기 전에 나는 지금 말한 것과 같은 걸 너한테 모두 말해주고 싶구나. 너도 나처럼 이런 걸 느끼고 생각하고 있겠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걸 알 수 있고 느낄 테지. 요한 모르츠도 느끼고 있어. 그 말을 되풀이했더니 어쩐지 기분이 좋구나. 그 말을 하지 않고서는 나는 잘 수가 없었단다.”
“손이 차군요, 아버지.”
“알고 있어, 트라이안. 아마 내가 극복하지 못한 이상한 불안 때문에 그런 모양이다. 육체적 근심보다 더 강한 불안 말이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아버지. 무슨 뜻이에요? 기분이 좋지 않으신가요?” 트라이안이 물었다.
“아니,” 사제가 대답했다.
사제의 입술은-마치 전신에 전기라도 통한 것처럼-고통을 못 이겨 일그러지며 경련을 일으켰다. 트라이안은 아버지 위로 몸을 굽혔다.
그 순간 사랑이 넘치는 인자한 미소를 띤 사제의 얼굴이 갑자기 훤해졌다. 이마 뒤쪽 어디선가 탐조등이 비쳐들어왔던 것이다.
트라이안은 임종이 다가온 것을 알고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p490 사랑, 그 최고의 정열은 개개의 인간을 함부로 바꿔놓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평가하는 사회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당신들 사회에서는 하나하나의 인간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네들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판단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랑한다고 여기는 여성을 하느님이나 자연에 의해 창조된 유일한 책-단 한권의 한정판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당신들 나라에서는 인간을 대량생산된 존재로 보고 있지요. 그러므로 당신 눈에는 모든 여자가 별로 차이가 없는 비슷비슷한 물건처럼 보일 겁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당신은 사랑의 참된 가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 사회에서는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포착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자살하는 것은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지요. 그들은 사랑이 대치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여자라는 자부심을 내 가슴속에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는 나에게 내가 이 지구상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존재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 그렇게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게 그런 자신감을 심어주지 못하는 사람은 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이런 확신을 갖지 못하는 여자는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한 나는 그 사람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게 그런 확신을 갖게 할 수 있습니까, 루이스 씨? 당신은 진심으로 나를 다른 여자와 바꿀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하시나요? 이 세상 어디에도 나를 대신할 여자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을 거예요. 만약 내가 거절하면 당신은 반드시 아내가 되어줄 다른 여자를 찾을 거예요. 그리고 또 그 여자한테서 거절당하면 당신은 다시 세 번째 여자를 찾아보겠지요. 내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죠?“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거절하다니 정말 유감이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 유감이란 말이야.”
“루이스 씨! 우리들의 이 중요한 공부를 계속하면 어떨까요?”노라는 소송 기록을 펼쳐들고 이렇게 말했다. “이 수용소의 사람들이 모두 지원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아이들과 부녀자와 노인들까지도 섞여 있습니다. 모두가 지원병이 되기를 원합니다. 모두가 당신들 편이 되어 싸우기를 희망합니다.”
엘레오노라 베스트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서양에 있는 수많은 외국 시민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들은 모두가 소련의 공포 정치를 피해 도망해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도피할 장소를 찾아 미국, 영국, 프랑스의 점령 지구로 왔다. 그들이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그저 소련군을 피하려는 생각에서 무작정 달려온 것이다. 야만성, 공포, 죽음, 고통을 피하여 맹목적으로 이 지점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그들은 후방으로 되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거기에는 암흑과 피만이 있었다. 공포와 죄악만이 있었다. 그들은 소련군이 없는 곳에 이르자 땅에 입을 맞추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대지에 입을 맞추며, 이곳이야말로 모든 희망과 기대의 땅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과연 거기서 잘살 수 있을 것인지 확인해 보지도 않고 그들은 입부터 맞추었던 것이다. 소련군이 없는 땅,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누가 살고, 어느 나라가 점령했느냐 하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