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세계문학' 15권. 민용태 고려대 명예교수가 라틴아메리카 현대시인 24인의 시편을 가려뽑아 옮긴 시집. 현대 라틴아메리카 대표시인들의 주옥같은 시편을 두루 골랐으며, 편역자의 자세한 시인별 소개와 풍성한 각주로 작품 이해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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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태양의 돌 (라틴아메리카 현대대표시선) 내용 요약
이 책은 멕시코의 거장 옥타비오 파스를 필두로 니카노르 파라,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등 라틴아메리카 문학사를 수놓은 위대한 시인 8명의 작품을 엮은 시선집입니다. 책의 표제작인 ‘태양의 돌’은 아즈텍 문명의 순환적 시간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인간의 삶과 역사가 거대한 우주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생성되고 소멸하는지를 장엄하게 그려냅니다. 옥타비오 파스는 584행에 달하는 긴 시를 통해 사랑과 고독, 신화와 역사가 뒤엉킨 복잡한 인간 내면을 파고들며 독자에게 존재의 근원에
말? 그렇다, 그건 공기다,
대기 속에 사라지니까.
이 말들 속에 나 또한 사라지게 하라,
그러다가 어느 입술에 감도는 대기이게 하라,
정처 없이 떠도는 바람
떠돌며 바람을 흩뜨리는 바람.
빛도 스스로의 빛 속에 사라지나니.
- ‘시인의 숙명’, Octavio Paz
허무와 꿈 사이
부서진 기둥 밑에서
나의 불면의 시간들을 가로질러가는
너의 이름, 음절들.
불그레한 너의 긴 머리칼,
한여름의 번갯불이
밤의 등 뒤에서
달콤한 횡포의 불빛으로 떨리고 있다.
퍠허에서 솟아나
허무로부터 너를 벼려내는
꿈의 어두운 물살:
물에 젖은 밤의 해변,
거기 눈먼 바다가 밀려와
미친 듯 후려치고 있다.
- ‘독백’, Octavio Paz
깨어진 시,
번갯불에 쪼개진 나무 둥치 같은,
자신이 떠받고 있는 꽃의 광란으로
부서진 꽃줄기 같은,
그런 시가 문득 그 부서진 틈바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같은 것을 보여준다.
오직 그 많은 것을 사랑한다는 부끄러움이
사랑을 광란으로 몰아가다,
어느날 문득 사랑은 눈앞에 난 오솔길로
갑자기 옮아오는 해로 둔갑한다.
시는 깨어진다
사랑이 스스로의 본질 속에서
부끄러움을 잃고
그 다양성의 통일성을 회복하도록.
시는 깨어진다
해가 돌아오도록.
- ‘제7의 수직의 시 5’, Roberto Juarroz
항상 나는 나의 좆이었습니다, 하느님,
항상 나는 여자에게 들어가는
내 살의 한 조각,
나를 남자이게 하고, 세상을 알게 하고,
삶과 죽음을 가진 사람이게 한 것.
왜 너는 나를 작아지게 하는가?
나는 너의 지혜로부터 배우고 싶은 게 없다.
나는 계속 꿋꿋이, 꿋꿋이 서 있는 남근이고 싶다.
그리하여 정확한 시간에
달콤한 땅의 달콤한 흙더미에 들어가고 싶다.
80세까지만 살아서
제대로 서 있게 해다오!
- ‘항상 나는 나의 좆이었습니다’, Jaime Sabines
누구도 이 고백을
비난이나 눈물로 격하시키지 말라
달인의 득도랄까, 신의 훌륭한 아이러니,
책과 밤을 내게 함께 내리신 이 크막한 은혜
이 책의 도시에
나의 이 빛을 잃은 눈을 주인 되게 하시다.
오직 꿈의 도서관에서나 책을 읽을 수 있는 두 눈,
자꾸만 뒤로 물러나는 버르장머리 없는 글씨들
나의 불타는 눈의 열망에도 끝내 허락하지 않는 여명, 헛되이
대낮은 끝없는 책들을 펼쳐 보이지만
모두 다 어렵기는, 이미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라져버린
그 어려운 고서들 같은.
(어떤 그리스의 이야기가 있지)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어떤 왕이 그 많은 과일밭, 샘물 속에서 죽어갔다는;
나는 이 높고 깊은 눈먼 도서관 서가 사이를
자향없이 헤맨다, 끝에서 끝까지.
백과사전들, 지도들, 동양,
서양, 시대들, 왕조들,
상징들, 우주와 우주창시론들을
벽들이 보라고 내민다, 쓸데없이.
나의 그림자 속에서 나는 서서히
갈 곳 모르는 지팡이로 텅 빈 어둠을
더듬는다. 나, 일종의 책의 세상에서
하나의 천국을 꿈꾸었던 나.
어떤 '우연'이라는 말 하나로
명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이것들을 지배한다;
다른 사람도 또다른 어두운 하오에
이 많은 책들과 어둠을 선물로 받았겠지.
서서히 서가를 거닐다보면
형언할 수 없는 성스러운 공포로 느낀다,
나는 내가 딴사람인 것을, 다른 어떤 죽은 사람,
나와 똑같은 날에 똑같은 발걸음을 옮겼을 다른 어떤 사람.
그 둘 중의 누가 이 시를 쓰고 있는가,
그 많은 사람들의 나, 아니면 나라는 단 하나의 그림자?
말이 무슨 상관이랴, 내게 오는 이 말이,
결국은 구분할 수 없는, 똑같은 저주인걸.
그루사끄거나 보르헤스, 그 누군가
이 사랑스런 세상을 보고 있다
창백한 잿더미 속에 희미하게 변해가며
자꾸만 꺼져가는 세상,
꿈과 망각을 닮은.
- ‘은혜의 시’, Jorge Luis Borges
꺼져가는 한숨이 멀어져가는
물결에 수없이 굽이친다:
수천의 거울이 보드랍게
나를 완전히 산산조각으로 만든다.
웃음 짓는 통곡, 원경에 마음 둔
울부짖음. 그 많은 포효가
차가운 뱃길을 따라 항해하고 있었다
나를 떠나는 소리들, 나의 나날은
날개 돋은 다리 위로 그렇게 날아간다.
- ‘바다 12’, Eugenio Flor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