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ref="/catalog/book.asp?ISBN=8982730532"><드래곤 라자></a>로 한국 판타지소설계의 정상에 선 이영도의 신작이 출간됐다. 이전 작품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적 소재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 노력이 돋보인다.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제목은 '백성들이 흘려야 할 눈물을 대신 마시는 왕'을 의미한다.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군.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살지. 누구도 내놓고 싶지 않은 귀중한 것을 마시니.
이 두 문장은 소설 전체를 열고 닫는 열쇠처럼 느껴졌다. 처음 이 대구를 읽었을 때는 그저 대칭적인 아름다움 정도로 받아들였는데, 다 읽고 나니 이게 이 소설이 세워놓은 가장 근본적인 저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움과 생존. 이 둘은 결코 같은 것을 마시고 사는 새가 될 수 없었다.
피는 누구도 자기 몸 밖으로 내놓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다. 반대로 눈물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몸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그래서 눈물을 마시는 새는 단순히 스스로 많이 슬퍼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가 견디지 못해 흘려보낸 슬픔까지 받아 마시는 존재에 가까웠다. 한쪽은 남들이 버리고 싶은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한쪽은 남들이 끝까지 지키고 싶은 것을 취한다.
나는 이 대비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어쩌면 자신을 지키는 일과는 반대 방향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눈물을 받아 마신다는 건 다른 존재의 고통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하는 일이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존재보다 더 쉽게 흔들리고 더 많이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아름다움과 생존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라는 두 개의 뿌리처럼 보였다.
나는 여기서 나가의 심장 적출식을 다시 떠올렸다. 나가는 심장을 몸 밖으로 꺼내 심장탑에 맡김으로써 불사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물론 심장을 적출한다고 해서 모든 감정을 잃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심장이 이 세계에서 감정과 깊이 연결된 기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나는 그 의식을 단순히 죽음을 피하는 기술이라기보다 살아남기 위해 자기 안의 뜨거운 무엇과 거리를 두는 선택처럼 읽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나가는 피를 마시는 새의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간 종족이었다. 영원에 가까운 삶을 얻는 대신 자기 존재의 한복판에 있어야 할 것을 바깥에 맡겨버린다. 나는 그 장면이 마치 자기 눈물의 근원까지 몸 밖으로 꺼내 봉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륜이 그 적출식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그래서 오래 남았다. 그의 공포에는 어린 시절 목격한 죽음과, 심장을 적출한 뒤 지금의 관계와 삶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함께 얽혀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너머에서 또 다른 것을 읽었다. 어쩌면 륜은 아프더라도 자기 안의 가장 뜨거운 것을 몸에 지닌 채 살아가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나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흔히 자기 보호라고 부르는 것들이 실은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는지 다시 생각했다. 우리도 살면서 상처받지 않으려고 감정의 심장을 조금씩 탑 속에 넣어두는 선택을 한다. 더 무뎌지고, 덜 기대하고, 덜 아파하고, 대신 더 안전해지는 쪽으로.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마음의 절반을 빼놓거나, 기대를 낮춰 실망할 여지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도 어쩌면 같은 종류의 적출인지 모른다.
그런 선택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매번 모든 것을 걸고 살 수는 없으니까. 다만 그렇게 안전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오래 버티는 대신 점점 더 낮은 목소리로만 노래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심장탑에 넣어둔 게 슬픔뿐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사실 그 안에는 우리가 무언가를 온전히 사랑하고 누군가의 슬픔에 반응할 수 있었던 능력까지 함께 들어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는 존재는 결국 아무것도 절실하게 붙잡지 못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었다.
케이건 드라카가 후반부에 자신이 살아 있는 이상 어떤 나가도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옛날 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외치는 장면도 이 두 새의 비유와 이어져 보였다. 세상이 언젠가 그의 상실을 과거라고 부르게 될 때, 그는 자기 존재 자체를 그 과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로 남긴다.
그는 자신의 몸을 기억의 그릇으로 내어놓은 사람이었다. 그가 살아 있는 한 나가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완전히 지운 채 살아갈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케이건은 세상의 망각 속도를 홀로 붙잡아 늦추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 소설은 기억하는 일을 아름다운 것으로만 남겨두지도 않았다. 케이건의 기억은 그를 증인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복수에 붙잡힌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잃은 것을 기억한 끝에 한 종족 전체의 절멸을 원하게 된다. 기억은 죽은 사람을 대신해 과거를 증언하게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을 과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기억한다는 행위가 때로는 사랑보다 더 무거운 책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은 이미 사라져 더 이상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존재들을 향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뿐 아니라, 그 기억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일 것이다. 케이건은 망각에 저항했지만, 동시에 그 기억 때문에 자신이 증오하는 것과 닮아갈 위험 앞에도 서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눈물을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아픔을 오래 품고 있는 일과는 다른지도 모른다. 슬픔을 지운 채 살아가는 것도 답이 아니지만, 슬픔 안에 영원히 머무는 것 역시 삶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프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만으로 자기 자신을 완성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덮으면서 나는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어느 쪽 새에 더 가까운지 생각해보게 됐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더 안전하고 오래가는 쪽으로 조금씩 나를 옮겨왔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런 선택들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을 위해 목소리를 아껴두는 것도 분명 하나의 생존법이니까. 다만 그럴 때마다 나는 아프게 느낄 수 있는 능력과 다른 사람의 아픔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함께 조금씩 내려놓고 있었던 것 같다.
눈물을 마시는 새가 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 새는 고통이 아름다워서 노래하는 게 아니다. 누구나 자기 밖으로 흘려보내고 싶어 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래 사는 것과 아름답게 사는 것 중 하나만 고를 수 있다면, 나는 이 소설을 덮고 나서도 여전히 답을 쉽게 내리지 못하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어느 쪽을 택하든 그 선택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것. 아무것도 잃지 않은 채 오래 살면서 동시에 가장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는 존재는, 적어도 이 세계에는 없었다.
그러니 나는 오래 살아남기 위해 모든 눈물을 피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가끔은 누군가가 흘려버린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그 때문에 조금 더 아프고 조금 덜 안전해지더라도, 적어도 내가 부를 수 있었던 노래까지 심장탑에 넣어두고 싶지는 않다.
In and out books - out
10년전에 읽고 다시 읽은 소설
해리포터를 제외한 처음이자 유일한 판타지소설
엄청난 몰입도에 비해 만족스럽지 못한 결말이라
(결말의 완성도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오직 개인의 취향으로 다 때려 부수고 파멸로 가는걸 좋아한다.)
다시 읽기가 망설여 졌는데 그냥 킬링타임으로.
많은 사람들이 입을모아 대작이라고 칭찬할만큼
철학도 괜찮고 흥미자체도 좋음
한 십년뒤에 또 심심하면 읽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