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율성

김은식 지음 | 이상 펴냄

정율성 (중국의 별이 된 조선의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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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6.8.15

페이지

240쪽

#근현대사 #독립 #항일운동

상세 정보

스무 살의 정율성은 자신이 아끼던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품고 의열단에 가입하기 위해 셋째 형을 따라 중국으로 향한다. 안중근과 윤봉길처럼, 김산과 김원봉처럼 이국땅의 여느 독립투사들이 그렇듯이 정율성은 오로지 자신의 신념과 소망, 의지에 따라 난징과 상하이를 오갔고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 옌안으로 떠났으며 타이항산 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정율성은 사회주의자가 되었으며 그리고 중국에서 존경받는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다. '조선 독립의 맹렬한 불꽃' 의열단이 되고자 했던 청년은 어떻게 위대한 음악가로 성장했고 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사회주의자가 되어야만 했을까? 1945년 광복 이후 그는 왜 고향 광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북한에 머물러야 했으며 다시 조국을 버리고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을까?

그는 빼앗긴 나라에서 태어나 조국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최선의 길을 찾아 떠났던 그 시대의 아름답고 의로우며 뜨거운 젊은이였다. 책은 1장 '스무 살, 바다를 건너다', 2장 '아, 옌안', 3장 '전쟁 속에서 피어난 노래', 4장 '다시 조국을 떠나다', 5장 '중국의 별이 되다'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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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ee-star

@threestar

우리가 알아야 할 인물. 생소한 이름에 끌려 책을 들었다. 아직 우리는 알아야 할 분들이 너무 많은데 그 분들의 생애를 추적하고 연구가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광주에서 태어났지만 중국의 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중국인들에게 더 유명한 정율성.
그분의 이념은 공산주의였다고 하지만 민족주의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 분단된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살아갈수밖에 없어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분이 참 자랑스럽다.

정율성

김은식 지음
이상 펴냄

2018년 5월 3일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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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애비

@xifb8pqu3kqa



중국에서는 이미 중국 3대 음악가로 알려져 있는 정율성이라지만 책을 읽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한 독립운동가이다.
일제치하에서 자신이 가장 잘할수 있는 분야에서 다른 독립운동가를 응원하고 힘을 낼 수 있도록 하신 분이다.
실제 광주에서 태어난 정율성(본명:정부은)은 그의 업적을 기려 정율성음악회도 광주에서 매년 개최가 되고 있지만 한국에서 만큼은 다른 독립투사와 달리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대부분의 독립운동이 중국에서 진행되었으며, 그 당시 중국 공산당 소속으로 독립 운동을 진행한 이력과 이후 남북이 각각의 정부를 수립할 때 중국에서의 활동 이력으로 남한보다는 북한과 정치적 이념이 같았기 때문에 생각만큼 독립운동가로써의 인지도가 없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일제 치하에서의 상황 및 중국 내륙이 정치적으로 분열(공산당과 국민당)으로 나뉘어 있던 점을 감안하면 정율성의 정치적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로 인해 국내에서는 아직 정율성을 독립투사로 지정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시진핑 국가주석이 2014년 한국 방문 시 서울대 강연에서 한국과 중국을 이어준 주요 10대 인물에 정율성을 언급했을 정도라고 하니, 중국에서의 명성은 대단하다고 보여진다.
#
"그들에게 전쟁이란 지난 수 십년 간 겪어온 일이었기에 익숙하기도 했지만, 마찬가지로 그랬기에 더욱 괴로운 것이기도 했다"
#
"때로는 이념과 사상이 누군가의 권력욕과 사리사욕을 포장한 거창한 핑계와 변명일 수도 있음을 그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정율성

김은식 지음
이상 펴냄

2017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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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스무 살의 정율성은 자신이 아끼던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품고 의열단에 가입하기 위해 셋째 형을 따라 중국으로 향한다. 안중근과 윤봉길처럼, 김산과 김원봉처럼 이국땅의 여느 독립투사들이 그렇듯이 정율성은 오로지 자신의 신념과 소망, 의지에 따라 난징과 상하이를 오갔고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 옌안으로 떠났으며 타이항산 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정율성은 사회주의자가 되었으며 그리고 중국에서 존경받는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다. '조선 독립의 맹렬한 불꽃' 의열단이 되고자 했던 청년은 어떻게 위대한 음악가로 성장했고 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사회주의자가 되어야만 했을까? 1945년 광복 이후 그는 왜 고향 광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북한에 머물러야 했으며 다시 조국을 버리고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을까?

그는 빼앗긴 나라에서 태어나 조국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최선의 길을 찾아 떠났던 그 시대의 아름답고 의로우며 뜨거운 젊은이였다. 책은 1장 '스무 살, 바다를 건너다', 2장 '아, 옌안', 3장 '전쟁 속에서 피어난 노래', 4장 '다시 조국을 떠나다', 5장 '중국의 별이 되다'로 구성되었다.

출판사 책 소개

스무 살, 바다를 건넌 가슴 뜨거운 청년의 슬픈 역사
아버지와 3명의 형이 모두 독립운동을 했던 집안의 내력 탓일까. 스무 살의 정율성(1914~1976)은 자신이 아끼던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품고 의열단에 가입하기 위해 셋째 형을 따라 중국으로 향한다. 안중근과 윤봉길처럼, 김산과 김원봉처럼 이국땅의 여느 독립투사들이 그렇듯이 정율성은 오로지 자신의 신념과 소망, 의지에 따라 난징과 상하이를 오갔고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 옌안으로 떠났으며 타이항산 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정율성은 사회주의자가 되었으며 그리고 중국에서 존경받는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다. ‘조선 독립의 맹렬한 불꽃’ 의열단이 되고자 했던 청년은 어떻게 위대한 음악가로 성장했고 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사회주의자가 되어야만 했을까? 1945년 광복 이후 그는 왜 고향 광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북한에 머물러야 했으며 다시 조국을 버리고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을까?
그가 태어난 일제강점기, 일본의 침략에 시달리면서도 치열하게 국공내전을 펼친 중국 정세,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재편된 세계질서와 한반도 정세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의 낯선 행적에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이념의 꼬리표를 잠시 거두어내고 그의 삶을 이해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중한 역사와 진실을 외면하게 된다. 그는 빼앗긴 나라에서 태어나 조국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최선의 길을 찾아 떠났던 그 시대의 아름답고 의로우며 뜨거운 젊은이였다.

‘조선 독립의 맹렬한 불꽃’이 되고자 했던 청년
정율성이 맨처음 중국으로 건너간 것은 약산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이 되기 위해서였다. 의열단이 어떤 결사체인가? 1919년 결성된 의열단은 3년 동안 총 6차례의 공격을 감행했다. 박재혁은 고서(古書) 상인으로 위장해 부산경찰서장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책 사이에 숨겨온 폭탄을 책상에 내리쳐 하시모토 서장을 즉사시켰고, 1921년 9월 12일에는 의열단원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청사 안에 폭탄 두 개를 던져 대소동을 일으킨 뒤 유유히 빠져나왔다. 1923년 1월 12일에는 의열단원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고 6일 동안이나 추격하는 수백 명의 일본 경찰들과 홀로 총격전을 벌였다. 또 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고, 의열단원 김지섭은 일본의 천황궁에 폭탄을 던졌다.
그런데 의열단이 되기 위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마친 정율성은 난징 시내의 한 전화국에서 직원으로 가장해 첩보활동을 해야 했다. 그리고 주말이면 상하이에서 러시아 음악교수인 크리노바로부터 음악 수업을 받았다. 그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으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던 의열단과 김원봉은 항일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못한다. 이에 실망한 정율성은 누나(정봉은)와 매형(박건웅)의 도움으로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으로 떠난다.
옌안에서 그는 훗날 중국의 아리랑이 된 <옌안송>, <팔로군행진곡>(훗날 중국 공식 군가가 된다) 등을 작곡하여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고 일본군과 맞선 타이항산 전선에 투입되어 2년여 동안 활약하기도 했다. 그 사이 옌안에서 만난 여성 동지 딩쉐쑹과 결혼을 했고,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과 인연을 이어가며 활동하다가 1945년 8월을 맞이한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했으나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으로 돌아오지만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북한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김일성 주도로 이루어지는 권력 재편 작업과 아내 딩쉐쑹의 활동반경 제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6.25 전쟁 즈음 중국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중국인이 가장 사랑한 한국인
2014년 7월 4일, 중국 국가 주석 시진핑이 서울대에서 강연을 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10명의 역사적 인물들을 언급했다. 그 때 최치원, 허균, 김구 등과 더불어 등장한 이름이 정율성이었다. 그는 역사상 가장 많은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은 한국인이며, 또한 오늘날 중국인들이 여전히 즐겨 부르는 노래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시진핑 주석의 아버지 시중쉰은 국민당의 장제스가 공산당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5000여 명의 홍군을 이끌고 고향인 산시성의 핵심도시인 옌안을 확보했다. 마오쩌둥의 대장정 행렬이 1년여 만에 옌안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곳을 지키고 있던 시중쉰의 공로였다. 그렇게 시중쉰이 개척하고 마오쩌둥이 자리잡은 옌안을 노래한 <옌안송>의 작곡가가 정율성이었고, 시중쉰과 마오쩌둥은 휘하 병력들과 함께 정율성이 만든 노래 <팔로군행진곡>을 부르며 싸웠다. 타이항산 전투에서 팔로군에 소속되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조선의용군 역시 정율성의 노래를 불렀다. 정율성은 그 외에도 <우리는 행복해요> 같은 동요, 민요와 연가의 작곡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광복 이후 극심한 이념 대립과 6.25전쟁을 거친 우리나라에서 정율성의 행적들 중 일부는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 그의 노래는 중국 인민해방군과 북한 인민군의 사기를 높였고, 그들은 한때 우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가에 앞서 그의 삶을 이해하며 공감하는 일마저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는 빼앗긴 나라에서 태어나 조국을 되찾겠다는 일념을 품고 최선의 길을 선택하려 했던 그 시대의 아름답고 의로우며 뜨거운 젊은이였다. 일본과 맞서기 위해 가장 위험하고 치열한 전장(戰場)을 찾아 떠돌았다. 무자비한 일제 치하에서 가족과 함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했던 그의 꿈,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몸부림을 우리는 절대 비난하거나 폄하할 수는 없다. 그가 마오쩌둥과 김일성에 대한 지나친 숭배에 대해 용감히 비판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의 삶이 지금 우리에게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이며 비극이다. 불우했던 시대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의 삶을 살다간 그에 대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감동과 연민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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