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의 비판점]
- 징비록에는 저자의 뼈아픈 잘못들이 빠져 있다. 류성룡은 1591년 통신사 귀국 보고 때 '침략은 없을 것'이라던 김성일의 의견을 지지했다. 그리고 이순신의 2차 백의종군 지시에 휩쓸린 일에 대한 기록은 희미하다.
- 서인 계열의 이일, 신립, 윤두수, 김천일에 관한 서술은 박하다. 반면 남인인 자신과 김성일은 우호적으로 그려진다.
- 하지만 징비록은 당대 국정의 최고 책임자였던 인물이 쓴 전쟁 관련 증언이다. 그 때문에 기록의 사료적·문학적 가치는 높다.
- 한 나라의 최고 지성이 '반성'을 표제로 내건 저서에서조차 자신의 잘못 앞에서는 붓이 무뎌졌다. 인간에게 정직한 자기 성찰이 이렇게 어렵다. 징비懲毖는 완성된 행위가 아니라 영원히 미완인 과제다.
[발췌한 책 속 문장]
1. 차례 [류성룡은 어떤 인물인가] 中
25P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의 공로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영웅은 투옥당하여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 외적과 싸우는 동안에도 내부의 정치는 멈추지 않았고, 영웅은 고문대에 올랐다.
28P 좋은 집안에 태어나 권위를 부릴 수 있는 벼슬자리에 오른 류성룡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던 이순신을 국난의 시대에 전격 천거하여 그 능력을 발휘하도록 날개를 달아 주었다.
=> 인재가 재능을 발휘하려면 좋은 동료와 환경도 중요한 요인이다.
43P 그런데 선조는 적자가 아닌 첫 임금이다 보니, 자신의 자리에 불안감을 느꼈음은 물론 신하들이 자신을 우습게 여기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에 늘 시달려야 했다.
=> 자신도 생각지도 못한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이 선조에겐 행운이었지만, 불행이기도 했다. 과로의 범위를 넘어서는 게 조선 왕의 일과였는데, 신하들의 시선까지 생각했기 때문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괴로웠을 것이다. 출신 콤플렉스를 지닌 건 시달린 건 영조가 떠오른다.
50P 선조는 이어 류성룡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경과 같은 신하가 나를 만나 그 재능을 다 펴 보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 선조는 류성룡을 인정하기도 하지만 서늘한 자기 비하를 동시에 한다. 선조는 자기 객관화를 너무 잘한 나머지 열등감에 휩싸였고, 후손에게 지탄받는 행동들을 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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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차례 [징비록은 어떤 책인가] 中
70P 시대가 바뀌어 국난의 모습도 바뀌었지만, 나라가 그리고 한 개인이 스스로 서지 못하고 힘을 갖지 못하고 사리사욕에 빠져 있고 현명한 결단을 하지 못했을 때의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71P 자신의 경험만을 진리로 여기고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삶은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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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차례 [징비록 제1권] 中
100P 내가 말했다. “나라가 태평세월을 누린 지 오래 되면 군사들이 겁약해져서, 과연 위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적에게 항거하기가 아주 어려운 법입니다.”
=> 당시 전쟁 준비에 비협조적이었던 것은 조정만이 아니라 노역을 거부한 지방 양반과 백성들에게도 해당했다. 태평세월이 평생 가면 좋겠지만, 인류사는 영원한 평화를 용납하지 않았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현대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평화는 기적과 매우 가깝다. 타성에 젖어서 힘들겠지만, 국방의 기본은 최악의 수를 생각하고, 이를 막기 위해 대비하는 것이다. 평화와 안보는 양립할 수 있다.
110P 그(신립)가 앞장서 이끌고 나가니, 병사들은 산란한 모습으로 저어하다가 멀거니 따라 나갔다. 김여물도 역시 그와 함께 갔는데 좋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 신립은 여진족 토벌이란 과거의 성공에 갇힌 리더였다. 조총이라는 새 변수 앞에서 검증된 전술을 고집한 신립은 낡은 정답을 확신한 채 군대를 파멸로 이끌었다. 다만 신립은 서인에 가까웠고, 징비록의 서인 묘사는 박한 면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좋을 것이다.
130P 마산역을 지나가는데 밭에서 일하던 사람이 이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말하였다. “나라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시면 우리들은 누굴 믿고 산단 말입니까?”
=> 조직의 리더가 방향을 읽으면 휘하 조직원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151P 그들은 재신들을 지목하여 크게 꾸짖었다. “너희들은 평일에는 앉아서 나라의 녹만 먹다가 이제 와서는 나랏일을 그르치고 백성마저 속이는구나!”
=> 오늘날의 공직 윤리와 모든 조직의 책임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조상들의 질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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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차례 [징비록 제2권] 中
228P 하루는 밤에 큰비가 왔는데, 굶주린 백성들이 내가 있는 숙소의 좌우에 모여 신음하는 소리는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살펴보니 여기저기 굶어 죽은 사람이 즐비했다.
=> 전쟁의 끔찍함에 청각과 시각 등 공감각적으로 전해진다. 밤에는 신음으로 들렸던 것이 아침에는 시신으로 바뀌었다.
255P 남이신이 전라도에 들어서자 군민들은 길을 막고 이순신이 원통하게 잡혔음을 호소했는데, 그 수효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 이순신의 투옥에서 조정의 판단과 민심의 판단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권력은 이순신을 죄인으로 규정했지만, 백성은 그를 은인으로 기억했다.
257P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 집 하나를 지어 운주당運籌堂이라 이름하고, 밤낮으로 그곳에서 지내며 여러 장수들과 전쟁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을 뿐 아니라, 졸병이라도 군사에 관한 일이라면 언제든지 말하게 하여 군사적인 사정에 통하도록 했다.
=> 뚜렷한 운영 철학이 있고, 아래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되어 있는 이상적인 조직의 모습.
271P 진린은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통제사는 온 천하를 다스릴 만한 재주와 나라의 어려움을 이긴 공이 있습니다.’ 이는 진린이 마음으로 감복한 까닭이었다.
=> 처음에는 조선군을 멸시하고 행패를 부리던 진린이 이순신의 인품과 실력에 감복해 황제에게 올린 글이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논쟁이 아니라 실력과 인격이었다.
277P “바야흐로 싸움이 급한 때이니 내가 죽은 사실을 알리지 말라.”
=> 이순신은 직무에 대한 책임의 극한을 보여주었다.
278P 그의 영구 행렬이 지나는 곳이면 백성들은 곳곳에서 나와 제사를 지내며 울부짖었다. “공께서 우리를 살려 주셨는데 이제 우리를 버려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282P 이순신은 재주는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서, 백 가지의 경륜 가운데서 한 가지도 제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참으로 애석하다.
=> 천거자였던 류성룡은 이순신의 못다 핀 가능성에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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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차례 [녹후잡기] 中
298P 뒷날에 만약 원대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온다면 나 같은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버리지 말고 이런 제도를 마련하기 바란다.
=> 류성룡은 자신의 시대에 실현하지 못한 개혁안을 미래의 독자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308P 임금께서는 그 안을 조정에 내려보냈으나 병조에서 이를 거행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효과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 왕이 승인해도 관료 기구에서 개혁이 멈추었다. 이것은 16세기 조선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조직에서 흔히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