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고 세상과 마주할 아이들에게
얼마 전 마이스터고 입시 설명회장에 다녀왔습니다.
입시설명회와 마이스터고를 견학하면서 떠올랐던 책이 있습니다. 이전 학교에서 만났던 허태준 작가님의 책이었습니다.
당시 작가님을 뵈었을 때 참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단단하고 건강한 가치관, 그리고 책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다정한 눈빛이 참 따뜻했거든요. 특히 아이들과 함께 글쓰기 수업을 하실 때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서툴고 거친 문장 속에서도 아이들 각자가 품은 빛나는 가능성을 먼저 알아채고, 다정하지만 묵직하게 생각을 틔워주던 그 지도 방식이 참 좋았습니다.
책과 사람을 그토록 아끼던 그분이 쓴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가 절실하게 생각나 서가에서 책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다시 펼친 책 속에는 여전히 마이스터고와 특성화고라는 울타리를 넘어 거친 산업 현장으로 나아간 열여덟·열아홉 청춘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책장을 넘기며 자연스레 독립영화 〈3학년 2학기〉가 겹쳐졌습니다.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들이 교복을 벗기도 전에 기름때 묻은 작업복과 헐렁한 안전모를 쓰고 나선 현장실습. 영화 속 아이들이 느끼는 막막함과 고단함은 허태준 작가의 문장과 소름 돋을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특히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대목은 바로 '경계에 선 아이들의 혼란'이었습니다. 교복을 벗었으니 마냥 학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한 대우를 받는 직장인도 아닌 애매한 위치. 캠퍼스의 낭만을 이야기하는 또래 친구들과도, 거친 현장에서 묵묵히 버텨내는 베테랑 어른들과도 온전히 섞이지 못한 채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일까" 방황하는 그 정체성의 혼란이 너무나 아프게 와닿았습니다. 아직 삶의 뿌리를 단단히 내리기도 전에, 어중간한 어른으로 내몰린 아이들의 쓸쓸한 그림자였습니다.
그리고 책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가장 비극적인 현실, '어린 노동자의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배우러 간 현장에서 제대로 된 안전망조차 없이 홀로 위험에 노출되다 스러져간 수많은 아이들의 이야기.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차가운 기계 틈에서, 열악한 작업장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던 그 비극 앞에 책장을 넘기는 손이 몇 번이고 멈춰 섰습니다. 배움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노동력을 값싸게 소비하고, 위험마저 가장 어린 노동자에게 떠넘겨온 어른들의 부끄러운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단순한 비극의 나열이나 분노의 고발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학교에서 마주했던 작가님 특유의 건강하고 따뜻한 시선이 문장 바닥에 단단히 깔려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허태준 작가님은 구조적인 부조리와 참혹한 현실을 그저 담담하게 적어 내려갑니다. 땀 흘려 기술을 익히고 정직하게 일하는 청춘들의 노동 그 자체를 결코 불쌍한 동정의 대상으로 격하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일구어가는 정직한 땀방울과 자부심을 누구보다 온전하게 존중하고 응원합니다.
글쓰기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자기만의 언어로 당당하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셨던 작가님처럼, 이 책 역시 세상의 편견과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직업계고 아이들에게 가장 따뜻하고 힘 있는 자기 목소리를 돌려주고 있습니다.
책을 다시 읽으면서 우리 아이들이 영화 속 주인공처럼 외로운 작업장에 홀로 방치되지 않기를, 경계의 불안 속에서 스러지지 않고 안전하고 존중받는 노동 속에서 온전한 어른으로 자라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교복 위에 작업복을 덧입고 세상이라는 거친 파도로 나설 준비를 하는 모든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등을 든든히 지켜주어야 할 우리 모두에게 이 책을 다시 한번 깊이 권하고 싶습니다.
<<마음에 남는 구절>>
“수험생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광고 문구는, 거리 가득한 축제 분위기에서 자꾸만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 같았다. 입시를 준비하지 않았던 열아홉의 나는 수고하지 않았던 걸까? … 열아홉 할인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공장에서 일하던 나에게.”
우리 사회가 보편적인 10대의 통로로 여기는 '입시'와 '대학'이라는 정해진 레이스 밖에서, 교복을 채 벗기도 전에 거친 일터로 뛰어들어야 했던 청년 노동자의 솔직하고도 뼈 아픈 심경을 대변합니다. 그러면서도 사회가 호명하지 않던 이름 없는 시절의 노고를 ‘열아홉 할인’이라는 소박하고도 쓸쓸한 비유로 표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땀 흘리던 모든 청소년과 청년 노동자의 존재를 깊이 있게 일깨워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