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성에서 전혜린까지, 읽고 쓰는 여자들의 수난사. 그 스스로 ‘읽고 쓰는 여성’인 저자 김용언은 전혜린을 경유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읽기와 쓰기가 폄훼되어온 기나긴 역사를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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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녀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 내용 요약
이 책은 한국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신화로 남아있는 전혜린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당대와 시대를 넘어 '읽고 쓰는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삶의 궤적과 내면의 풍경을 밀도 있게 추적합니다. 저자 김용언은 전혜린이 남긴 치열한 기록들을 재해석하며, 그가 단순히 비운의 아이콘이나 낭만적 천재로 소비되는 현상을 경계하고, 그 이면에 숨겨진 '지적인 여성'으로서의 고뇌를 조명합니다. 📚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
전혜린은 1934년생이다. 그녀의 이름과 에세이, 번역물인 생의 한가운데를 읽은 건 아마도 20대 초입 무렵인 듯싶다.
고등학교 시절 읽게 된 독일문학 소설에서 헤르만 헤세, 루이제 린저를 접하게 되고 특히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의 니나는 굉장히 강렬한 인물로 기억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나 서사의 중심들은 언제나 남성이었고, 여성 작가들의 소설 속 주인공들도 명예 남성이지만 여전히 여성성을 뛰어넘지 못한다고 생각한 듯싶다. 그런 인물들 속에서 전혜린이 번역한 니나는 그녀와의 교집합적인 느낌으로 전달되었었다.
전혜린은 나의 어머니보다도 더 높은 연배의 인물이다. 그녀가 60년에 사망했기에 그녀의 에세이나 지면을 통해서 본 전혜린은 30대 중후반의 읽고 쓰는 당대에 눈길이 가는 지성의 여성으로 기억되고, 또한 내가 전혜린을 알게 되었던 시점점이 20대 초반 무렵이기에 지금의 아이돌 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었다.
이 책을 접하고 전혜린이라는 이름을 마주치면서 결혼과 육아로 물러나 있던 책들 속에서 여전히 소장각으로 꼽혀 있는 책장의 전혜린의 책들을 다시 본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전혜린의 글로 인용하는 두 편의 에세이 바로 그 책들이다.
'들어가며'에서 저자가 전혜린은 흑역사인가 라는 제목은 굉장히 호기심을 준다.
이제 와선 '책 읽는 여자의 흑역사'의 대명사쯤으로 여겨지는 전혜린에 대해, 전혜린에 열광했던 세대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과거의 인물 전혜린의 지적 허영이 지금에 와서는 유치해 보인다는 게 비난이 근거가 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남들과 달라지겠다는 그 허영심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성장해 온 출발점이 아닌가?
호기심과 향수에서 시작된 책 읽기는 수없이 인용되는 많은 논문들이나 저작물을 통해서 한국 근현대 여성에 관한 다수의 연구서들까지 확장됐던 독서의 감상문이기도 하다는 소회가 이해된다.
문학소녀라는 말은 문학청년에 비해서 멸칭의 의미로 문화적 배경은 여성이 관여되었기에, 여성을 주체로 내세웠기에 그러한 맥락으로 통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에는 글 쓰는 혹은 소설 쓰는 이라는 구체적인 행위인 글을 쓰는 일을 하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표현된다. 여류라는 말이 젠더 차별적이라는 분위기로 특정 성별로 선입견을 입힌다는 의식들이 생기고 지금은 여류라는 말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전혜린의 출생 배경과 집안에 대한 이야기부터 장이 시작된다.
전혜린이 새로운 유형의 인간-여성이자 예외적 존재를 가능하게 했던 존재는 그녀의 아버지 전봉덕이었다는 이른바 글을 읽고 쓸 수 있음이 가능한 부유한 집안임을 그리하여 그녀가 독일 유학까지 갈 수 있었던 환경과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읽고 쓰는 것은 경제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지금도 쉽지 않으니 말이다.
그녀가 부잣집 딸내미의 현실감 없는 문학소녀의 이미지로 각인되고 평가되는 것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았던 독일 유학 생활의 생활의 고단함을 보여주는 글들의 인용에서는 전혜린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저평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역시 타국에서 어린 나이에 홀로 출산과 독박 육아, 생계를 위한 번역 일을 했던 것에 대해선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그런 현실적인 경제관이 떨어지면서도 또한 그런 일기들을 통해서 자신의 열망감을 충만했던 이의 현실과 이상의 모습을 보게 된다.
여성 인물에 대한 저평가나 혹독한 평가들을 읽을 때, 당대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끊임없이 분투했을 그녀들의 자의식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는다고 누구나 다 자의식과 자각을 하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런 자각 속에서 길을 찾고 걸어가려 했던 그녀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시도나 행위들에 대해 평가를 남성들_사회의 관점에서 비판된다는 것이 저자가 변호를 하고자 했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문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전혜린의 상징성을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번역가로서의 전혜린의 궤적은 살펴보면 독일문학을 우리 사회에 소개하고 지금은 고전이라고 불리는 소설들을 번역하였던 기획력을 본다.
'9 신여성에서 여학생까지, 소녀의 탄생'편을 통해서 전혜린 이전의 1세대, 2세대의 여류 문인들의 삶과 궤적을 제시하면서 여성의 책 읽기와 글쓰기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준 점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던 여류라는 평가의 시대적 이중성에 분투했던 당대의 여성 지식인의 분투기를 새삼 확인한다.
'10 소녀 감성의 폄하'편에서는 맨스플레인이 느껴졌다. 문학소녀에 대한 폄하와 여성의 독서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남성적 관점이. 여성의 독서를 계몽이나 선도의 대상, 의미로 생각하는 게 너무나 노골적이고 훈계조로 드러나는 글을 통해서.
어찌 보면 전혜린을 유학 후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재능과 자기 확장성을 더 꽃피우지 않았을까 싶다. 6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 전혜린이 느낀 한국적 사회 정서와 독일 사화에서 인식했던 자기 확장성의 벽은 돌아온 이후에 늘 독일에 대한 향수, 유럽에 대한 향수를 통해서 드러난다.
오랫동안 살아서 말년에 이른 전혜린은 청춘의 감성을 지나서 어떤 감성과 글들로 이야기를 했을지 궁금하다.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 빛과 그림자는 늘 공존한다. 그림자로 인해 빛이 더 빛나지만, 둘의 관계는 함께이기에 의미가 있다.
읽고 쓰는 여자의 아이콘이었던 전혜린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그녀의 빛과 그림자를 본다. 또한 그 후광들로 인해서 읽고 쓰는 여자의 변호가 변호만으로 끝나지 않고, 개인성으로 평평하고 편안해지는 사유성으로 읽기와 쓰기의 존재로 인식의 변화가 되어가고 있다고 믿고 싶다.
이 시대에 다시 전혜린이 소환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처럼 처음 독일문학이나 책 읽기에 빠져들기 시작한 이들에게는 한 번쯤 이 분야에 역사적 인물처럼 다가오는 사람이기에, 그녀로부터 책 읽기의 역사에 수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과대평가도 문제이겠지만 저평가도 문제이니까, 빛과 그림자를 그대로 바라볼 필요성이 있다. 시대의 한계라는 건 어느 시대에나 있고, 그럼에도 그런 궤적을 통해서 또 한 걸음 한 걸음이 되어 길들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