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김익록 지음 | 시골생활(도솔) 펴냄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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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0.1.5

페이지

232쪽

상세 정보

생명사상의 대부로 알려진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강연과 책, 인터뷰에서 위로와 격려가 되는 이야기들을 가려 뽑은 잠언집이다.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를 자신의 몸처럼 여기며 살았던 삶과 적까지도 따스하게 감싸 안는 선생의 인품을 짧은 글과 그림으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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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선생의 잠언집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김익록 지음
시골생활(도솔)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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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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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생명사상의 대부로 알려진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강연과 책, 인터뷰에서 위로와 격려가 되는 이야기들을 가려 뽑은 잠언집이다.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를 자신의 몸처럼 여기며 살았던 삶과 적까지도 따스하게 감싸 안는 선생의 인품을 짧은 글과 그림으로 만날 수 있다.

출판사 책 소개

죽비가 되고 경책이 되고
위로와 격려가 되는
무위당 장일순의 말씀과 서화


1. 왜 지금 장일순인가?

이 책은 생명사상의 대부로 알려진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강연과 책, 인터뷰에서 주옥같은 말씀들을 가려 뽑은 잠언집이다.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를 자신의 몸처럼 여기며 살았던 삶과 적까지도 따스하게 감싸 안는 선생의 인품을 짧은 글과 그림으로 만날 수 있는 책.
밥상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자는 ‘한살림운동’을 태동시켰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뒷전에 물러나 있던 사람. 작은 도시 원주에 살면서도 세상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 따르던 사람들이 바른 길을 가도록 이끌었으며, 상처받은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준 어머니 같은 사람. 정치와 종교, 경제와 예술, 교육과 철학의 여러 영역을 아우르며 조화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 평생 변변한 돈벌이를 하지 않았으면서도 부부간이나 가족이 화목했고 장례식에 3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였다는 사람.
장일순 선생을 만나고 나면 상대만 탓하며 옹졸하게 살아온 자기를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영성의 시대, 통합의 삶을 여는 내 안의 훌륭한 자기를 만납니다.

2. 장일순(張壹淳, 1928~1994)의 삶

장일순 선생은 원주에 대성학교를 세운 교육자이며 사람의 얼굴을 담아낸 난초그림으로 유명한 서화가요, 신용협동조합운동과 한살림운동을 펼친 사회운동가이다. 1970년대 원주를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본거지로 만든 지도자요,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이 가능한 공생과 살림의 문명을 주창한 생명사상가이다. 또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 유학·노장사상에도 조예가 깊었고, 특히 해월 최시형(崔時亨)의 사상과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받아 일명 '걷는 동학(東學)'으로 불리기도 하는 등 종교 간의 장벽을 넘어 대화를 추구한 선지자이기도 하다.
선생은 1928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1994년 원주시 봉산동 자택에서 67세를 일기로 영면하기까지, 서울에서의 유학기간(서울대 미학과 중퇴)과 5?16군사정변 직후 사상범으로 춘천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른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고향 땅 원주를 떠난 적이 없었다. 생애의 거의 대부분을 원주라는 작은 지방도시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았으면서도 언제나 시대의 정치?사회적 변혁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가진 선생은 늘 세상을 바로 보았고 앞서 보았다. 그리고 당신을 통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와 용기를 얻으려는 사람들을 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맞이했다. 많은 이들이 선생을 찾아와 삶의 지표와 용기와 희망을 얻고 돌아갔다.
선생은 선각자요 만인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돌아가고 나서 선생은 더욱 많은 이들의 스승이 되었다.

3. 장일순의 서화와 호

1) 무위당의 서화
서화(書畵)에 조예(造詣)가 깊었던 선생은 매우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이뤘다. 예서(隸書) 글씨는 매우 미려(美麗)하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만년에는 난초 그림에 사람의 얼굴을 담아낸 ‘얼굴 난초(擬人蘭)’로 유명했다. 한자, 한글 서예와 난초, 대나무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 선생의 글씨와 그림에서는 선생의 겸허한 인품과 넓고 깊은 세계관이 잘 드러나며 또한 오늘날의 현대적 감각에도 잘 부합되는 조형미(造型美)가 나타난다.
선생은 원주 봉산동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나, 뜻을 같이하고 같은 길을 걷는 도반들에게 글씨와 그림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거기에 반드시 그 인물이 지켜야 할 경구와 격언 또는 시구를 적어주었다. 1980년대 말 많은 재야 단체들이 '기금 마련전시회'를 열 때마다 그는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작품을 보내주었다. 그리고는 사례비를 받은 일이 없다. 1988년 서울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서화전도 한살림 기금 마련을 위한 것이었다.
선생은 호(號)를 1960년대 이후 줄곧 청강(靑江)으로 쓰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무위당(无爲堂), 일속자(一粟子), 조한알 등으로 바꿔 사용했다.

2) 무위당의 호

_청강(靑江)
선생이 처음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 낙관을 할 때 사용한 호는 청강(靑江)이었다. 혼탁한 세상 속에서 맑은 강물이란 얼마나 뜻 깊고 아름다운가 하는 마음에서 붙인 자호(自號)라고 한다. 힘겹게 살아가면서 맑은 강을 만나면 거기에 잠시 앉아 쉬어보자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청강(靑江)’이라는 호의 ‘청(靑)’자는 단지 ‘푸르다’는 뜻만이 아니라 ‘맑다’는 뜻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_무위당(無爲堂)
선생은 산업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물질 중심의 풍요로움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삶이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고 공동체의 기반을 흔든다는 것을 깨닫고 자연과 우주의 도리에 의해 움직이는 새로운 인간 시대를 염원하여 스스로 ‘무위당(無爲堂)’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소비적이고 경쟁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인위(人爲)의 질서 대신 자연 그대로의 무위(無爲)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_일속자(一粟子), 조한알
공생과 협동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자리가 끊임없이 작아지고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 ‘일속자(一粟子, 조한알’)라는 호이다. 선생은 공동체의 화합과 협동을 위해서 경쟁을 피하고 남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 것을 강조했다. 공생하는 길에는 나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이 필요하며, 그 겸손은 인위적인 구별을 거부하는 무위의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나락 한 알 속에 들어있는 우주의 이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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